#1. “당시 상황을 한 번 시연해보시겠어요?” 지난해 성폭력 사건 심의를 위해 열린 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에서 모 심의위원은 이 같이 말했다. 학폭위 현장에는 성폭력 피해자도 있었다. 해당 학폭위를 운영한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시연해보라’는 말을 들은 피해자 학부모가 민원을 넣으면서 불복 소송으로 이어졌다”며 “학폭위원들의 전문성 결여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2. “순하게 생겼네. 가해자 아닐 것 같은데요?” 지난해 한 교육지원청에서 열린 성범죄 관련 학폭위.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이 진술을 마치고 나간 후, 한 학폭위원은 이 같이 말했다. 학부모 위원으로 참가한 그는 “아들 키우는 입장에서 보면, 피해자가 정말 싫었으면 즉각 신고했을텐데 그러지는 않았다”며 “먼저 꼬리를 흔들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피해자 책임’ 취지의 발언이다.
‘불량’ 심의위원들로 인한 부실 학폭위 심의가 전국에서 잇따르고 있다. 학교폭력(학폭)에 대한 사회적 민감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정작 사안을 심의·처분 하는 핵심 제도인 학폭위는 전문성 없는 심의위원 때문에 여전히 미완성이다. 학폭위가 열림에도 출석을 하지 않는 변호사 위원 역시 학폭위가 부실하게 운영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 ‘불량’ 학폭위 호소 전국서 잇따라=8일 교육계 등에 따르면 학폭위 심의위원의 전문성 문제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전국에서 나오고 있다. 각 학교에 학폭 신고가 접수되면, 피해 학생 의사에 따라 학교장 자체 해결 혹은 교육지원청 학폭위 절차를 밟게 된다. 학교폭력예방법에 따라 학폭위가 열리고 학폭위 구성은 학부모 위원, 학폭 전문가인 변호사 또는 교수, 연구원 등이며 이들이 1호(서면사과)~9호(퇴학)까지의 처분 수위를 결정한다.
학폭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면서 학폭위 심의 건수는 급증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2학년도 전국 학폭위 심의 건수는 2만3603건으로, 전년(1만5653건) 대비 50.7% 늘었다. 그러나 개별 사안 심의는 부실하다는 것이 현장의 지적이다. 특히 학폭위 구성원 가운데 유일하게 법적 자문을 담당하는 변호사들의 불출석은 학폭위 부실 운영의 주요 원인이다.
▶변호사 ‘밥먹듯’ 불출석…학폭위 부실로 이어져=변호사도 할 말은 있다. 바로 ‘건당 10만원’에 불과한 수당 탓이다. A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심의위원으로 이름만 올려놓고 아예 얼굴도 비추지 않는 분들도 적지 않다”며 “길어지면 하루 종일도 걸리는 심의를 하고 10만원을 받느니 본인이 수임한 사건을 맡는 게 훨씬 이득인 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B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변호사 위원은 자칫 극단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심의에서 법적 근거로 무게 중심을 잡아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자신의 재판 일정 등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법적으로 학폭위 변호사 위원의 출석이 의무는 아니다. 이런 허점으로 변호사 사이에선 학폭위 심의위원 이력이 ‘홍보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학폭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한 변호사는 “변호사가 정작 심의엔 나오지 않으면서 블로그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력으로만 달아놓기도 한다”며 “심의위에서 활동을 얼마나 하는지는 비밀사항이기 때문에 의뢰인과 상담하면서 어필하면 사건 수임으로 연결하는 데 상당히 유리한 면이 있다”고 전했다.
부실한 학폭위 운영은 곧 졸속 심의로 이어진다. 변호사 등 전문가 위원 없이 학부모 위원 중심으로 심의가 이뤄지면서 이 같은 부작용이 잇따른다고 한다. C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심의 관련해 주로 들어오는 민원 중 하나가 학부모 위원의 질의 방식”이라며 “정황상 가해 사실이 확실한데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가해 학생에 ‘거짓말 하지 말라’, ‘이러면 조치가 강해질 수 있다’며 사실상의 압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 “법 개정해달라” 교육청서 호소도=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몇몇 교육청의 노력도 있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우선 변호사를 해촉해봤자 재채용이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지방의 한 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지방은 변호사가 없어 심의위원을 맡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상황”이라며 “불성실한 심의위원이 많아도 해촉 논의는 해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학폭위 심의위원 3분의 1 이상을 학부모로 구성하도록 한 법적 허점도 있다. 이와 관련 한 교육계 관계자는 “치유적 목적에 중점을 두고 학폭 사안을 대부분 학내에서 처리하던 때의 제도가 아직 방치돼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서울시교육청은 최근 교육부에 ‘학부모 심의위원 법적 의무 비율을 낮춰달라’고 교육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신뢰성과 전문성이 없는 위원으로 심의가 부실해지고 있어, 학부모 비중 기준을 완화하고 전문인력을 더 투입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 “불량 위원 즉시 해촉 제도 만들어야”=교육부도 문제의식이 없지는 않다. 다만 오는 신학기 도입될 학교폭력전담조사관 등 새로운 제도로 일정 부분 해소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심의 공정성을 위해 변호사가 필요하지만 법적으로 수당 지급에 한계가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며 “학교전담경찰관(SPO) 학폭위에 의무적으로 의촉하고, 학교폭력전담조사관도 참여하도록 장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폭력전담조사관은 퇴직 경찰 등 인력을 활용해 기존에 교원들이 맡던 학폭 사안조사 업무를 대신 맡는다.
다만 전문가는 여전히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해준 학교폭력연구소장은 “부적절한 결론이 나온 심의위 참석 회의록들을 보면 의원들 간 토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주도에 의해 결론이 난 경우가 많다”며 “심의위원을 선별할 때 연속으로 3회 이상 빠지면 즉시 해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유경 이화여대 학교폭력예방연구소장도 “학부모 위원의 역할이나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혜원·안효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