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천개의 파랑’ [국립극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중략)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소설 ‘천 개의 파랑’ 중)
‘인간의 실수’로 태어난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에게 다시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소설 중)이 펼쳐졌다. 무대가 구현하는 콜리의 하늘은 천 개의 단어로 표현 못 할 눈부시고 찬란한 하늘이었다.
‘천 개의 파랑’을 쓴 천선란 작가는 “활자 밖으로 튀어나와 구현된 콜리를 보자마자 눈물이 났다”며 “콜리가 무대에 선다는 건, 입체로서 나에게 말을 걸어준다는 감동이었다”고 말했다.
SF(공상과학)문학을 이끄는 젊은 작가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이 연극과 뮤지컬로 태어났다. 국립극단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4월 28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을, 서울예술단은 뮤지컬(5월 12~26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을 선보인다.
‘천 개의 파랑’은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기 시작한 2035년의 한국을 배경으로 인간과 로봇, 동물의 이야기를 통해 종을 넘어선 연대와 인간성의 회복을 잔잔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소설엔 무대 콘텐츠에 어울릴 만한 드라마틱한 사건 사고는 없다. 콜리의 시선을 따라 인간의 삶과 감정을 배워가는 ‘천 개의 파랑’은 서정적 색채로 가득 채운 그림책 같기도,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아주는 동화책 같기도 하다.
서울예술단 ‘천 개의 파랑’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천선란 작가 [서울예술단 제공] |
이 소설은 지금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이다. 해외 출판사와의 판권 계약은 물론 연극, 뮤지컬로 제작을 시작으로 웹툰 제작도 앞두고 있다. 영상 매체의 러브콜도 많다.
천선란 작가는 서울예술단 ’천 개의 파랑‘ 제작발표회에서 “요즘은 먹먹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점점 개인화되며 사회는 개개인으로 흩어지고, 규범도 사라져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다”며 “SF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거대 담론을 담고 있다. 결국 ‘사회란 이런 것이구나’는 답을 찾는 느낌으로 SF를 찾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과 뮤지컬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막을 올리게 됐다. 천 작가는 “작년 이맘때 연극과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며 “출판사와 에이전시 2개의 소통창구로 연락하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무대에 오르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서 개막한) 연극을 보고 나니 뮤지컬은 어떨까 기대감이 들었다. 제목처럼 파랑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다.
다만 천 작가는 영상 매체로의 제작엔 고심이 많았다. 그는 “‘천 개의 파랑’은 영화나 드라마로 먼저 제작될 수도 있었지만, 영상 매체로 제작될 경우 작품 속에서 말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만큼 동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 우려가 있었다”며 “공연은 무대 문법을 통해 로봇과 말을 표현할 수 있어 소설의 주제를 잘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극의 중요한 흐름엔 공정 과정 ‘실수’로 인지 능력을 갖추게 된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와 경주마 투데이의 만남, 그리고 우정이 자리한다. 늘 최고의 호흡을 맞췄지만, 투데이의 몸이 고통스럽게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스스로 낙마를 ’선택‘하는 콜리의 이야기가 그의 인생 1막이다. 이후 로봇 연구원을 꿈꾸는 소녀 연재, 연재의 언니인 은혜, 자매의 엄마인 보경을 만나 그려가는 따뜻한 드라마다.
연극 ‘천개의 파랑’ [국립극단 제공] |
같은 원작을 하고 있지만 연극과 뮤지컬의 접근 방식은 다르다. 이들 작품의 핵심은 소설을 통해 무한한 상상력을 품게 된 콜리의 구현이다.
국립극단의 ‘천 개의 파랑’은 ‘창작고감 : 연출’의 과학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시작됐다. 기술을 활용해 극장의 공간 확장을 이루기 위해 지난해 수개월 간의 워크숍 과정을 거쳤다. 현재까지 태어난 무수히 많은 첨단의 기술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고, 배우들은 기술을 사유하고 비인간을 연기하는 방법을 공유하고 배웠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최초의 ‘로봇 배우 콜리다. 초록색의 몸통을 가지고 있어 ‘브로콜리’를 줄여 콜리로 불리게 된 휴머노이드 기수는 145㎝의 크기로 태어나 인간 배우와 함께 연기한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얼굴과 커다란 눈을 표현하고, 가느다란 긴 팔과 손가락을 움직인다.
로봇 디자이너 김예슬은 프로그램북을 통해 “기능적 효율성에 초점을 두고 공기저항이 낮은 스트림 라인 형태의 곡선으로 이어진 얇고 부드러운 외관의 어린 아이 모습으로 디자인했다”며 “1000개의 한정된 단어를 알고 있고 이를 통해 다양한 감각과 감정을 배워나가는 콜리의 특성은 LED 패널 속 초록 눈빛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로봇 배우는 제작 과정도 쉽지 않았으나, 콜리는 개막을 앞두고 전원 결함 문제를 일으켜 무려 12일이나 개막이 미뤄졌다.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천 개의 파랑’은 역발상의 접근이 나왔다. 160㎝로 사람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기워낸 퍼펫(인형)으로 콜리를 구현했다. 퍼펫 콜리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사람은 총 세 명. 콜리 역의 인간 배우가 머리를 조종하고 전문 인형술사 2명이 팔과 다리를 맡아 콜리를 연기한다. 콜리의 절친 투데이도 인형으로 제작됐다.
서울예술단 ‘천 개의 파랑’ [서울예술단 제공] |
연출을 맡은 김태형은 “로봇 콜리와 말 투데이의 구현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 작품을 풀어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제작 과정에서 기계 장치로 만드는 말도 검토했지만, (기계 장치가) 신기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 전달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인형으로 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로봇이라는 개체가 움직이고 말할 때 전해주는 생경함과 놀라움, 깨달음이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인데 인형의 섬세한 움직임이 주요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관객에게 이러한 놀라움과 다정함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장르는 다르지만, 연극과 뮤지컬은 모두 천선란 작가가 쓴 원작이 투영한 세계관과 메시지를 온전히 무대로 옮기고자 했다. 급격하게 진화하는 세계에서 조금은 소외된 누군가의 이야기를 공존과 연대라는 키워드로 꺼내들었다.
연극의 연출을 맡은 장한새는 “종, 정상과 비정상, 위계의 경계를 넘어 무엇도 배제하지 않은 채 이뤄낸 이들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연대에 많은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며 “인간보다 더 인간같은 콜리를 통해 자신들의 결핍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이들의 공존과 연대를 통한 따뜻함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의 김태형 연출가는 “‘천 개의 파랑’은 다정하고 따뜻하고 위로를 주는 메시지를 SF 안에서 잘 녹여낸 작품”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제목처럼 아주 미묘하게 다른 여러가지 색깔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