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서 시작된 단종의 서사, 대구로 향한다

‘왕사남’ 신드롬에 단종 재평가
영월의 눈물, 팔공산 자락 대구로
박팽년 후손들 ‘묘골’에 집성촌

사육신 직계 끊어져…朴씨만 명맥
마을 높은 곳 여섯명 위패 모셔
군위엔 엄홍도 ‘진묘’ 추정 봉분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사육신의 삼족을 멸함에 따라 다섯 충신의 직계 후손이 끊어졌다. 하지만 사육신 중 박팽년의 후계는 기적적으로 이어져 오늘날 대구 달성군 ‘묘골마을’의 박씨 집성촌으로 남았다. 사진은 묘골마을 가장 높은 곳에 조성된 육신사 내 숭정사. [지앤씨21 제공]


스크린 속 푸른 강물 위로 통곡이 번질 때, 은막을 바라보던 관객의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단종의 마지막 숨결을 스크린에 담아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관객 1660만 명을 넘게 동원하며 이른바 ‘단종 신드롬’을 일으켰다.

대중은 유배지 영월의 동강을 메운 슬픔에 울었으나, 역사는 다른 좌표를 가리킨다. 세월이 지났어도 희미해지지 않은 서사의 끈은 팔공산 자락을 따라 대구로 이어진다.

피로 이어진 충절의 뿌리

영화의 흥행 이후에도 사육신을 향한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세조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여섯 충신의 사당을 찾아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로 향했다. 현지를 안내한 문화유산해설사는 이곳 이름의 중층적 특징을 소개했다.

“이 마을은 과거부터 묘골이라 불렸는데, 외부에서 마을 내부가 보이지 않는 ‘묘한’ 지형, 사육신을 모신 사당의 ‘묘(廟), 그리고 형성 내력이 신기하다는 뜻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묘골마을은 순천 박씨의 집성촌으로, 사육신 중 한 명인 충정공 박팽년의 후손들이 570년째 터전을 지켜온 곳이다. 역사에 기록된 사육신 사건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세조는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이들의 삼족을 멸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철저한 탄압 속에서 다섯 충신의 직계 후손은 끊어졌다. 오직 박팽년의 가문에서만 기적 같은 생명의 불씨가 이어졌다.

당시 임신 중이던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대구 관아의 노비로 끌려왔다. 세조는 아들을 낳으면 즉시 죽이라는 어명을 내린 상황이었다. 아들을 출산했으나 하늘이 도왔다. 절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낳은 여종과 아이를 몰래 바꿔 키운 것이다. 여종은 양반가의 대를 잇기 위해 자기 친딸을 관비의 자식으로 등록하고 키웠다.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숨겨져 자란 아이의 이름은 ‘박비’였다. 임금을 향한 충절은 후손에게도 이토록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야 이 극적인 생존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왕은 그 절의의 핏줄을 불쌍히 여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산’이라는 뜻의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죄를 사했다. 희생했던 여종의 가문 역시 노비 신분을 벗어나는 보상을 받았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렇게 죄를 면한 박일산이 터를 잡고 번창한 마을이 바로 지금의 묘골이다.

“이 동네 분들은 자기들을 무슨 박씨가 아니라 ‘묘골 박씨’라고 소개해요. 사육신 박팽년 선생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입니다.”

사육신 위패를 모신 숭정사 내부.


여섯 충신을 한자리에 모은 꿈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육신사’로 걸음을 옮겼다. 솟을대문인 외삼문을 지나면 엄숙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이곳은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를 함께 모신 유일한 공간이다. 이들의 위패가 한곳에 모인 데는 기이한 사연이 있다.

원래 이곳은 처음에는 유일하게 후손을 남긴 ‘박팽년’ 한 사람만을 위한 집안 사당이었다. 하루는 박팽년의 5대손인 박계창이 선조의 기일을 앞두고 꿈을 꾼 후 사육신의 위패가 모두 이곳에 모이게 됐다.

당시 박계창은 꿈속에서 사당 문밖에 피 묻은 도포를 입은 다섯 선비가 서성이는 모습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은 “박팽년은 후손이 있어 제삿밥이라도 얻어먹으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고 탄식했다. 꿈에서 깨어난 뒤, 박계창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영남의 유림은 “사육신은 살아서도 뜻을 함께했으니, 죽어서도 함께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입을 모았고 이후 다섯 충신의 신주를 조성해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사당 건물이 지금의 규모로 성역화되며 육신사라는 이름을 갖추게 됐다.

사당 내부로 들어서면 가로로 나란히 배치된 여섯 개의 위패를 대면하게 된다. 문과 출신이자 집현전 학사였던 다섯 선비와 맨 오른쪽에 홀로 자리한 무관 유응부의 위패다. 고문관 앞에서도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으리’라 부르던 절개가 이곳에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벌겋게 달궈진 인두를 들이대도 “쇠가 식었으니 더 데워 오너라!”고 외치던 유응부의 기개가 육신사 지붕 위에 여전히 맴도는 듯하다. 충신들의 몸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들의 충절은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금기를 넘은 충신, 엄흥도의 흔적

그렇다면 또 다른 충신, 엄흥도는 어디에 잠들어 있을까. 육신사에서 나와 차를 몰고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가면, 대구광역시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닿는다. 이곳 조림산 기슭에는 단종의 마지막 길을 지켰던 충신 엄흥도의 묘소가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다뤘듯, 1457년 영월로 유배된 단종이 서거했을 때,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서슬 퍼런 어명을 내렸다. 모두가 보복의 두려움에 떨며 주검을 외면할 때,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말을 남기고 한밤중에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암장했다.

국법을 어긴 엄흥도는 가산을 모두 버린 채 영월을 떠났고, 이후 그의 삶은 비밀 속에 묻혔다. 사후 영월과 대구 군위 등 여러 지역에 그의 묘소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오랜 세월 논쟁의 중심에 섰다. 군위의 후손들은 조림산 묘소가 실제 시신이 매장된 ‘진묘’라고 주장한다.

군위의 엄흥도 묘소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소나무 숲 사이로 다섯 기의 봉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분을 감춰야 했기에 진짜 묘를 알아볼 수 없도록 가묘를 여러 기 만들었다는 추측이다. 오래된 상석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다. 현장에서 만난 엄흥도의 18대 직계 후손 엄종훈 씨는 무덤 앞에 놓인 글자 없는 상석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1474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만 해도 발각되면 부관참시를 당할 수 있는 대역죄인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묘의 주인을 밝히는 글씨를 차마 새길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군위 문중은 600년 넘는 세월 동안 물려받은 그대로 이곳을 지켜왔습니다.”

이곳이 진묘라고 주장하는 영월엄씨 군위군 문중의 후손들은 여러 물증을 제시한다. 1733년 영조 9년에 병조에서 발급한 가로 205㎝ 크기의 공식 문서 ‘완문’이 대표적이다. 국가가 엄흥도의 충절을 공식 인정하고 직계 후손들에게 대대로 군역과 세금을 면제해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실제 엄흥도의 후손이라는 증명이자 군위에 정착했다는 유력한 물증이라고 꼽았다. 군위 문중은 이 문서를 6·25 전쟁 피난 당시에도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이것만은 챙겼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소중히 지켰다.

어찌 보면 엄흥도는 역사 속 인물이면서, 동시에 오늘도 해석 중인 인물인 셈이다. 엄종훈 씨는 이곳이 진묘라고 확신하면서, 묵묵히 묘소를 지켜나가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며 말을 맺었다. “진짜 묘 문제를 두고 문중 간 진흙탕 싸움처럼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아요. 다만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이곳을 진묘로 여기며 살아왔죠. 제가 그랬듯 제 아들도 그럴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대를 이어서 모실 것입니다.”.

대구간송미술관.


대구를 적시는 문화의 축복

역사 속 흔적에서 빠져나와 현재로 시선을 돌렸다. 대구의 변화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큰 변화가 감지된다. 대표적인 곳은 사유원과 대구간송미술관이다.

군위의 조림산 자락에서 멀지 않은 팔공산 끝자락에는 인간과 자연, 건축이 고도의 사색을 이루는 복합문화정원 ‘사유원’이 펼쳐져 있다. 철강 기업의 사주가 30여년간 수목과 석재를 수집해 조성한 약 51만6000m² 규모의 이 정원은 일본으로 밀반출될 뻔한 수령 수백 년의 모과나무 네 그루를 구해오면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더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려는 다른 시설과 달리 하루 방문객을 500명 이내로 제한하는 점이 눈에 띈다. 사유원의 핵심은 ‘밀도 통제’다. 방문객이 숲길을 걷는 동안 타인의 방해 없이 온전한 고독과 마주하도록 설계됐다. 설립자인 유재성 TC태창 회장은 “10만 평 안에서 몇 명이 있어야 혼자라고 느낄 수 있는지 계산해달라”고 전문가에게 의뢰했고, 그 결과가 현재의 입장객 정원 제한으로 이어졌다.

내부는 고요와 여백이 지배하는 사유의 구조다. ‘풍설기천년’ 정원에는 수령 200~600년에 이르는 모과나무 108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람과 눈비를 견뎌내며 둥치마다 깊은 상처를 훈장처럼 새긴 나무들은 가을이면 노란 과실을 맺으며 사색의 깊이를 더한다.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소요헌과 소대 전망대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자연의 선을 깨지 않고 어떻게 동화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밖에도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승효상의 ‘현암’, ‘사담’, ‘명정’ 등을 비롯해 총 33점의 건축 작품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 산지 지형의 경사를 따라 걷는 동안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피톤치드는 도시의 소음을 단숨에 끊어낸다. 사유원의 나무와 돌, 물과 길은 따로이면서도 또 함께 서로의 여백을 떠받친다. 이곳에서는 관람보다 ‘머무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대구의 또 다른 문화적 좌표는 대구간송미술관이다. 2024년 새롭게 문을 연 이 공간은 간송 전형필의 소장품을 연중 상설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건물은 지형의 경사를 따라 계단식으로 흘러내리듯 설계되어 ‘유물을 담는 담백한 그릇’을 지향한다.

현재 진행 중인 기획전 ‘추사의 그림 수업’은 추사 김정희의 문인화 양식과 그가 중인 출신의 제자들을 길러내며 19세기 조선 화단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최초로 한자리에 모인 추사의 중년기 걸작과 70대에 그린 ‘불이선란도’ 앞에 서자 관람객들의 발길이 굳어버린다. 먹빛으로 절묘하게 구현된 난초는 속세를 떠난 선(禪)의 경지에 닿아 있으며, 시공간을 초월한 울림을 전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랑 학예사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추사의 그림은 보통 반출이 불가해서 한 공간에 모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며 “예술이 최고 경지로 승화된 작품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는 오는 7월 5일까지라 서둘러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구=김명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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