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명 넘게 사귀어봤다”…문제적 청년, ‘낭만중독’ 문제적 행보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조지 고든 바이런 편]

215. 조지 고든 바이런

낭만이 빚어내는 모든것의 중독자
‘미치고 나쁘고 위험했던’ 청년시인
해골잔 기행부터 복잡 연애사연 등
그리스 독립 전쟁서 용병 직접 참전
독기와 활력이 깃든 감각적 언어들


조제프 드니스 오드바르, 임종을 맞은 바이런(일부 확대), 1826년경, 캔버스에 유채, 166×234.5cm, 흐루닝어 미술관 [Web Gallery of Ar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편집자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그가 든 잔은 ‘해골잔’이었다


토마스 필립스, 바이런, 1813, 캔버스에 유채, 91x71cm, 뉴스테드 아베이 [BBC Your Paintings,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나도 그대들처럼 살았고,
사랑했었고,
술을 들이켰노라!

청년이 외쳤다. 그는 잔을 들고 있었다. 안에는 포도주가 넘실거렸다. 그는 은테에 입을 맞췄다. 한 모금을 크게 머금었다. 꿀꺽. 목젖이 보란 듯 오르내렸다. 현장의 공기는 따끈했다. 주황빛 열감도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파충류의 먹이가 되기보다는.” 그가 잔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술잔이 돼 신들의 음료를 돌려 마시는 게 나으리라.” 이것은 청년이 지은 시(詩)였다. 그 기묘한 문장이 당장의 비현실적 기류를 더 진하게 만들었다. 그는 품이 넓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그를 둘러싸고 모인 또래들도 비슷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모두가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것. 포도주가 담긴 그 술잔이었다. 이상하리만큼 희고 둥근 형태였다. 그럴 만했다. 이는 사실 일반 컵이 아닌, 엎어진 인간의 머리뼈였기에. 사람들은 지금, 붉은빛 액체를 해골잔에 채운 채 돌려 마시고 있었다. 그것을 든, 여전히 노래하듯 시를 읊는 청년이 이날의 기괴한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지 고든 바이런.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 특유의 나른하고도 우아한 몸짓이 돋보이는 자였다. 연애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청아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물론 당장 하고 있는 짓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머리뼈는 바이런의 영국 노팅엄셔 저택 정원에서 우연히 나온 것이었다. 이곳이 과거에는 수도원으로 쓰였던 만큼, 그다지 특이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바이런도 이를 꺼림칙하게 보지 않았다. 외려 흙에서 나온 그 물체를 은테 두른 술잔으로 삼고 싶다는 게 그의 기묘한 공상이었다. 이뿐인가. 바이런은 거기다 포도주를 담아 마시는 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훗날 바이런이 지인 토마스 메드원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그와 그의 친구들은 일명 ‘해골 기사단’이라는 모임까지 꾸리곤 “(해골)잔을 둔 채 수많은 잔인한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는 망자에 대한 모욕이지 않은가. 그런 짓을 대체 왜 했는가. 이유의 거의 전부는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낭만. 자유와 반항, 냉소와 우울에 젖은 낭만 위를 유영하기 위해 행한 짓이었을 것이다.

“미쳤고, 나쁘며, 위험한 자”


여리고 유약한 인상으로 비칠 수 있는 시인 바이런의 삶은, 돌아보면 의외로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는 많은 순간 무모했고, 그 이상으로 충동적이었으며, 아슬아슬한 모험과 스캔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미쳤고, 나쁘며, 알고 지내면 위험한(mad, bad, and dangerous to know) 사람.” 오죽하면 이런 평가까지 따라올 지경이었다.

‘악당’과 ‘미치광이’의 핏줄


토마스 스튜어드슨, 캐서린 고든(바이런의 어머니), 19세기경, 노팅엄 박물관 [Unknown sourc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바이런은 1788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다.

가문은 대대로 귀족이었다. 집안 사람 모두 외모가 출중했다. 계산에 능하고, 운동신경도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기행(奇行)을 즐겼다. 사람과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 폭력적인 면을 보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종조부는 ‘악당 영주’, 할아버지는 ‘악천후 잭’, 아버지는 그저 ‘미치광이(mad) 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특히나 아버지 ‘미치광이 잭’은 술과 노름에 빠져 있었다. 그 끝은 객사였다. 세 살짜리 아들을 남긴 채였다. 그때부터는 어머니 캐서린 고든이 바이런을 키웠다. 환경은 썩 좋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돈이 문제였다. 죽은 망나니가 남긴 빚은 터질 듯 부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애석하게도 피는 속일 수 없었다.

바이런도 클수록 점점 더 윗대의 대범한(직접적으로 말하면 대책없는) 기질을 보였다. 다른 게 있다면 타고난 재능이었다. 바이런은 계산이 아닌 에서 소질을 보였다. 휘갈기는 문장은 그 자체로 하늘 위 별자리 같았다. 쓰기에 딱히 고민하지 않고, 일단 휘갈기면 크게 고치거나 지우지 않는데도 그랬다. 그의 어른들은 수학과 군사학 등 보다 실용적인 쪽으로 두각을 보여왔다. 그렇기에 더욱 신기한 면이었다.

詩악평 나오자 외려 반격하다


조지 샌더스, 조지 고든 바이런, 1807~1809, 캔버스에 유채, 112.5×89.4cm, 영국 왕실 컬렉션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바이런은 이런 면을 안고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관심 분야는 역시나 문학과 역사였다. 1805년, 당시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이 무렵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작품을 모아 시집으로 엮었다. 그중 하나의 제목이 《게으른 나날》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그는 술값으로 곳곳에 저당이 잡혀 있었다(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두고 “무모하리만큼 돈을 무시하는 버릇이 있다”고 타박했다). 값을 매겨 출판을 결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감각의 기복이었다. 아직은 덜 영근 천재형 인재가 으레 보이는 모습이었다. 야심작은 의외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유력 문학잡지 《에든버러 리뷰》는 인신공격을 담은 악평까지 실었다. 시작부터 위기였다. 그런 한편 이는 기회이기도 했다. 바이런은 ‘악당’‘미치광이’의 자손이었다. 집안 핏줄이 이 따위 공격에 주눅 들 리 없었다. “운율을 준비하라. (…) 바보들이 나의 주제이니, 풍자여. 나의 노래가 되거라.” 바이런은 글을 벼린다. 문장을 담금질한다. 그리곤 당대 시인과 극작가, 특히나 젠체하는 비평가를 저격하는 풍자시를 막힘없이 써버린다. 《영국 시인들과 스코틀랜드 비평가들》이라는 1000부 한정 시집에서 그는 그의 적들을 멍텅구리로 몰아세운다. 뜯어먹을 먹이를 던져줘야 할 한심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표적의 실명까지 줄줄 읊으며 “비평가들은 모두 기성품”, “헤벌쭉 웃는 어리석음”, “기괴하고 신비로운 우둔함” 등 활력과 독기에 찬 문장으로 마구 채워버린다. 그는 이 시로 그들을 제대로 ‘먹였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화제몰이에 성공했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산 라자로 섬의 메키타르회 수도원을 찾은 바이런, 1899, 캔버스에 유채, 133x218cm, 아르메니아 국립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바이런은 1809년부터 다른 귀족과 함께 여행도 했다.

지중해 일대를 돌아보는 그랜드 투어였다. 빚은 아직도 살을 찌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단지 ‘때가 됐다고 봐’ 감행한 일이었다. 아무리 바이런이라도 갈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앞뒤 가리지 않은 행동은 뜻밖에도 신의 한 수가 된다. 바이런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어 알바니아와 튀르키예를 지나 그리스 땅을 밟았다. 그는 세상의 크기에 새삼 놀랐다. 영국 섬도 크다면 크고 넓다면 넓었다. 그래도 수많은 국가를 품은 대륙의 규모는 차원이 달랐다. 그 또한 귀족이고 재능도 출중한 젊은이였지만, 직접 보고 접한 천재들의 흔적은 회의감을 안겼다. 특히 서구 문명의 요람으로도 불리는 아테네. 대리석 향을 풍기는 이곳에선 눈길이 닿는 곳마다 뚝뚝한 걸작을 볼 수 있었다.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작자미상, 바이런, 1830, 97×74.5cm, 베나키 박물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어느덧 2년이 흘렀다.

낯선 바람을 깊이 마신 바이런은 또 한 번 글을 썼다.

“보라!

저기 산 위에 우뚝 선 거인을,
태양 아래 깊게 물드는 그의 핏빛 머리칼을,
불타는 그의 손안에서 빛나는 죽음의 포탄,
응시하는 모든 것을 그을리는 저 눈동자를 (…)”

허구의 화자를 앞세운 시, 제목은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서두 1·2 칸토canto)였다. 삶에 환멸을 느낀 청년이 세상을 돌며 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얘기였다. 핏빛과 포탄에 이어 칼날과 돌풍, 파멸 등 세계를 향한 직설적 단어와 감상평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는 사실상 바이런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했다.

차일드 해럴드는 찬란한 한낮의 태양 아래 몸을 녹이며,
날아다니는 하루살이처럼 흥청대며 살았지.

(…)

쾌락이라는 독에 절어,
차라리 지옥이라도 갈구하던 그는 마침내 고국에 작별을 고했지.
‘안녕, 내 조국이여, 영원히 안녕!’

겉으로는 과격하고 변덕스럽지만, 속으로는 여림과 처연함을 품은 인간. 세상 모든 것을 무관심하게 보는 듯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말못할 우울감과 죄책감을 가진 사람. 이 와중에 눈가에는 또 우수가 촉촉하게 맺힌…. 바이런은 이 시를 통해 훗날 ‘바이런적 영웅’(Byronic hero)이라고 불리는 인물상을 만들었다. 인류가 앞으로 무수한 소설과 영화에서 활용하는, 이른바 ‘추방된 왕자’의 틀을 빚은 것이다. 악당을 잡기 위해 불길에 뛰어들고, 전쟁에서 이기려고 화살 비 틈으로 돌진하는, 그간의 전통적 영웅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 시가 또 먹혀들었다. 첫 출판은 1812년 3월이었다. 판매대에 오른 책은 사흘 만에 모두 팔렸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가 유명해져 있었다(I awoke one morning and found myself famous).” 바이런 본인조차도 이런 식의 소감을 남겼다고 한다.

‘사연 있는’ 미남자의 분위기


캐롤라인 램이 그린 바이런 커플,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 [www.nls.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구름 한 점 없고, 별들만 빛나는 밤하늘 같아요.
어둠과 밝음이 가진 가장 아름답고 고운 게
그녀의 모습과 눈동자에서 만나 어우러져요.

조지 고든 바이런,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일부 발췌

바이런도 아름답게 걸었다. 수많은 여성이 그 사뿐한 발걸음을 따랐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에 이제는 유명해지기까지 한 자신을 탐하려는 눈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을. 바이런은 키 175cm에 몸무게가 적을 때는 60kg 안팎이었다. 살이 잘 찌는 편이기는 했지만, 수영과 복싱 등 스포츠에 능해 대체로는 몸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쓱 건넨 시와 편지 한 줄이면 모두가 녹았다. 선천적으로 오른발에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이마저도 ‘사연 있는’ 미남자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시만큼 솔직했다. 그렇기에 더욱 위험해보였다. 바이런은 늘 남자 주인공이었다. 나란히 선 여자 주인공을 자처하는 이? 모두 다 캐스팅했다면, 이 글 또한 지금보다 훨씬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복누나와의 스캔들까지


토마스 로렌스, 캐롤라인 램, 1827년경, 캔버스에 유채, 55×47.2cm, 브리스틀 시립 박물관 및 미술관 [Art 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바이런은 여러 의미에서 여성을 미치게 했다.

영국의 유력 귀족이자 유부녀인 캐롤라인 램은 1812년께 바이런을 처음 봤다.

캐롤라인은 스물일곱, 바이런은 스물넷이었다. 캐롤라인은 신분에 걸맞은 고상한 오만함을 갖춘 여인이었다. 이 당돌한 시인을 두고 “미쳤고, 나쁘며, 알고 지내면 위험한 사람”이라는 평을 남긴 당사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 또한 결국은 덫에 걸려버렸다.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톱니는 더 깊이 파고들었다. 캐롤라인은 산이 높은 만큼 계곡도 깊었다. 싫어하면 그 상대의 조상과 자식까지 싫어할 수 있었다. 반면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를 위해 완전한 복종과 맹목적인 헌신, 마음과 영혼을 전부 바칠 수도 있었다. 캐롤라인바이런은 어느덧 ‘뜨거운’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로 문체를 바꿔 사랑의 찬가를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런데, 바이런이 달라졌다. 그녀는 이를 참지 못했다. 바이런이 가는 파티를 졸졸 따라붙었다. 어떻게든 인파를 뚫고 나아가 팔짱을 꼈다. 바이런이 없는 그의 집을 몰래 들어가선 책에다 “나를 기억해(Remember me)!”라는 글을 휘갈기기도 했다. 격정을 참지 못한 그녀는 그 앞에서 선홍색의 극단적인 짓도 벌였다.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 순간이었다.

찰스 헤이터, 앤 이자벨라 밀뱅크, 1812,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National Portrait Galler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제임스 홈즈, 어거스타 리, 1817 [englishhistory.ne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또 다른 여인, 앤 이자벨라 밀뱅크. 은 1815년에 그런 바이런과 결혼식을 올렸다.

둘 사이에는 곧 딸도 생겼다. 다만 장밋빛 로맨스도 잠시, 그녀 또한 바이런으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도 바이런, 그리고 그의 이복누이인 어거스타 리의 관계가 가장 큰 논란거리였다. 사실 결혼 전부터도 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말이 있었다. 그저 눈빛만을 주고받지 않고, 서로에 대한 신체적 접촉까지 마다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1814년생인 어거스타의 딸, 메도라. 바이런이 이 아이의 친부라는 얘기까지 사교계에서 공공연하게 나올 지경이었다. 장막 뒤 진실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앤은 바이런을 1년 이상 잡아두지 못했다. 그러다 1816년에 이혼했다. 이로써 이번 관계도 끝이었다.

“이백명 넘게 사귀었다” 자랑까지


1816년, 4월께.

바이런은 영국을 떠난다. 돌려막던 빚을 더는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대중까지 그의 일그러진 사생활을 못마땅하게 볼 만큼 평판이 나빠져(심지어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고 한다….) 도망치듯 배에 올랐다는 설도 있다. 바이런은 스위스에서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이어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라벤나, 피사와 제노바 등 수없이 터를 옮긴다. 집이 바뀐다고 기질이 어디 가겠는가. 열아홉살 여인과 스캔들을 일으키는 등 바이런은 어디서든 조용히 있지는 못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머문 동안에만 “이백명이 넘는 이와 사귀어봤다”고 자랑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바이런은 사랑만큼 시 또한 놓지 않았다.

그는 출세작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의 3·4칸토를 마저 채워 작품을 완성했다. “내 머리칼은 새하얗게 셌지만, 세월 탓이라곤 할 수 없지.” 늙은 백발 죄수의 392행짜리 독백을 상상해 옮긴 《시용의 죄수》, “그대에게 주어진 건 영원이라는 비참한 선물이었고, 그대는 이를 잘 견뎌냈도다.” 인간을 위해 하늘의 불을 훔친 티탄 프로메테우스를 ‘바이런적 영웅’으로 재구성한 《프로메테우스》 등도 여행 중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대표작 《돈 후안》의 탄생


토마스 필립스, 조지 고든 바이런, 1813, 캔버스에 유채, 127x102cm, 정부 미술 컬렉션 [Government Art Collection,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나는 영웅을 원하노라.
이는 참으로 보기 드문 요구다.

조지 고든 바이런, 《돈 후안》일부 발췌

그리고, 훗날 바이런의 또 다른 걸작으로 거론되는 17칸토 약 1만6000행짜리의 《돈 후안》(미완성) 집필도 시작했다. 바이런은 시의 주인공 돈 후안을 여성에게 쉽게 유혹당하는 자로 그린다. 지금껏 바람둥이의 대명사 정도로 꼽혀온 이 전설적 인물을 독창적 시선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그 자체로도 신선한 발상이었다.

바이런이 재창조한 돈 후안은 살아가면서 난파, 전쟁, 질병 등 갖은 역경을 겪는다.

해적을 마주하고, 노예 시장에 팔려가고, 뜻과 상관없이 여장을 해야 하는 등 아찔한 경험도 한다. 바이런은 이 여정 곳곳에 그만의 특기를 찔러넣었다. 그것은 낭만적 문체로 풀어내는 풍자였다. 감각적인 완급 조절이었다. 진지한 로맨스를 말하다 물 흐르듯 귀족 사회의 위선을 비웃고, 반짝이는 언어를 이어가던 중 현실 인물들에 대한 속된 유머와 말장난을 뒤섞는 식이었다. “인간 삶의 모든 주제를 끌어안았으며, 신성한 하프의 가장 가벼운 소리부터 가장 강력하고 심금을 울리는 음색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을 울렸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겸 역사가 중 한 명인 월터 스콧의 평가였다. 다만, 비평가들 사이에선 선을 넘는 풍자와 부도덕한 문장을 놓고 강도 높은 비판 목소리도 나왔다. 《블랙우드 매거진》은 “더럽고 불경한 시”라고 박제할 정도였다. “나는 아무 계획이 없었어. (…) 내가 킥킥 웃고 타인도 킥킥대며 웃게끔 만드는 일 외에 다른 뜻이 있었을 것 같은가? 시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쾌활한 풍자. 그것이 내가 의도한 바였어.” 그 무렵 바이런은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부쳤다.

삶 전체를 ‘낭만주의 시’처럼 바꾸다


테오도로스 브리자키스, 바이런의 환영식, 1861, 캔버스에 유채, 155x213cm, 아테네 국립 미술관 [nationalgallery.gr,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와인 채운 해골잔을 들고 낭만을 노래했던 청년은, 끝내 본인의 삶 전체를 낭만주의 시처럼 바꿔버렸다.

바이런이 그렇게 될 것으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가 그리스 독립 전쟁에 용병으로 직접 참전하리라곤.

1821년, 그리스 혁명군은 지난 4세기 가까이 땅을 거머쥔 오스만제국에 맞서 총칼을 들었다.

바이런은 서른다섯이 된 1823년 무렵부터 혁명군 편에 제대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단지 글과 말만으로 임하지 않았다. 군화를 신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귀족이자 유명인의 이러한 행보는 혁명군에게 용기를 줬다. 그에게는 ‘해방자’라는 칭호가 따라붙기도 했다. 바이런은 원래도 그리스를 좋아했다. 과거 ‘그랜드투어’ 시절에도 만끽했던 이 땅의 문명과 문화, 시와 가사를 사랑했다. 낭만과 동경. 정치적인, 아울러 다소 개인적 욕망과 관련한 배경도 있었지만, 어쨌건 그가 참전한 데는 이런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바이런은 그의 주도하에 직접 요새를 칠 구상도 짰다. 화포장(fire master)을 고용하고, 군대의 일부까지 휘하에 거느렸다. 그런데 하필 출항하기 직전 병에 걸려 계획을 이끌지 못했다. 의사의 사혈 치료는 몸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그렇게 열병에 시달리다가, 1824년 4월19일 오스만제국 메솔롱기(현재 그리스 에톨리아 아나키아주 메솔롱기)에서 사망했다. 아직 무척이나 젊은 나이였다.

그는 모든 낭만의 중독자였다


조제프 드니스 오드바르, 임종을 맞은 바이런, 1826년경, 캔버스에 유채, 166×234.5cm, 흐루닝어 미술관 [Web Gallery of Ar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바이런은 삶의 마지막 행을 화약 냄새 틈에서 썼다. 이내 그 연기 아래서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스인은 울고, 혁명군도 울고, 친구들과 그의 못다 이룬 꿈도 울었다. 그다운 죽음이었다. 최초의 ‘바이런식 영웅’다운 종말이었다.

바이런은 무섭게 일관된 인간이었다. 그를 움직이는 건 강요나 눈치 따위가 아닌 ‘지금 당장 하고 싶은가’ 또는 ‘그 순간은 무척이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뿐이었다. 어떤 예술은 거듭되는 기행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여러 비판이 있음에도 바이런은 천재적 시인으로 감탄과 함께, 높은 이상의 상징으로 경의와 함께, 인간으로서는 크디큰 애정으로 기억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브루어가 평가한 그의 삶이었다. “그러나 나는 살았고,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 (…)” 바이런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쓰였다고 한다. 낭만도 치사량이 될 수 있다는 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것일까. 그는 낭만 중독자였다. 낭만이 빚어내는 모든 것의 중독자였다.

참고 자료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조지 고든 바이런, 황동규 번역, 민음사

Lord Byron Selected Poems, Byron, George Gordon., Penguin Books

The Cambridge Companion to Byron, Bone, Drummo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Lord Byron‘s Strength: Romantic Writing and Commercial Society, Christensen, Jerom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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