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 칼럼]번지수가 틀렸다

▲임 유/굿모닝미디어 CEO

 ⓒ2011 Koreaheraldbiz.com
2011년 9월 17일, 드디어 혁명의 나팔이 울렸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가 전 세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총구는 미국을 향했으되, 방아쇠는 의외의 곳에서 당겨졌다.
 
이제껏 소비중독 세태를 비판하며 문화운동 네트워크 구축에 주력했던 ‘애드버스터(Adbusters)라는 캐나다의 반 소비주의자(anti consumerist)단체가 ‘주동’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이다. 처음은 초라했다.

잃어버린 청춘에 분노한 수 백의 젊은이들만이 소셜 네트워크의 지령(?)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들 뿐이었다. ‘우리는 99%다’며, 1%가 국민 전체 자산의 33%를 갖고 있고, 국민 전체 소득의 23%를 차지하는 ‘비정상의 정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랍의 봄에 비견되는 미국의 가을(American Fall)이 올 지 모른다고 호들갑까지 떨고 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는가.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 ‘세상의 법칙’에 돌연 발끈한 그들이 이상(?)했다. 오죽하면 여북할까 싶다가도 ’99%라는 저 무지랭이들(?)만의 함성 갖고는 결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며, 최루탄 몇 발이면 이내 사그라지리라’, 그리 생각했다. 역사가,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로 한 달째, 글로벌 금융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가 바라다 보이는 자그마한 주코티 공원(Zuccotti Park)은 이제 성지가 되었다. 수백이 수천으로 바뀌었다. ‘점령지’ 명단에 시카고와 LA가 추가되더니 바야흐로 들불의 형국이다. 미국 100여 도시를 지나 전 세계 82개국 1500여 곳까지 함성은 메아리로 진화한다.
 
마이클 무어, 수전 서랜든, 노옴 촘스키가 지지를 선언한다. 심지어 조지 소로스까지 합류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살아서 이미 반을 내놓았고 죽어서도 나머지 반을 기부하겠다고 했으니 ‘그도 역시 ’99%다’ 라고 누군가 해석을 내놓는다. 역시 한 마디를 해도 ‘센 놈’들이 질러야 ‘그림’이 되는 세상이다.
 
점입가경이다. ‘Fed를 없애라’ ‘월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시민에게 돌려줘라’ ‘기업은 흡혈귀’ 등등, 마침내 혁명적 구호가 등장한다. 계급투쟁 성격으로 바뀌고 있다는 섣부른 진단마저 나오고 있다. 수백년 쌓인 자본주의 모순을 바로잡을 우렁찬 함성의 전주곡이라 믿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내 조국 대한민국의 하늘도 예외는 아니다. 지구가 요동친다. 이제껏 잘 먹고 잘 살았었으니 그 고통을 참기가 더 어려웠나 보다. 선진 자본주의 제국의 ‘신민’들이 거리로 쏟아지고 있다. 늘상 못 먹었으니 새삼 반역을 꿈꾸어야 할 이유가 없던 변방의 ‘인민’들은 오히려 잠잠하다. 아이러니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의 폭동과 닮았다’ 등등, 한 편에서는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그들을 동정하면서도 ‘목표가 광범위 하고, 지도부 없는조직력의 한계로 인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 이라 초치는(?) 이른바 보수 언론의 보도를 접하면서 우리네 보수 메이저 언론을 떠올린다.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한다. 점령해야 할 곳은 월가가 아니라 저 거대한 언론 집단과 정치 권력이 아닐까.

과연 금융이 원죄인가. 정말로 ‘월가’만 점령하면 99%가 1%의 귀족 신분을 회복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의 대답은 글쎄다. 그렇다고 보너스 잔치에 눈이 멀어 공적자금 투입의 기억마저 애써 지우려 하는 부도덕한 저들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분노의 대상이 잘못 되었을 때 이른바 ‘타도’의 대상을 잘못 고름으로써 맞닥뜨려야 했던 그 수많은 반동의 역사를 또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간절하다. 찬찬히 따져야 하는 이유다. 서브 프라임에서 위기가 시작됐으니 그 암담했던 당시로 돌아가야 비로소 답이 보일 것이다.
 
집만 사면 큰 돈 벌겠다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조차 낼 수 없는 형편에도 빚에 빚을 더해 집 장만 대열에 뛰어 들었었다. 그들은 99%였다. 탐욕에 일그러진 영혼, 이들 역시 위기의 공범자다. 돈 빌려 주고 또 펀드 만들어 팔기만 하면 이자와 수수료로 떼 돈 벌 것이라 믿었던 금융회사들이 있었다.

쓰레기에 쓰레기를 섞어도 결코 황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레버리지의 마술에 취해 보이는 위험을 애써 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1%였다. 위기의 주범이라 해도 무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하수인에 불과하다.
 
이자율을 낮추면 소비와 투자가 촉진돼 침체된 경제가 살아나리라 확신했던 정책 입안자들과 정치 권력이 있었다. 다소의 인플레이션이야 감내해야 하는 그 무엇일 뿐이며 부동산 거품은 필요악이라고까지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숨은 1%였다. 위기의 생산자, 위기의 진범은 바로 그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진리에 가깝다. 더 많은 돈을 갈망하는 것은 오히려 정당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자본주의는 무한 욕망을 ‘탐욕’이라는 전염병으로 간주한다. 일단 감염되기만 하면 개인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죽이고 국가를 송두리째 파괴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말해 왔다. 19세기 말 미국을 쓰러뜨릴 뻔 했던 독점의 폐해를 ‘셔면법(Sherman Anti-Trust Act)’으로 극복한 것도 같은 이유고, 신자유주의의 망령에 빠져 들기 전까지 자본주의 진영이 견지한 원칙 또한 ‘탐욕의 제한’이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 탐욕을 ‘관리’하고 ‘제한’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과로써의 부와 재산을 죄악시 하지 않는 불문율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도 부의 축적 과정이 정당하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욕망을 드러낸 것 자체로는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현재 재산과 소득이 99%든 1%든 상관없이 말이다.
 
개인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목숨도 내놓을 듯 달려 드는 것이 마땅하고, 기업은 이익이라면 저승사자와도 악수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어 놓을 책무까지 그들 자신이 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저들은 단지 욕심을 맘껏 부리면 될 일이다. 그랬다간 망할 것이 자명하고 ‘국민’과 ‘기업’이라는 자본주의 근간이 모조리 줄초상 날 것이기에 ‘아예 도박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초장에 싹을 자르는 일 따윈 다른 자들의 몫이다. 체제를 유지하는 대가로 떡고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 오로지 정치 권력의 책무일 뿐이다.

금융 감독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개인과 월가의 욕심을 탐욕으로까지 몰고 간 죄, 탐욕의 결과 그들을 파탄으로 내 몬 죄, 은행 자본가들의 로비에 넘어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칸막이를 없애버림으로써 금융 만능을 조장한 죄, 민간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한 죄, 공적자금 투입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이로 인해 생긴 성공의 사유를 막지 못한 죄, … 이 모두가 정치 권력의 잘못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월가는 점령당하고 있다. 저만치 바라다 보이는 LA시청도 금세라도 점령 당할 기세다. 함성은 메아리치고 시위의 행렬은 결의에 차 있다. 오랜 세월 혁명의 환희와 담 쌓고 살아 온 나로서는 저들이 부럽다. 같은 이치로 저들의 내일이 보여 안타깝다. 패배하거나, 좌절하거나, 혹은 아파할 것 같기에 그렇다.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점령할 곳은 월가가 아니라네. 번지수가 틀렸어. 시스템을 보아야지. 무엇이 바뀌어야 세상이 변하는지 정확하게 살펴야 한단 말일세. 그리고, 이젠 슬슬 장엄한 패배를 준비해야 할 걸세. 찬란한 승리를 위해서라면 말이야’ “Occupy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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