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유역 ‘임나4현 할양 사건’ [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백촌강 전투 [출처 야후화상]



뼈아픈 실책

512년(게이타이 천황 6년) 4월 어느 날,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년)은 가야지역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에 사신을 보내 가야의 영역인 상치리, 하치리, 사타, 모루 4개현을 백제에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백제에 파견된 일본의 관리 호즈미 오시야마도 “4개현은 백제 땅과 붙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닭과 개 소리만 들어도 그게 누구네 집 것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깝습니다. 지금 이 땅을 백제에게 넘기는 것이 이 땅을 보전하는 가장 안전한 방안입니다. (이 땅을) 백제와 떼어놓는다면 몇 년 도 못가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며 백제의 뜻에 동의하는 의견서를 본국에 보냈다. 천황은 이를 허락했다. 천황 옹립을 자신이 결정할 만큼 위세를 떨치던 당대 최고 실력자 오토모 가나무라도 이런 입장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일본서기, 제17권 게이타이천황기)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의 오에 황태자(후에 안칸천황 즉위)는 화들짝 놀라서 “오진천황 이래 우리의 직할지였던 땅을 쉽사리 이웃 나라에 넘겨줘도 된다는 말인가?”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백제 사신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굵은 몽둥이로 맞는 것과 가느다란 몽둥이로 맞는 것, 어느 쪽이 더 아프겠습니까?(천황의 뜻이 황태자 뜻보다 더 무겁다는 의미)”라고 반문하고 백제로 귀환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오토모 가나무라와 호즈미 오시야마 일당들이 백제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백제는 또 원래 백제 땅이었던 기문(전북 남원 일대라는 설)과 체사(섬진강 유역이라는 설)를 반파국(대가야라는 설)이 빼앗아갔다며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일본은 이를 백제에게 넘겨줬다. 백제 사신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필요한 가야국의 항구 다사진(경남 하동이라는 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것도 허락했다. 이에 가야 왕은 일본에 칙사를 보내 “이 항구는 직할지가 된 이래 내가 조공을 보낼 때 이용하는 항구인데 쉽사리 이웃 나라에게 줘서는 곤란합니다. 이는 경계 침범입니다”라고 항의했지만, 일본 조정은 그의 항의를 묵살했다.

이 때문에 가야 왕은 한을 품고 신라왕 딸과 결혼,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일본과 척을 지게 된다. 이는 오랜 세월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온 가야와 일본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단초가 되었다. 백제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5경박사라는 당시 최첨단 지식인들을 일본에 보냈다.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임나4현 할양사건’으로 부르는데 일본 고고학자 니시타니 다다시는 ‘전방후원분과 고대일한관계’(2002년) 논문에서 광주광역시, 나주, 함평, 영암 등지에 산재한 고분의 형태와 출토된 부장품 분석을 토대로 임나4현은 영산강 유역이라고 주장했다.

이와이의 난을 일으킨 이와이의 동상 [출처 후쿠오카현 야메시]


‘친백제계’와 ‘친신라’계의 격돌 ‘이와이 난’

게이타이천황 정권 하에서 일본은 가야 지역 주도권을 둘러싸고 신라와 충돌이 잦았는데 금관가야(김해)와 북부 탁기탄(경남 창녕, 밀양이라는 설)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일본은 527년 이를 탈환하기 위해 6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출병을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사전에 이를 눈치 챈 신라는 규슈지역 호족으로서 강력한 해상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이와이에게 접근하여 뇌물을 건네며 방해에 나서도록 공작했다. 이와이는 백제에 우호적인 일본 조정에 반감을 갖고 있던 터라 이에 응해 바닷길을 차단하고 병선을 탈취하여 방해하면서 신라 편에 서서 반란을 일으켰다. 서부 규슈 지역 호족 세력과 중앙의 천황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용호상박의 대결이었다. 이를 ‘이와이의 난’이라고 부른다.

이와이를 비롯한 규슈지방 호족들은 이미 중앙정권이 확립되기 이전부터 현해탄 연안의 해상교통 거점을 장악하고 독자적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의 백제, 영산강유역, 대가야와 쌀과 철 등의 교류·교역에 관여하면서 해상 왕국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왕권 강화는 자신들의 대외교역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므로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이와이를 중심으로 하는 호족세력은 백제와 가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 조정과는 달리 친신라 성향이었다.

일본 조정은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으나 이와이 측 반군 세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관군은 반란군을 상대로 규슈 중부와 북부지역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1년 반에 토벌에 성공했다. 천황 측의 친백제파가 규슈지방 호족세력인 친신라파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와이의 난이 끝나자 진압에 공을 세워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 모노노베노 오코시는 임나4현 할양사건으로 인해 가야세력들이 일본에 등을 돌렸다며 그 원인 제공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오토모 가나무라를 실각시켰다.

이와이의 난 진압을 계기로 일본은 지방 호족에 대한 감시 통제가 강화했고 대외통상권도 회수했다. 이로서 지방세력의 발호는 가라앉았다.

임나4현 할양 결정한 오토모 가나무라 [출처 야후화상]


백제와의 군사동맹

531년 게이타이 천황이 세상을 떴다. 그 이듬해인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금관가야와 왜의 연대는 붕괴한다. 대륙 진출의 교두보였던 금관가야를 상실한 것은 일본에게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금관가야는 오랜 세월 규슈 북부, 쓰시마, 한반도, 중국으로 이어지는 해상 교역로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대형 선박 제조 기술이 없던 당시, 소형 선박으로 규슈 서부에서 동지나해를 건너 중국으로 항해한다는 일은 목숨과 맞바꾸는 대모험이었다. 가야지역이 신라로 지배권이 넘어간 마당에 현해탄을 건넌 다음에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서북상하는 항로에서 일본이 교두보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영산강 하구였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대외 고립을 피하기 위해 더욱 백제와 밀착하면서 군사지원에 나서는데 이 무렵 백제가 일본에 14회에 걸친 요구 가운데 9회가 군사지원 요청이었다고 한다. 군사동맹이었다. 백제 의자왕은 아들 여풍장을 일본에 체류시키며 양국 간의 유대를 강화했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여풍장을 백제로 보내 지원에 나서는데 800여 척의 병선에 2만7,000여 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663년 금강 하구 충남 서천(혹은 전북 부안 개화도) 해안 일대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해 병선 400여척, 병력 10,000여 명을 잃는다.(백촌강 전투)

그 이후 일본은 나당 연합군이 보복으로 일본을 침공할 것에 대비하여 봉화대 설치, 수비병 배치, 주요 요충지에 산성 구축 등 경계를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당과의 관계 개선에도 나서 견당사를 파견하여 관계 회복에 나서는 화전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백제에서 대거 유민을 받아들여 일본 각지에 정착시켰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에 관한 우호적 언급과 빈도가 높은 반면에 신라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가 다소 눈에 띠는 이유는 신라의 가야 정복과 백제 침공에 대한 일본 측의 불편한 감정이 녹아 있기 때문인 듯하다. 편찬 책임자 도네리 왕자가 일본서기 편찬을 지시한 덴무천황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천황가의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에 대한 인식도 일정 부분 반영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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