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베르크 아리아’로 시작한 3시간 여정
스타인웨이로 시대 초월한 ‘바흐 DNA’ 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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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시프의 내한 리사이틀 [마스트미디어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꾸준히 한국을 찾는 거장은 이번에도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곤 무대 위 덩그러니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첫 곡은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아리아 다 카포’. 내한 전 서면 인터뷰에서 “이번에도 바흐는 할 것”이라고 귀띔했던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시프의 장장 3시간의 음악 여정의 출발이었다.
모든 길은 바흐로 통한다. 안드라스 시프가 펼쳐놓는 건반 위의 지도엔 언제나 ‘바흐’라는 거대한 태양이 존재했다. 88개의 건반을 잇는 시프의 음악 유전자는 언제나 바흐라는 ‘성산(聖山)’을 향해 있다.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한국 관객과 만난 안드라스 시프의 리사이틀엔 어김없이 프로그램이 공개되지 않았다. 공연기획사 마스트미디어가 판매한 프로그램 북엔 그저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中’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연주자의 공연이 확정되고 통상 1년 전 프로그램을 공지하는 것과 달리 안드라스 시프의 공연은 관객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주를 만난다. 공연 전 프로그램을 ‘사전 학습’하는 클린이(클래식 어린이)들에겐 다소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쉬프는 그러나 “내일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1년 뒤에 무엇을 연주할지 미리 정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어떤 날 어떤 곡을 선택할지는 그날의 상태, 기분, 공연장의 음향, 그리고 악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공연의 프로그램은 시프에게 ‘하나의 작품’이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바흐라는 거대한 뿌리에서 뻗어 나온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찬란한 줄기’를 따라가며 바흐의 영향을 탐구했다. 그는 헤럴드경제에 “바흐가 후대 작곡가들에게 끼친 영향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시프에게 바흐는 ‘히말라야의 봉우리’와 같다. 그가 첫 곡으로 들려준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해 그는 “히말라야에 오르려면 그 전에 더 작은 산과 언덕을 오르는 경험이 필요하듯, 이 곡에 이르는 길은 긴 여정”이라고 했다. 그 길은 ‘감히’ 한 번에 도달할 이상도, 단숨에 도전할 목적지도 아니다. ‘골드베르크’로 향하기 위해선 그 전에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품집’에서 시작해 ‘평균율’, ‘클라비어’에 이르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쉬프는 말한다.
이번 공연에서의 첫 곡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시프의 음악 설계도와 같았다. 이 곡은 32마디의 베이스 라인을 기반으로 한 ‘우주의 씨앗’이다. 이날 이어진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로 향하는 여정은 결국 바흐적 근원에서 파생된 변주임을 첫 곡으로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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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시프의 내한 리사이틀 [마스트미디어 제공] |
고요한 사라방드 리듬과 함께 담백하고 맑게 내려앉는 음표들은 어수선했던 콘서트홀의 객석을 침묵하게 했다. 사장조(G Major)의 아리아가 평온한 빛을 드리운 것이다. 이 곡을 먼저 들려주면서 시프는 바흐적 골격을 관객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힌트를 줬다. 그러면서 다시 ‘바흐라는 근원’으로 돌아오는 ‘순환적 시간관’을 보여주고자 했다.
첫 곡 이후 마이크를 잡은 시프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 뒤에 ‘카프리치오 내림나장조, BWV 992’와 하이든 ‘변주곡 바단조’로 향했다. 성숙한 바흐에 이어 19세의 청년 바흐가 작곡한 이 곡에 대해 시프는 “모차르트처럼 반짝이는 재치가 돋보인다”고 했다.
영롱하고 맑은 타건은 이내 하이든의 변주곡으로 이어졌다. 바흐가 정립한 변주 형식을 고전적 우아함과 비극적 깊이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시프는 하이든의 음악적 뿌리를 추적하며 “바흐의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C. P. E. Bach)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음악학자들은 바흐의 엄격한 대위법이 아들인 C.P.E. 바흐 세대에서 ‘인간적인 감정’으로 변화, 이른바 ‘감정 과다 양식’이 고전주의의 기틀이 됐다고 봤다.
하이든 다음은 모차르트였다. 시프는 바흐의 ‘이탈리안 콘체르토’와 모차르트의 ‘론도 가단조’를 엮어 들려줬다. ‘이탈리안 콘체르토’는 바흐가 50세가 되던 때에 나왔지만, 생기 넘치는 청춘이 쓴 것처럼 화사하다. 이탈리아의 밝고 경쾌한 햇살이 넘실거리고, 피아노 한 대로 오케스트라적 색채를 담아냈다. 시프는 “바흐가 비발디를 오마주한 곡”이라고 설명했다. 비발디가 정립한 이탈리아 협주곡 양식을 바흐가 독주 악기(하프시코드)로 구현한 것이 바로 이 곡이다. 모차르트의 론도에선 구조 속에 스며든 바흐의 대위법적 흐름과 반음계적 선율을 녹여냈다.
1부의 마지막 곡은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라단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라단조 ‘템페스트’였다. 시프는 이 두 곡을 리사이틀 1부의 핵심 연결고리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조성의 한계를 실험한 ‘반음계적 환상곡’에 이어 바흐의 ‘환상곡’적 기법이 고전주의 소나타와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보여주는 선택이었다. 라단조(D minor)의 같은 조성으로 작곡된 두 곡의 비극적 연결고리도 쉬프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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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시프의 내한 리사이틀 [마스트미디어 제공] |
장장 1시간 30분 동안 쉼 없이 이어진 1부 이후엔 슈베르트로만 2부를 꾸몄다. 시프의 리사이틀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시프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분명하게 바흐의 영향을 받았고, 하이든은 C.P.E. 바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지만 슈베르트는 조금 다르다”며 “그는 대위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방랑자 환상곡’에서 보다시피 그의 푸가는 좋은 예시는 아니다. 슈베르트는 그것을 알고 생의 말년에는 대위법 수업을 받기도 했다”고 설명해 줬다.
시프는 슈베르트가 대위법 수업을 자처할 만큼 구조적 완결성에 목말라했음을 언급하면서도, 그 ‘결핍’이 빚어낸 순수한 선율이 ‘바흐적 영성’의 또 다른 변주라고 음악으로 설파했다. 그는 슈베르트를 바흐의 순수함을 가장 잘 계승한 작곡가로 본 것이다. 바흐의 음악이 ‘신을 향한 기도’라면, 슈베르트의 음악은 인간의 나약한 내면을 향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특히 슈베르트의 ‘세 개의 피아노 소품(D. 946)’ 사이에 다른 소품들을 배치한 구성이 흥미롭다. 마치 바흐의 ‘파르티타’나 ‘모음곡’처럼 여러 춤곡과 노래가 하나의 흐름을 만들도록 구성한 것이다. 그러니 바흐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목소리와 같은 대위법적 성부는 슈베르트의 노래하는 선율로 이어져 둘 사이의 큰 줄기를 만들었다. 과장되지 않은 감정을 실어 보내는 쉬프의 음악은 도리어 더 깊이 마음을 움직였다.
인터미션을 포함에 2시간 30분의 연주를 모두 마치고도 쉬프의 리사이틀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브람스의 ‘세 개의 간주곡 내림마장조’를 시작으로 쇼팽 마주르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16번 1악장, 쇼팽의 ‘야상곡 제5번 올림바장조’에 이르기까지 총 5곡으로 30분의 앙코르를 꾸몄다. 숏폼 시대의 현대인에게 3시간의 마라톤 공연을 공유하는 경험은 쉽사리 마주하기 힘든 체험이었다.
리사이틀은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 연주곡이 나올 때마다 옆좌석 지인과 “이게 ooo”이라고 대화를 나누는 일부 관객도 있었지만, 대부분 숨죽여 거장의 연주에 몰입한 이날의 관객 매너도 훌륭했다. 한 곡 한 곡이 끝나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고 침묵 역시 음악으로 받아들인 ‘안목 있는 청중’이 있었기에 시프의 건반은 더 자유로웠고 그의 음악은 살아있는 유기체로 존재했다.
흥미로운 점은 피아노의 선택이었다. ‘뵈젠도르퍼’를 고수하던 시프는 이날 서울 공연에서 스타인웨이 파브리니로 새로운 음색을 들려줬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한국 공연에서 쓰는 피아노다. 덕분에 이번 리사이틀에선 보다 현대적인 소리를 내는 스타인웨이로 연주하는 바흐와 시대를 초월한 바흐 DNA를 탐험할 수 있었다. 바흐의 음악이 어떤 환경에서도 작동하는 인류 공통의 문법이자 음악이라는 것이 시프가 주는 메시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