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피아프
142㎝·30~40㎏대의 국민가수 ‘작은 참새’
걸인·병자·홀몸·자식 잃은 母 삶까지 경험
노래에 기교 아닌 사연을…심금을 울리다
장밋빛 인생과 사랑의 찬가, 후회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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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세의 에디트 피아프 [Studio Harcourt, 위키미디어커먼스] |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이번 주말, 에디트 피아프의 음악으로 시작해보는 건 어떨지요.
처절히 노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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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세의 에디트 피아프 [Studio Harcourt, 위키미디어커먼스]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에디트 피아프는 작은 여인이었다.
키 142㎝, 몸무게 30~40㎏대를 오간 그녀는 예명처럼 ‘어린(작은) 참새’(라 몸 피아프·La Mome Piaf) 같은 가수였다. 그래도 피아프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외려 크고 깊었다. 왜소한 몸을 뚫고 나오는 노랫말은 추처럼 묵직하며, 때로는 피와 눈물처럼 처절했다. 좋은 가수는 음악에 감정을 싣는다. 귀가 즐거운 음악에는 박수가 나오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음악에는 사연이 따라온다. 피아프의 노래가 그랬다. 그녀는 남을 울릴 줄 알았다. 꿰뚫는 모음, 카랑카랑한 자음은 가슴 속 응어리를 녹아내리게 했다. 그녀가 전하는 감정은 연기라고 볼 수 없었다. 허스키한 음색, 비음 섞인 발성도 단순한 기교로 여길 수 없었다.
피아프는 걸인의 가난을 알았다.
병자의 통증, 사창가 여인의 음울함도 알고 있었다. 남편 잃은 아내, 자식을 떠나보낸 어미의 서글픔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왜? 모두 다 본인이 경험해봤기에. 언젠가 집시 점쟁이가 그녀 손금을 본다면, 어쩌다 그런 삶을 살아왔느냐며 먼저 울먹일 삶이었다. 끈질기게 장밋빛 인생을 꿈꾼 소녀. 끝내 또 한 번 사랑을 믿어보려고 한 인간이자, 꺾임 없이 “아니,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Non, je ne regrette rien)” 삶을 살고자 한 인생. 이것이 피아프의 솔직한 정체성이었다. 피아프의 가장 내밀한 예술 세계였다.
사창가에서 삶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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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세 시절 에디트 피아프 [Trisku, 위키미디어커먼스] |
피아프의 본명은 에디트 조반나 가시옹(Edith Giovanna Gassion).
그녀는 1915년 12월19일 새벽 5시께, 프랑스 파리 빈민가의 한 계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알퐁스 가시옹은 삼류 공연가였다. 어머니 아네타 조반나 마야르는 곡예사이자 인기 없는 가수였다.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산통을 느낀 곳은 흔한 골목길이었다. 곧장 자선병원으로 가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하얀 입김만 가쁘게 피어오르는 순간, 산파 역할을 한 건 순경과 행인이었다. 다만 출생증명서에 따르면 피아프가 빛을 본 곳은 테농 병원이었다. 서글픔, 여기에 한 스푼 낭만이 섞인 거리 일화는 훗날 피아프가 지어낸 서사라고 한다.
피아프는 쓸쓸하게 컸다.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여파로 바로 전장에 갔다. 어머니도 볼 한 번 맞대지 않은 채 삶의 전쟁터로 다시 나섰다. 피아프는 잠시 외할머니 품에 있었다. 그러다 친할머니 밑으로 가 이불을 다시 깔았다. 그녀는 사창가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은 일곱 개 방이 있는 2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다. 피아프는 거기서 “10여명의 가난한 소녀들(훗날 피아프의 회상)”과 뒤엉켜 살았다. 피아프는 앙상했다.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는 앞도 보지 못했다. 각막염과 영양 결핍 때문이었다. 다행히 눈병은 나았다. 그녀를 딱하게 본 몇몇 매춘부가 성녀 테레사의 성지를 돈 결과라는 설이 있다. 훗날 그녀는 이를 “기적적인 치유였다”고 주장했다.
열다섯 독립, 출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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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세의 에디트 피아프 [Studio Harcourt, 위키미디어커먼스] |
피아프는 거리 모퉁이에서 노래를 불렀다. 모르는 이들 앞에서, 밤낮으로 계속.
처음 부른 건 국가였다. 그러다 그 시절 유행가 ‘자, 내 마음이여’를 외우고, 얼마 안 가선 ‘지나가는 거룻배’도 익힐 수 있었다. 당시 나이는 열두 살에서 열네 살이었다. 그런 피아프 뒤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이런 식으로 돈벌이를 했다. 그런데, 피아프의 노래 실력은 나날이 좋아졌다. 아버지는 딸의 재롱을 팔아 동전이나 모으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잠재력이 심상치 않았다. 피아프의 목소리에는 발길을 붙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입천장과 혀끝에는 이미 서글픈 시와 소설이 맺혀 있었다. 미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음악은 그런 게 없어도 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피아프는 열다섯부터 독립했다.
열일곱에는 딸을 낳았다. 이름은 마르셀이었다. 루이 뒤퐁이라는 사내 사이에 둔 자식이었다. 피아프는 어머니의 역할을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이었다. 아기는 죽었다. 두 살 나이, 사인은 수막염이었다. 피아프는 그날 목에서 피가 나도록 흐느꼈다. 이 일을 잊지 않았다. 다시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며 거듭 울먹였다. “나는 부모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말과 함께.
유일한 재산은 낡은 서랍장
피아프는 물도 나오지 않는 여인숙 3층 방에서 살았다.
하루는 경찰의 호루라기, 또 하루는 불량배들의 끈적한 눈빛을 피해다니며 길 위에 가사를 수놓았다. 그러고도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하루 1~2끼의 밥값. 재산이라고 할 건 낡은 서랍장이 전부였다. 사무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살인사건에 휘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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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트 피아프와 샹송 친구들 [Studio Harcourt, 위키미디어커먼스] |
루이 루플레가 그렇게 더 깊어져만 가는 피아프를 봤다.
그녀가 막 스무 살이 된, 1935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피갈 거리 위, 피아프가 부르는 ‘참새처럼(Comme un moineau)’이라는 노래를 듣고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루플레는 북적이는 나이트클럽의 주인이었다. 루플레는 피아프를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사실상 발탁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쪽 세계’를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유행하는 무대 매너도 알려줬다. 작은 키, 단아한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검은색 드레스도 몇 벌 건넸다.
피아프는 얼마 안 가 생애 처음으로 환희를 누릴 수 있었다.
1년 뒤 데뷔 앨범을 내놓았는데, 그게 대박을 터트린 것이었다. 하지만 잠시였다. 루플레가 총을 맞고 죽었다. 엉성한 사망 사건이었다. 범인은 불량배였다. 피아프는 놈과 안면이 있었다. 모퉁이 가수 시절, 어쩔 수 없이 말을 섞어야 했던 상대였다. 피아프는 이 때문에 공범으로 몰렸다. 법원에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광장이 찍은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살인자!” 험담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녀는 절망했다. 모든 일을 관둘 생각도 했다.
사연 많은 여인의 길
재능있는 음악가 레이몽 아소가 피아프를 다시 빛 위로 건져 올렸다.
아소는 피아프의 인상을 바꿨다. 한층 생기있는 표정을 짓게 했다. 보다 더 애교있는 몸짓을 보이게끔 했다. 전달력을 높이는 발음법, 노래를 오래 부르고도 목이 덜 쉬는 호흡법도 다시 지도했다. 글 쓰는 기술, 음표를 달고 가사를 짓는 방식, 격정을 억누르고 부드럽게 대화하는 태도 등도 성심성의껏 알려줬다. 그런 한편 정중한 인사법, 세련된 식사 예절,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 손톱을 물어뜯지 않고 정돈하는 습관까지….
아소는 피아프를 사랑했을 것이다.
피아프는 그 사랑에 힘입어 들장미로 다시 피어올랐다. 피아프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똑소리 나는 디바의 앞면, 남몰래 울먹이는 사연 많은 여인의 뒷면을 새긴 채 다시 무대에 섰다. 수많은 작곡가가 그녀에게 곡을 주고 싶어했다. 대중은 그녀 목소리를 듣기 위해 새벽까지 무대 뒤편을 서성였다. 그 사이, 아소와 피아프 사이에는 교제가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피아프가 넋을 놓을 만큼 사랑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장밋빛 인생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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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 몽탕 [Nationaal Archief , CC0, 위키미디어커먼스] |
장미는 열정의 상징이다. 그윽한 관능, 요동치는 욕망의 표상이다. 장미는 가시가 있어 더 매혹적이다. 함부로 거머쥘 수 없기에 더 치명적이다. 사랑도 그렇다. 어떤 사랑은 위험이 뒤따를 때 사람을 더 미치게 한다. 흠뻑 취하는 사이 피를 쏟고 울음을 토할 때도 있으나, 이와 상관없이 그저 더 달려들게만 만든다.
피아프, 그리고 이브 몽탕 사이 사랑의 형태도 그랬다.
피아프는 1944년께 파리 물랭루주 공연장에서 몽탕과 마주했다. 그녀는 이 여섯 살 연하의 이탈리아계 가수에게 잠겨들었다. 피아프는 매일 밤 그를 되새기며 편지와 가사를 썼다. “괴로움과 슬픔, 그 모든 순간조차, 죽을 만큼 행복하고, 또 행복해요.” 그녀 생애 대표곡 중 하나,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 또한 그를 곱씹으며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피아프는 자기 무대 1부를 몽탕에게 줬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며 한껏 띄우기도 했다. 하지만 둘의 교제는 금방 끝났다. 두 사람 다 감정에 솔직했다. 그만큼 기복이 크고, 때로는 사랑하는 이상으로 서로를 미워했다. 뜨겁게 타오른 자리에 남은 건 어느덧 그을음뿐이었다.
얼마 후 피아프에게는 또 한 번 사랑이 찾아왔다. 이번 사랑은 더 강렬하고… 더 서글펐다.
사랑의 찬가를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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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세르당 [Studio Harcourt, 위키미디어커먼스] |
마르셀 세르당은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의 복싱 챔피언이었다.
세르당은 일용직 노동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해 정점까지 오른 사내였다. 피아프는 1947년 미국 투어 중 그와 만났다. 금방 말이 통했다. 말할수록 서사도 겹쳤다. 어쩌다 저녁 식사를 몇 번 하고, 어릴 적 이야기도 몇 차례 주고받았다. 또 한 번 종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둘은 천생연분 같았지만, 사회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당시 세르당은 유부남이었다. 자식도 있었다. 피아프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은 맹목적 헌신이었다. 상대를 다시 찾았다면, 그때부터는 처음처럼 또 한 번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의식이었다. “내 삶의 유일한 빛.” 피아프는 세르당을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런 사랑을 갈가리 찢어놓은 건 비행기 사고였다.
1949년 10월, 세르당은 비행기에 올랐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교통편은 먼저 경유지인 아조레스 제도의 산타마리아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재난은 높이를 낮춰가는 중 발생했다. 육중한 몸체가 밑도 끝도 없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끝내 바퀴가 닿은 곳은 활주로가 아닌 제멋대로 깎인 산이었다. 모든 게 화염에 휩싸였다. 탑승객 47명 전원이 사망했다. 물론 명단에는, 세르당도 올라가 있었다. 비극에 비극이 포개졌다.
생애 가장 처절한 고백
피아프는 소식을 듣자마자 거의 미쳐버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세르당에게 비행기를 권유한 건 피아프였다고도 한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다며, 뱃길 대신 하늘길을 말했다고 한다.
이 일 직후 피아프는 세상과 접촉을 끊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모습을 감췄다. 그사이 그녀는 세르당을 잊지 못해 심령술사를 만나기도 했다. 사고 다음 해인 1950년, 5월. 피아프는 노래 한 곡을 녹음한다. 제목은, 사랑의 찬가. “우리 위로 푸른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뒤집혀 버린다고 해도,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상관없어요. 나는 세상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아요.” 이것은 분명 세르당을 위한 찬가였다. 억누른 듯 담담한 목소리가 빚어내는 극한의 아름다움이었다. 당신을 위해선 돈도 훔치고, 친구를 버리고, 조국마저 등질 수 있다는 가장 처절한 고백이었다. 사랑과 죽음, 체념과 통증을 매단 이 곡은 가까운 미래, 프랑스를 대표하는 노래로도 칭해지게 된다.
사고·약물중독이 또 덮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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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세의 에디트 피아프 [Studio Harcourt, 위키미디어커먼스] |
피아프는 사랑을 사랑으로 잊지 못했다.
피아프는 1952년에 첫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가수 겸 배우 자크 필스였다. “외로움이 죽음보다 더 무서워요.” 세르당이 죽은 후부터 더 자주 습관처럼 올린 말. 그 외로움의 밑바닥까지 잠긴 끝에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피아프는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이 무렵, 피아프는 투어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팔과 갈비뼈가 부러졌다. 기적적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치료 중 술과 약물에 중독되고 말았다. 자기 발로 재활센터도 몇 차례나 찾았으나, 금단 증상을 견디는 건 쉽지 않았다. 피아프는 1956년 무렵에 필스와 이혼했다. 둘 다 지친 상태였다. 완전히 소진된 모습이었다. 이것은 시기의 문제일 뿐, 예고된 일이었다. 이제 피아프는 무대 위에서도 종종 쓰러졌다. 붕대를 감고, 진통 주사까지 맞고도 몸이 버티질 못했다. 피아프는 늙었다. 어느덧 사십 대이긴 했지만, 이는 나이 문제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또래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고된 삶과 여러 중독 탓이었다. 관절염과 위궤양, 몇 번이나 더 찾아온 사고와 후유증 때문이었다. 무대 계약도 줄줄이 끊겼다. 쏟아지던 공연 요청이 거의 1년간 멈춘 적도 있었다. 이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피아프의 가수 인생은 사실상 끝났음을. 그녀는 꿋꿋했다. 그럼에도 장밋빛 인생을 그렸고, 다시 한번 사랑의 찬가를 외쳤다. 그랬던 그녀 또한 삶의 배신에 삼켜져 으스러질 듯보였다.
마지막 운명의 곡을 만나다
뮤직홀 올랭피아는 자본난을 겪고 있었다.
분위기를 바꿀 한 방이 절실했다. 올랭피아 감독 브뤼노 코카트릭스는 휘청이는 피아프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이는 도박이자 승부수였다. 피아프는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노래를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 문장처럼, 이제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몸을 이끌고도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그 시기, 가수 겸 작곡가 샤를 뒤몽이 피아프의 집을 찾았다.
뒤몽은 피아프에게 “당신을 위한 작품”이라며 곡을 제안했다. 피아프는 곧 다가올 공연으로 바빴다. 그렇기에 경계부터 했다. 딱 한 번만 듣겠다며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뒤몽은 낮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어느덧 마지막 음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또 해줄 수 있어요?” 피아프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절반 정도를 불렀다. 언론인 장 놀리가 쓴 《에디트》에 따르면, 피아프는 직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환상적이네요! 이 노래도 곧 있을 제 공연에 넣겠어요.” 사실 곡 자체는 원래 다른 이를 위해 쓰인 것이었다. 콘셉트도 약간 달랐다. 하지만, 음악계를 들여다보면 종종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떤 곡은 선택받기에 앞서 스스로 가수를 찾아가 간택한다. 이는 음악 세계의 대표적인 기현상 중 하나다.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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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세의 에디트 피아프 [Studio Harcourt, 위키미디어커먼스] |
1960년, 12월께. 피아프가 올랭피아에서 부른 이 노래는 노래면서 삶의 서사 같았다. 그녀는 마지막 심지를 들어올려 가사를 붙였다. 전쟁을 앞둔 행진곡, 한 줌 잿가루가 되기 전 진혼곡 같기도 한 이 음악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피아프는 옛 가난, 지난 아픔, 지난했던 상실감과 외로움을 받아들였다. 모두 다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그것은 용기이자, 내던져진 세상에 대한 눈물겨운 용서였다.
“아니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요! 나는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아요. 이미 대가를 치렀고, 쓸어냈고, 잊어버렸죠. 나는 과거 따위 신경 쓰지 않아요. 나의 추억들과 함께 나는 불을 지폈어요. 나의 슬픔들, 나의 기쁨들, 이제 그것들은 더는 필요하지 않아요. 사랑들은 다 쓸어버렸고, 그 사랑들의 노래 또한 다 쓸어버렸어요. 영원히, 깨끗하게 치워버렸어요.”
이는 피아프가 뒤몽에게 소개받은 곡, ‘아니요,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였다. 피아프의 우아한 절규가 공연장에 울렸다. 피아프의 삶을 아는 사람들, 피아프보다 본인의 삶을 더 들여다본 된 사람들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복귀 무대는 대성공이었다. 공연은 수차례 연장됐다.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이어갔다.
마지막 선택도 후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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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트 피아프와 남편 테오 사라포, 1962 [Eric Koch for Anefo, CC0, 위키미디어커먼스] |
피아프는 두 번째 결혼도 했다.
상대는 그리스계 프랑스인 가수 테오 사라포. 피아프와는 밑으로 스물한 살 차이였다. 일부 사람들은 둘의 사랑을 좋게 보지 않았다. 어린 남자를 문 늙은 여우, 나이 든 여자의 후광을 노린 얍삽한 하이에나의 관계라는 뒷말도 따라붙었다.
피아프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번 결정 또한 후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좋은 관계를 다졌다. 피아프는 남편에게 영감을 심어줬다. 사라포는 병들고 지친 아내를 정성껏 보살폈다. 로맨스는 또 오래 가지 못했다. 둘을 헤어지게 한 건 영원한 죽음이었다. 부부가 되고 고작 1년 만이었다. 피아프는 1963년 초부터 간암에 따른 혼수상태에 빠졌다. 몇 달 사이 의식을 찾고, 재차 잃어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그해 10월10일에 영영 눈을 감았다. 향년 마흔일곱 살이었다. 시신은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결국에는 도착점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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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세의 에디트 피아프 [Eric Koch for Anefo, CC0, 위키미디어커먼스] |
피아프는 그 시절 최고의 대중 가수였다.
인간의 모든 삶을 노래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여정을 기리는 수만명이 장례 행렬에 함께 했다. 한 증언에 따르면 당시 기나긴 길로 인해 파리 교통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완전히 멈췄다고 한다. “이 지독한 삶. 당신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가도 함께 치러야 해요.” 이것은 피아프의 유언으로 남아 있는 문장이다.
사실 피아프의 삶을 딱히 장밋빛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의 찬가가 어울릴 만큼 달콤한 순간도 짧았다. 무엇이든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크고 작은 굴곡도 무척 많았다. 그래도, 그럼에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세상은 잔혹하지만, 그것이 삶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우리는 구불구불하게 걷지만, 결국에는 도착점에 닿을 수밖에 없다. 그사이 꽃과 빛, 예술과 아름다움도 마주할 수 있다. 그저 발걸음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Edith Piaf, My Life, Penguin Books
Carolyn Burke, No Regrets: The Life of Edith Piaf, A&C Black
Jean Noli, dith, Stoc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