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Q 162 ‘성실한 천재’의 사투…“암보는 결과일 뿐” [인터뷰]

지휘자 이승원 1년 7개월 만에 한국 무대
국립심포니와 첫 국내 연주
성실한 천재의 악보 공부법
“좋은 사람이 좋은 음악 만들어”

 

지휘자 이승원이 1년 7개월 만에 한국 관객과 만난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첫 국내 무대를 시작으로 오는 22~23일에는 세종문화회관의 ‘누구나 세종썸머페스티벌 ‘광화문에서 만나는 아리아’ 무대, 8월엔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에서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목프로덕션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음표가 빽빽한 총보 위로 알록달록한 색연필이 지휘봉처럼 종횡무진 춤을 춘다. 붉은 선은 선율의 유려한 흐름을 따라 치솟고, 파란 선은 브라스의 폭발 지점을 매섭게 가리켰다. 군데군데 숨죽여야 할 미시적인 음향들은 주황색 기호로 단단히 묶였다.

“여기서 브라스가 갑자기 열려야 해요. 그냥 ‘세게’가 아니라 이전까지 눌러온 에너지가 터지는 느낌이어야 하죠.”

금관의 균형, 악센트와 에너지의 방향성, 리듬의 ‘큐’ 사인이 지휘자의 기호로 적힌 총보는 ‘해부학 노트’처럼 세세했다. ‘소리의 밸런스’를 0.1데시벨 단위로 설계한 정밀한 ‘음향 지도’였다.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심포닉 댄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는 총보 위에 남긴 흔적들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음표 사이엔 지휘자의 집요한 계산과 상상, 수정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IQ 162’의 지휘자에겐 늘 ‘천재’라는 수사가 따라붙었지만, 그의 본질을 관통하는 진짜 단어는 ‘성실’이었다. 손때 묻은 악보 곳곳엔 오케스트라를 만나기 전 수십 번 음악을 상상하고 공부했던 지휘자의 묵묵한 사투가 묻어났다. 1년 7개월 만의 한국 공연을 앞두고 만난 이승원은 “이 악보를 한 달 넘게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2024년 말코 국제 지휘 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 클래식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그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무대에 낯선 프로그램을 들고 왔다. 찰스 아이브스 ‘대답 없는 질문’, 사무엘 바버 첼로 협주곡, 레너드 번스타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심포닉 댄스, 조지 거슈윈 ‘파리의 아메리카인’. 네 작품이 한 프로그램으로 엮인 것도, 그가 이 작품들을 지휘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휘자 이승원의 번스타인 ‘심포닉 댄스’ 악보/고승희 기자

 

위험을 즐기는 ‘모험가’

“굉장히 큰 모험이긴 하죠.”

클래식 음악계는 소위 ‘2B 법칙’이 있다. 베토벤, 브람스와 같은 ‘슈퍼스타’ 작곡가의 작품이 하나는 들어가야 흥행(티켓 판매)도 담보한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입장에서도 인기 레퍼토리야말로 ‘안전한 선택’인데, 이번엔 완전히 달랐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지휘자 이승원의 ‘오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원했고, 이승원은 미국 신시내티 심포니에서 갈고닦은 음악성으로 그 기대에 기꺼이 부응했다.

그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더 많이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번 시즌(2025~26) 연주한 35개 프로그램이 모두 처음 해보는 작품이었다”고 했다.

사실 이승원의 인생은 늘 ‘리스크의 연속’이었다. 그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모험으로 향했다. 노부스 콰르텟의 멤버로 비올리스트의 길을 가던 그는 갑작스럽게 지휘자로 방향을 틀었다.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비올라 종신 교수라는 ‘보장된 미래’도 내려놨다. 누구도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심지어 말코 콩쿠르 1라운드 당시 하이든 교향곡을 하프시코드가 포함된 바로크 스타일로 연주한 것도 엄청난 도전이었다

이승원은 “제 인생은 항상 모험의 연속이었다.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쌓여 예술적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그때 비하면 레퍼토리의 선택은 위험한 모험도 아니다”라며 웃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공연에서 선택한 프로그램도 이승원 자체가 녹아들었다. 그는 “사실 이 곡들은 전공자들도 평생 한 번 연주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젊은 지휘자라면, 지금이 아니면 언제 도전하겠냐는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해외 오케스트라와 프로그램을 상의할 때도 그는 ‘편식’하지 않는다. 그는 “오케스트라 사무국에서 ‘이걸 꼭 넣고 싶다’고 물어볼 때, 머뭇거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지금은 뭐든지 다 잘 해내야 하는 시기”라고 했다.

선택의 폭을 넓히고 더 많은 레퍼토리를 쌓기 위한 과정만은 아니다. 이러한 행보는 그의 음악 철학과 연결된다. 작곡가 출신인 아내의 조언이기도 하다.

“모든 작곡가의 곡은 다 존재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 매력을 끄집어내 관객에게 알려야 하는 게 지휘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지휘자인 제가 먼저 어떤 곡은 싫다고 빼버리면 관객들은 그 곡을 듣고 접할 기회가 없어지잖아요.”

지휘자 이승원이 1년 7개월 만에 한국 관객과 만난다. [목 프로덕션 제공]

 

검은 양복과 빨간 재킷, ‘아메리칸 사운드’를 이식하다

콩쿠르에서 ‘우승 타이틀’을 안은 이후 이승원은 전 세계를 종횡무진했다. 유럽과 미국, 일본 오케스트라를 두루 만났고 특히 미국 신시내티 심포니에서의 활동을 통해 ‘미국 오케스트라의 감각’을 몸으로 익혔다.

“유럽 오케스트라는 울림과 공간감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교회 같은 공간에서 몇백 년 동안 클래식 전통이 이어졌으니까요. 그런데 미국은 달라요. 사운드가 훨씬 더 치밀하고 기민하죠.”

미국 오케스트라가 자신들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구현한 것은 이들의 오랜 문화 덕이다. 글로벌 대중문화를 호령하며 축적된 비옥한 토양은 클래식의 문법과 결합해 미국만의 ‘하이브리드 문화’를 잉태했다. 그는 “미국 오케스트라들은 팝스 연주를 중요하게 여긴다. 같은 연주자들이 클래식에선 검은 양복을 입고, 팝스에선 빨간 재킷을 입고 완전히 다른 사운드를 만들어낸다”고 귀띔했다.

이승원이 이번 무대에서 세운 목표는 “아메리칸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를 한국 무대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브라스와 타악기가 강하게 밀고 들어오고, 재즈와 팝의 감각이 클래식 안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드는 소리가 바로 미국의 정통 사운드”라고 이승원은 귀띔한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이런 연주를 하기에 강점을 가진 악단이다. 국립심포니와 한국에서 정기 공연 연주를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나, 이미 해외 투어를 통해 호흡을 맞췄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에 따르면 이승원은 단원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지휘자다.

이승원은 “국립심포니는 놀랍도록 유연한 오케스트라”라며 “발레도 하고 오페라도 하고 여러 장르를 많이 경험한 악단이라 지휘자의 요구에 따라 사운드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The Unanswered Question)’이다. “이 곡은 공연장에서 들어야 진짜 의미가 생긴다”고 이승원은 강조한다.

지휘자 이승원은 ‘모험’을 즐기는 도전의 아이콘이다. 노부스콰르텟의 비올리스트에서 지휘로 전향,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비올라 종신 교수라는 ‘보장된 미래’도 내려놨다. [목프로덕션 제공]

흥미로운 건 트럼펫의 위치다. 질문을 던지는 악기는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객석 위, 발코니 어딘가에서 불쑥 등장한다. 무대 중앙엔 현악기가 긴 호흡의 배경을 맡고, 무대 구석의 목관 네 명은 끝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점점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대답을 쏟아낸다. “거의 동문서답 같아요.”

이승원은 악보에 직접 적어놓은 숫자를 짚었다. 질문은 총 일곱 번 반복된다. 그러나 목관의 응답은 안단테에서 알레그로 몰토까지 점점 속도가 붙는다. “나중엔 거의 화를 내는 것처럼 들린다”고 한다.

이 곡은 트럼펫과 4대의 목관이 주고받는 적절한 타이밍의 대화가 핵심처럼 보이나, 이승원은 전혀 다른 방향을 택했다. “일부러 트럼펫에게 명확한 사인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확한 지시가 오히려 신비감을 깨뜨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어디선가 질문이 스며드는 느낌이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원하는 건 단순한 정확성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심리적 거리감이었다. 그는 “목관 역시 실내악처럼 움직일 것”이라고 했다.

번스타인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심포닉 댄스’와 거슈윈 ‘파리의 아메리카인’은 비교적 대중적인 작품이다. 그는 “번스타인은 타악기들의 쾌감이 느껴지는 음악이라 열광의 도가니 같은 분위기가 있고, 거슈윈의 파리의 아메리카인도 재즈의 요소와 클래식이 섞여서 새로운 장르 같은 작품”이라며 “클래식을 처음 접한 분들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곡”이라는 생각이다.

독일, 미국, 북유럽…달라진 지휘자의 귀

독일에서 지휘를 공부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휘의 세계에 발을 들인 지 어느덧 13년이다. 긴 시간 악보라는 텍스트에 지독하게 천착하며 쌓아온 통찰은 그의 음악에 깊은 ‘설득력’을 더했다. 유수의 악단들을 만나며 단련한 지휘자로의 기초 체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세계 무대를 돌며 그는 오케스트라마다 전혀 다른 ‘소리의 문법’이 존재한다는 걸 배웠다.

미국 오케스트라는 ‘효율과 민첩함’의 정점이다. 자본과 리허설 시간이 직결되는 환경 탓에 단원들은 경이로운 준비성과 순발력을 보여준다. 북유럽 오케스트라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북유럽 사람들의 순수한 심성이 소리에 그대로 투영된다”며 “사람과 소리가 일치하는 경험은 지휘자로서 행복한 순간 중 하나”라고 했다.

지휘자 이승원이 1년 7개월 만에 한국 관객과 만난다. [목 프로덕션 제공]

독일의 악단은 오랜 전통 위에서 ‘치열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거대한 공론장이다. 단원들은 지휘자의 해석에 건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집요하게 논리를 검증해 나간다. 지휘자로서 단순한 제스처를 넘어 완벽한 ‘이성적 무장’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승원은 “이런 이유로 누가 어떤 질문을 던져도 1초 만에 대답할 수 있도록 곡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모든 곡을 암보로 무대에 오르는 지휘자이나 “암보는 결과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암보가 목적이 아닌, 그 이전에 오래도록 분석해 해체와 재조합을 반복하는 긴 시간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외워진다”는 것이다.

그는 1년에 25주간 집을 비운다. 이번 시즌엔 23개 오케스트라와 만났다. 연주 여행을 다닐 땐 보통 20~30개의 악보로 트렁크를 채운다. 오페라 갈라 지휘(22~23일, 세종문화회관 ‘광화문에서 만나는 아리아’)가 있는 이달엔 무려 50권으로 늘었다.

그는 “지휘자는 비행기 안에서도 호텔에서도 공연장 대기실에서도 틈날 때마다 스코어를 펼친다”며 웃었다. 무대 위의 1~2시간으로 관객은 지휘자를 평가하나, 그 시간을 위해 이승원은 악보 수백 페이지의 시간을 산다.

각기 다른 문화권마다 다양한 ‘소리의 메커니즘’을 경험한 그는 “악단에 맞추는 유연함과 자신의 색깔을 지키는 소신 사이의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지휘자’는 ‘잘 듣는 사람’이다. 이승원은 “지휘는 미래의 소리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조금 전에 난 소리를 듣고 즉각 반응해야 하는 작업”이라며 “소리를 이끄는 것만큼이나 단원들이 내는 소리에 경청하는 것이 어렵다”고 강조한다.

“결국 좋은 음악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와요. 지휘자는 다른 연주자와 달리 악기 없이 소리를 내기에 자신의 태도와 성격, 인간성이 모두 음악 안에 담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많이 살아봐야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죠. 단지 착한 사람이기보다 관계를 맺을 때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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