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되기 이전의 원초적 ‘진실’…이근민 개인전

PKM 갤러리, ‘장면이 되기 전’ 개최
대형 신작 등 23점 국내 최초 공개


이근민 ‘Organic Plate’. [이근민, PKM 갤러리]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해부도를 연상케 하는 인체의 형상이 액체처럼 녹아내린다.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어우러진 화면과 부드러운 곡선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관람객을 원시의 세계로 데려간다.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이근민 작가의 개인전 ‘장면이 되기 전(Before It Becomes a Scene)’이 10일부터 7월 25일까지 PKM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근민의 PKM 갤러리 첫 개인전이자, 그가 2023년부터 제작해 온 미발표 작업들을 집약적으로 선보이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는 약 3m 높이의 대형 회화와 드로잉 연작 등 23점의 신작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이근민은 25년 전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병명을 부여받고 입원 생활을 하던 당시 진단의 권력과 환각을 경험했다. 그는 문명 사회가 효율성을 위해 규정한 질병 코드가 인간 본연의 모양을 재단하고 분류하는 방식에서 폭력을 느꼈다. 동시에 이름 없는 존재들, 예컨대 파편화된 인체나 생물체였던 무언가, 날것, 상처 등이 출몰하는 환각을 봤다. 작가는 이러한 고통의 경험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아 사회 시스템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해 온 존재들을 화면 위로 소환한다.

이번 전시에서 ‘장면’은 일련의 의도나 설정이 개입된 상황을 뜻한다. 작가는 설정되기 이전의 상태, 한 꺼풀 걷힌 인간의 진풍경을 드러낸다. ‘Organic Plate’, ‘Connected Body’, ‘Psychiatrist’s Head’ 등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그가 환각 속에서 목격한 해체되고 흩어진 신체 이미지들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작가는 이를 단순히 1차원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감각을 동원해 정교한 연속체로 종합해 낸다. 화면 위의 폭발적 에너지는 작가의 진실한 내면 풍경이자, 자신을 구속하던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내포한다.

이근민의 작품에 등장하는 근육과 장기, 혈흔의 형상은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나와 너,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붉고 따뜻한 색조는 피나 살을 탐닉하는 작가의 본능인 동시에, 인간과 생명을 은유한다.

밑그림이나 계획 없이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자동기술법으로 완성된 드로잉 연작 ‘Refining Hallucinations’는 사회에서 밀려난 원시적이고 불온한 생명체들을 선으로 둥글게 감싸며 자유를 전한다.

이근민은 200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2009년 서울 JK 스페이스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후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스웨덴 말뫼 등에서 20여 차례의 개인전 및 단체전을 열었다. 2016년에는 뉴욕 파이오니어 웍스 레지던시에 참여했으며, 2022년 스페이스K에서 개최한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를 통해 동시대 미술 신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한국의 스페이스K, 박서보재단과 스페인의 콜렉시온 솔로 등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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