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제작비로 14편을…허리띠 졸라맨 발레축제가 ‘기적’인 이유?

21일까지 대한민국발레축제 진행
트렌드 발신지이자 상생·협업의 장
공연계 아킬레스건 해소·불균형 손질
“한편 제작비로 10여편 올리는 기적”


대한민국발레축제 창작 신작 ‘발레 아리랑’ [대한민국발레축제x무토, 김재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좌절과 연대, 저항은 한국 춤과 클래식 발레의 접점에서 새로운 몸의 언어를 찾았고(‘발레 아리랑’), 거친 폭풍우를 뚫고 칼날 같은 점프와 회전을 돌며 모험(‘해적’)을 떠났다. 전통 설화 속 도깨비는 힙합, 불교 음악 위에서 자유롭게 춤췄고(‘도깨비 잔치’), 너른 야구장 위 선수들의 ‘피 땀 눈물’(‘낫아웃’)은 무대 위에 녹아들었다.

‘한국형 고전’부터 신진 안무가의 실험작까지, 각기 다른 14개 작품이 저마다 ‘오늘의 발레’를 그려갔다. 올해로 16회를 맞은 대한민국발레축제는 고전의 문법 위에서 우리만의 발레를 진단하고, 박제된 관습을 과감히 해체해 새로운 발레를 실험하는 거대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달 1일부터 50여일간 이어진 발레축제는 명실상부 무용계의 최대 축제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정 사업으로 출범해 2019년 민간 주도 체제로 전환된 이후, 지난해부터 ‘스타 발레리나’ 김주원을 예술감독으로 위촉해 한국 발레 생태계의 선순환을 주도하는 플랫폼으로 안착했다. 올해의 키워드는 ‘에코; 공명(Echo; 共鳴)’이다.

대한민국발레축제 창작 신작 ‘발레 아리랑’ [대한민국발레축제x무토, 김재우 제공]


발레 애호가와 업계의 관심이 뜨겁다. 대한민국발레축제에 따르면, 이날 기준으로 오페라극장, CJ토월, 자유소극장, 세종M시어터 등에서 열린 전체 프로그램의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은 85.75%에 달한다.

올해 축제 지원금은 3억9200만 원. 축제에 참석한 단체들은 “대형 전막 작품 한 편을 올릴 예산으로 10여 개 작품을 소화하는 기적 같은 축제”라며 “없는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올해 축제는 한국 발레의 현주소를 집약한 장이었다. 국공립 단체와 민간, 서울과 지역, 기성 레퍼토리와 신진 창작이 한 무대에서 공존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 서울시발레단의 신작 ‘인 더 밤부 포레스트’, 광주시립발레단의 ‘해적’, 서울발레시어터와 와이즈발레단의 창작 레퍼토리, 자유소극장 공모작들까지 한국 발레의 스펙트럼이 집결했다.

발레축제를 관통하는 올해의 키워드는 ‘플랫폼’이다. 김주원 예술감독은 이 축제에 대해 “발레계의 현시점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며 “어떤 안무가들이 새로운 안무를 시작하는지, 어떤 안무가들이 성장하고 있는지, 발레단들이 현재 어떤 작품을 창작하고 어떤 클래식 작품이 올라가는지 볼 수 있는 장으로 기능하도록 축제의 비전을 세웠다”고 말했다.

발레 ‘해적’ [광주시립발레단, BAKi 제공]


상생의 장…지역에서 서울로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한 광주시립발레단의 ‘해적’은 ‘지역 발레단’의 저력을 보여준 올해 축제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버전을 2막으로 압축해 역동성을 살린 이 작품은 한국 공연계 고질적 문제인 ‘서울-지역 간 불균형’을 돌파하는 상생의 메커니즘을 증명했다.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화하는 현실에서 지역 단체의 중앙 진출을 견인하는 든든한 가교가 된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광주시립발레단이 지역에서 1800석 규모 대극장에 올리며 전석 매진 사례를 기록한 인기작이다. 서울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데, 발레축제의 초청으로 상경하게 됐다. 다만 넉넉지 않은 예산으로 자체 비용까지 충당해 서울로 향했다.

조가영 광주시립발레단 단장은 “올해로 3년 연속 초청을 받았는데, 광주시립발레단을 알리기 위해 축제 측의 지원금 외에도 발레단의 예산을 더해 서울 공연을 꾸리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시립발레단은 1박 2일 일정으로 상경해 강행군을 이어갔다. 하루 두 차례 공연을 이어가는 와중에, 공연 전날엔 발레 클래스와 두 차례 리허설도 진행했다.

세비야의 이발사 [춘천발레단 제공]


조 단장은 “단원들에게 미안한 일정이었지만 서울 무대에서 우리의 기량을 보여준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며 “축제 초청 덕분에 자체 서울 공연 대비 예산을 대폭 절감했고, 대중적 인지도가 쌓이면서 서울 출신의 우수한 인재 영입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지역 발레단이 서울 공연을 올리기 위해선 대극장 기준 2~3억 원의 비용이 든다. 조 단장은 “서울에서 공연을 올리며 발레단 브랜드를 알리게 돼, 광주에서 무대를 올릴 때도 서울에서 내려온 무용계 인사와 관객들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지역 민간 단체인 춘천발레단의 ‘세비야의 이발사’ 역시 플라멩코 안무를 더한 파격적인 연출로 서울 관객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발레축제는 다음 달 4일 춘천으로 향해 ‘대한민국발레축제 in 춘천 – 스페셜 발레 갈라’를 연다. 이 공연 역시 매진을 앞두고 있다. 무용계 관계자는 “발레축제가 단순한 공연 교환을 넘어 생태계의 유기적 연결망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울발레시어터 ‘피에스타’ [서울발레시어트 제공]


민간단체 창작 무대 감각적 ‘매칭’


한국 발레계는 지금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겪고 있다. 국공립과 민간 발레단의 예산, 팬덤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김길용 와이즈발레단 단장은 “컨템포러리 발레, 창작 발레는 한국에서 티켓 파워가 없다. 민간 발레단은 열정으로 안무하고 무대에 올리나 재공연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최진수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역시 “코로나19 이후 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 기성 클래식만 찾는 극장 환경 때문에 창작 회차를 늘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씁쓸해했다.

발레축제에서 두 민간 발레단은 더블빌로 한 무대에 올랐다. 서울발레시어터는 ‘피에스타’, 와이즈발레단은 ‘프리다’였는데, 둘 다 김유미 안무가의 작품이다. 축제 측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매치였다.

와이즈발레단 ‘프리다’ [와이즈발레단, 김선태 제공]


두 단체가 동일 안무가에게 작품을 의뢰한 것은 창작 발레 생태계의 취약성과 민간 발레계의 탄탄한 창작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지만 민간 단체가 신작 한 편을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종 공모에서 신작 제작을 위한 지원금은 많아 봤자 1억여 원. 업계에선 “중소극장 작품도 신작 한 편 제작에 1~2억은 턱없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그러니 민간 발레단은 공모에 뽑혀 제작비를 지원받아도 자체 예산을 두 배 이상 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렇게 만든 신작을 다시 선보일 무대가 없다는 것이다. 발레축제는 그 자리를 만들었다.

최진수 단장은 “민간 단체는 대체로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의 공모에 매달리는데 늘 신작 중심 공모이다 보니 해마다 신작을 개발해도 무대에 다시 올릴 기회를 갖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며 “극장에서 불러주지 않거나, 축제 초청이 아니면 재연이 힘든데, 이번 기회에 창작 발레 공연을 다시 선보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함프로젝트 ‘낫아웃’ [아함아트프로젝트. 김진아 제공]


발레계의 스타트업…자유소극장이 키운 안무가들


보통의 공연 축제는 막바지로 향할수록 기세가 꺾이나, 발레축제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펼쳐진 공모작 6편(‘낫아웃’, ‘휴먼’, ‘도깨비 잔치’ 등)이 젊은 에너지가 들끓는 실험실이었던 만큼 관객들의 반응도 뜨겁게 이어지고 있어서다.

올해 심사를 통과한 6인의 창작 발레는 토슈즈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파격적인 동시대적 미학을 주입했다. 함도윤은 야구 규칙을 통해 예술가의 생존을 다뤘고, 신현지는 AI(인공지능) 시대 인간 몸의 본질을 짚었다. 박경희는 ‘도깨비잔치’를 통해 한국적 상상력을 발레 언어로 번역했다.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 단장,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을 필두로 한국 발레계를 이끈 대선배들이 직접 엄선한 6개 작품이다.

발레축제의 공모 시스템은 안무의 기회 자체가 극히 제한된 발레 장르에서 신인 안무가들이 ‘발레의 정체성’이나 토슈즈와 클래식 기법 등의 언어를 지키면서도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실험할 수 있는 유일한 인큐베이터다.

김주원 감독은 “16년간 이어진 소극장 공모는 기성 안무가들의 핵심 성장판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자유소극장 공모를 통해 이루다·최수진·유회웅·윤전일과 같은 스타 안무가가 나왔다. 저력을 확인한 소극장 발레는 내년 축제에선 보다 확장된 기획으로 관객과 만난다. 공모 시스템을 유지하되, 30분짜리 작품을 1시간 전막으로 확장해 중극장 무대에서 올릴 수 있는 기획도 구상 중이다.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선보인 정구호의 신작 발레 ‘테일 오브 테일즈’ [대한민국발레축제, 양동민 제공]


저예산으로 만든 두 편의 신작 ‘대담한 도전’


예산의 한계를 돌파한 ‘대담한 도전’은 두 편의 창작발레에서 나왔다. 정구호 연출가가 올린 ‘테일 오브 테일즈’와 최수진·이루다 안무가, 무토 박훈규가 손잡고 아리랑 선율 하나 없이 아리랑의 정서를 구현한 ‘발레아리랑’이다. 시장의 물리적 단가를 고려할 때, 두 편의 대형 전막 기획공연을 신규 제작하고 다수의 공모작을 발굴한 것은 축제 측의 집요한 기획력이 짜낸 ‘예술적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년 만에 복귀한 정구호 연출의 ‘테일 오브 테일즈’는 미니멀리즘 튀튀와 조명 연출만으로 고비용 구조를 돌파하며 클래식의 여주인공들을 해방시켰다. 아리랑 선율 없이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거문고의 연대를 그린 ‘발레아리랑’은 예술가들의 헌신으로 물리적 한계를 극복한 ‘예술적 기적’이었다.

트렌드의 발신지이자, 상생과 발굴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발레축제는 적은 예산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며 ‘한국 발레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발레축제의 진짜 성취는 흥행작 한 편이 아니다. 지역과 서울을 잇고, 민간과 국공립을 연결하며, 새로운 안무가를 발굴하는 생태계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김주원 감독은 “이 축제를 정말 세상을 잇는 플랫폼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임기 동안인 3개년의 계획을 세웠다”며 “정통성을 지키며 저변을 확대하고 영역을 넓히는 시도와 도전으로 새로움을 시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내년 발레축제에선 타 장르 페스티벌과의 협업도 기획 중이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예술과 예술을 접속하는 실험이다.

다만 축제는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나 이를 떠받치는 구조가 취약하다는 점은 축제의 약점이다. 특히 한 편의 전막 발레 제작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예산으로 14편을 올리는 시스템은 이 축제의 구조적 ‘유리 천장’과 다름 아니다.

김 감독은 “늘 축제가 개막작을 제작할 수 없고, 안무가에게 충분한 시간과 무대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 지역과 민간 단체에 넉넉한 예산을 지원하지 못해 아쉽고 한계를 느낀다”고 했다. 한 발레계 관계자는 “지역·민간·신진을 잇는 독보적인 생태계 허브가 된 대한민국발레축제가 예술가들의 희생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를 지속가능한 미래로 바꿀 정책적 마중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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