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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 참가한 참수리 357호. [대한민국 해군] |
[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 제2연평해전 승전 24주년을 맞은 29일 해군이 고(故) 박동혁 병장을 응급수술하며 돌본 군의관을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전했다.
해군은 이날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린 ‘그날 군의관의 기억, 故 박동혁 의무병장을 마주했던 시간’이란 제목의 콘텐츠를 통해 2002년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이었던 이봉기 강원대 심장내과 교수를 인터뷰했다.
이봉기 교수는 제2연평해전 당시 상황에 대해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월드컵 막바지였다. 한국과 터키 3·4위전이 있을 예정이었고 10시께 모여서 TV를 보고 있었다”며 “갑자기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서해 바다 관련 보도가 나오면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국군수도병원 원내 방송에서 군의관들 퇴근하지 말고 모두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서해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상황을 파악하고 긴장하며 각자 업무에 들어갔다”고 했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정에 기습공격을 가해 발발했다.
참수리 357호정 장병들은 적의 기습공격에도 즉각적인 대응으로 북한 경비정을 제압했지만, 이 과정에서 고속정장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다쳤다.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병장은 중상을 입고 83일 만인 그해 9월 20일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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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박동혁 병장. [국가보훈부 블로그] |
박동혁 병장의 첫 인상에 대해 그는 “의식은 없는 상태였지만 굉장히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며 “가슴이 매우 아팠다. 이렇게 젊고 건장한 청년이 왜 이 모습으로 누워있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했다.
병원에 이송된 고 박 병장의 상태는 심각했다. 온몸 여기저기 파편이 박혔고 그 무게만 3㎏에 달했다.
이 교수는 “외부에 드러난 상처들이 많았고 전산화단층촬영(CT) 결과를 보면 파편이 다양한 곳에 박혀있었고 장도 다치고 방광도 다치고 척추 근처에도 파편이 박힌 것도 확인이 됐었다”며 “제일 신경 쓰였던 것은 왼쪽 다리가 대퇴동맥을 크게 다쳐 피가 잘 안 통하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다리에 혈관을 이어붙이는 수술을 급하게 해 놨었고 굉장히 다친 데가 많고 위중한 환자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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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부 블로그] |
고 박동혁 병장은 전투 간 쓰러지는 전우들을 보며 자신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다니다 적의 총탄을 맞았다.
이 교수는 “전투시 가장 기본은 음폐와 엄폐다. 박 병장은 의무병이니까 여기저기 전우들이 쓰러지니 그걸 보살피겠다고 은·엄폐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뛰어다니면서 전우들을 돌보려고 했던 것”이라며 “총알에 눈이 있나. 총알과 파편에 여기저기 맞아서 크게 다쳤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는 “제가 총을 들고 싸우고 있다면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기고 전투를 했을 것”이라며 “총알과 파편이 빗발치면 머리를 내밀기도 어려울 거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하지만 만약 제가 의무병이라면 옆에서 전우가 총을 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고 있는데 가만히 숨어 있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러니 본능적으로 뛰쳐 나갔을 것 같다. 군인 정신이 투철한 훌륭한 군인일수록 더욱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걸 마다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우들을 살리기 위해서 뛰어다녔고 그렇게 해서 실제로 많은 전우들을 구해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희생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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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해군] |
박 병장의 영웅적인 헌신과 위급했던 상황은 군의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면서 ‘꼭 살려야 한다’는 의지를 모으게 만들었다.
이 교수는 “군위관들도 박동혁 병장의 스토리를 당연히 공유하게 된다. 틈만 나면 이런저런 얘기할 때 박 병장의 스토리는 화제가 되었었고 다들 울컥했다”며 “‘얘는 우리가 뭐 밤을 새서라도 살려내야 된다’ 이런 생각들을 암묵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상황이면은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고 실제로 그게 많이 힘이 됐다”고 덧붙였다.
군의관들은 생에 대한 의지,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던 박 병장으로부터 힘을 얻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 같았으면 그 상황에서는 벌써 명을 달리했을 것”이라며 “박 병장은 워낙 건장한 청년이었고 ‘어떻게 이렇게 회복이 되냐’ 싶을 정도로 굉장히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줬다”고 돌이켰다.
그는 “같이 치료에 임했던 저희 군의관들에게도 굉장히 힘이 되고 기쁨이 됐었다”며 “의식이 없던 그 친구가 의식을 찾게 되고 회복이 됐을 때는 정말 기뻤고 보람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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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승전 24주년 기념행사’에서 참전장병들이 전사자 조각상에 경례하고 있다. [연합] |
박 병장은 빠른 회복세를 보였지만 이내 세균 감염으로 상태가 계속 나빠졌다.
이 교수는 “3주 만에 중환자실 생활을 접고 일반 병실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정말 기뻤다”며 “투병, 회복 과정 중 딸이 태어났고 이런 열정을 다해 박동혁 병장이 회복과 함께 일어나니 제 삶에서 정말 기뻤던 시기였다”고 소회했다.
다시 중환자실로 가야했던 상황에 대해선 “뇌에 세균 감염이 생기는 굉장히 안 좋은 상황이 발생을 했다”며 “항생제를 많이 쓰고 있었는데 그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가진 아주 강력한 균주에 의한 감염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민간에서 가장 최신의 항생제라고 나왔던 것들도 들여다가 사용을 했는데도 계속 나빠졌고 다시 중환자실로 내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했다”며 “결국 9월 20일 운명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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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블로그] |
이 교수는 “젊은 사람이 명을 달리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만큼 안타까운게 없다”며 “더구나 박동욱 병장처럼 너무나 영웅적이고 훌륭하고 군의관끼리도 서로 감동하고 스토리를 공유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나니 저뿐만 아니라 그 치료에 같이 참여했던 모든 군위관들이 굉장히 낙담하고 같이 슬픔을 나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할 일, 해야 할 일이 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며 “전우들을 살리려고 뛰어다니면서 실제로 많은 전우들을 살려냈다. 그게 자신의 할 일이었다. 그게 군인정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군인정신을 ‘최고봉에 있는 고귀한 정신’이라고 평가한 이 교수는 “목숨을 던져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며 “박 병장은 자신이 할 일을 했고, 그 이름을 고귀하게 기억해 주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민 여러분들도 우리가 이렇게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뒤에서 묵묵하게 또 위험하게 자신의 삶의 일부를 바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