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박용우 “작품 통해 억울한 감정 풀고 싶었다”(인터뷰)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한국 최고의 조각가 ‘준구’(박용우 분)는 불치병으로 손이 굳어가자 절망에 빠진다. 아내 ‘정숙’(김서형 분)은 남편의 생의 의지를 되살리기 위해 그에게 영감을 줄 만한 누드 모델을 찾아 나선다. 이윽고 두 아이와 함께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민경(이유영 분)을 발견한다. 준구는 헌신적인 아내 정숙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민경을 통해, ‘삶 자체가 예술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영화 ‘봄’(감독 조근현ㆍ제작 스튜디오 후크)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믿었던 남자가, “예술보다 삶”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세상에 대한 억울함으로 침잠하던 박용우에게 마침 ‘봄’의 시나리오가 쥐어졌다. 그는 이 우연과 행운에 “우주의 기운이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예술적 성취에 골몰했던 준구가 마침내 삶의 아름다움을 깨우친 것처럼, 박용우 역시 어둠을 털어내고 따스한 기운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영화 ‘봄’은 인생의 ‘봄’과도 같은 작품임에 틀림 없었다.

# “이런 손으로 뭘 할 수 있겠소” (다시 작품 활동을 권하는 정숙에게 준구가 건넨 체념 어린 대답)

‘봄’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당시, 박용우는 많이 지쳐 있었다. 연기자로서 일도 그렇고, 사적인 부분에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생각보다 성과가 없는 것 같고… 그런 생각들이 봇물 터지 듯 들었죠. 그 때 받아본 시나리오가 ‘봄’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심심할 수도 있고 뻔할 수도 있는데 몰입이 되더라고요. 시나리오를 덮었을 때는 내 억울한 감정이 이 작품을 하면서 해소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을 제대로 그려본 적 없던 그가 최고의 조각가 역을 맡았다. 미술을 전공한 조근현 감독의 이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할에 대한 부담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또한 ‘미술이든 음악이든 연기든 결국엔 한 줄기로 만나는 것이고, 그걸 박용우라는 연기자는 연기로 표현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준구가 선 긋는 장면은 제가 직접한 건데 감독님이 칭찬해주셨어요. 영화에서 간단한 스케치도 했는데 감독님이 ‘제대로 배우면 박용우 만의 그림이 나올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을 배워야 하나’ 살짝 혹 했어요.(웃음)”

본래 과장된 연기를 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봄’에서 박용우의 연기는 여느 때보다 더 담백하다. 그는 “조근현 감독이 열연하는 걸 싫어하신다”고 싱긋 웃더니 이내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준구라는 역할은 과하게 연기했을 때 작품 밸런스를 깨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절제한 연기가 작품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물론 뜨거운 연기도 하겠지만, 20-30대와는 다른 ‘열연’을 하고 싶어요. 자연스럽고 공감가는 열연도 있잖아요.”

사진=영화 ‘봄’ 스틸컷

# “사람의 얼굴에 밴 삶의 흔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난 이제야 비로소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네” (삶의 의지를 되살려준 민경을 향한 준구의 독백)

‘봄’이라는 작품의 기운 덕분인지 한 때 ‘나락으로 떨어졌’던 박용우는 최근 활력을 되찾았다. 한없이 우울하고 무력감에 빠졌던 이유를 스스로 진단해보니 “연기자로서 나름의 욕심과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는데, ‘난 잔잔하게 배우의 길을 가겠다’며 초연한 척 살다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취미가 있더라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과시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행동하는 것”이었다. 박용우는 최근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사적인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2년 전부터 시작한 드럼 연주도 즐기고 있고, 맛있는 것을 찾으러 다닐 때도 행복을 느낀다. 일년 반 전부터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또한 큰 즐거움이다. 얼마 전 SBS 프로그램 ‘식사하셨어요’에서 보여준 이두박근은 “실제의 5분의 1도 안 된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용우는 슬럼프에 빠졌던 시기를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했다. 그는 “‘절대’, ‘결코’, ‘백퍼센트’ 등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서 “살면서 그렇게 무 자르 듯 안 되더라. 방송에서 20대가 ‘괴로움’으로 기억된다고 말했지만, 그 당시엔 즐거운 면도 있었다. ‘봄’을 마친 지금도 마냥 좋을 순 없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조금이라도 전진했지, 퇴보는 없었던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 “비록 내 몸은 겨울을 향하고 있지만, 내 작업은 비로소 봄을 맞았어. 어느 조각가의 말처럼 예술보다는 삶 그 자체가 더 값어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네” (쇠약해져 가는 준구가 정숙에게 남긴 편지에서)

1995년에 데뷔한 박용우는 어느덧 연기인생 20년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간은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 지,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과정이었다.

“선배들이 얘기한 게 다 맞더라고요. 데뷔 때부터 힘 빼고 연기해야 하고, 즐겁게 해야 하고,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죠. 신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건 데 그 때는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이제는 실천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 때 그 선배의 말이 이런 거였네’ 느끼는 시기인 거죠.”

그렇다면 박용우 인생의 ‘봄’은 지금일까. 마지막 질문에 그는 “내 인생에 봄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인생에 소소한 ‘봄’이 있고, 큰 의미의 ‘봄’도 있겠죠. 사소한 부분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정도의 ‘봄’이라면 요즘엔 자주 만나요. 그보다 더 큰 ‘봄’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내 인생에선 없었으면 좋겠어요. ‘봄’이라는 희망을 안고 계속 살고 싶거든요. 즐거운 마음으로 소소한 것들을 이뤄가다가 죽을 때쯤 ‘(작은 ‘봄’들을) 합쳐보니 많은 것을 이뤘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눈 감았으면 해요.”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연관검색어 파헤치기> 마드리드·밀라노의 여신 ‘김서형-이유영’

‘봄’의 또 다른 주인공 김서형과 이유영은 이 영화를 통해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서형은 마드리드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신예 이유영은 밀라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극중 김서형은 생의 불씨가 꺼져가는 남편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아내를 연기했다. 화제의 드라마 ‘아내의 유혹’ 이후 악녀 이미지로 각인됐던 그녀는, 이번 작품을 통해 놀라운 연기 변신을 보여준다. 박용우는 김서형에 대해 “처음엔 지고지순한 역할을 두고 ‘판타지가 아니냐’는 고민을 했던 것 같다”면서 “막상 수긍하고 나선 현장에선 고민없이 느껴지는대로 표현해내더라. 김서형에게 이 작품이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유영의 첫인상에 대해 박용우는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였다”고 떠올렸다. 이어 “생각했던 것보다 자연스럽게 사투리를 쓰는데, 동물적인 (연기)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상업 장편영화는 처음일텐데 굉장히 놀라웠다”고 털어놨다. 그는 전라 노출 연기를 감행한 이유영에 대해 “내가 시선 처리 등을 어려워하면 상대방이 더 어색해 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으로 배려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