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춘할망’ 그녀 ①] 윤여정의 ‘할머니 연기’, “이 나이엔 양손에 떡 쥘 일도 없고, 순서대로 일하자는 다짐”

[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올해 한국 나이로 일흔. 배우 윤여정(69)이 연기하고 산 세월만 반세기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누군가의 어머니를, 누군가의 할머니를 연기했다. 하지만 언제나 누군가의 상대 역할로서의 어머니나 할머니는 아니었다.

자신의 성(性)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박카스 할머니(죽여주는 여자), 대한민국을 돈으로 지배하는 재벌가의 안주인(돈의 맛), 상류층 대저택의 늙은 하녀(하녀)까지. 그동안 윤여정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나이든 사람’일 뿐이지, ‘할머니’라고 볼 수는 없었다.

[사진=콘텐츠난다긴다 제공]

그래서일까. 제대로 ‘할머니같은 할머니’를 연기한 윤여정의 모습이 신선하다. 제주도 시골마을에서 오매불망 손녀밖에 모르는 해녀 할머니가 됐다. 안 어울릴 것 같았지만, 분장까지 더한 노인의 얼굴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계춘할망’(감독 창)에서다.

“선생님, 도회적인 이미지가 이제는 소진되셨습니다.”

‘계춘할망’에 출연할 배우를 섭외하던 제작진의 이 한마디 말이 그를 자극했다. “완전 할머니 역할이 들어왔기에, 내 이미지랑 안 맞지 않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젊은 친구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소진됐나요?” 하고 다시 물었는데 똑 부러지게 복창을 하더라고. 재밌기도 하고 호기심이 생겨서 제작진과 한 번 만났고, 그렇게 이 역할을 맡게 됐어요.”

“처음엔 독립영화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 스스로 편견이 생겼던 것인지, 자극적인 영화여야 상업영화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윤여정은 ‘계춘할망’ 시나리오를 읽고 드라마틱하거나 자극적인 이야기가 아닌데도 굉장히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진=콘텐츠난다긴다 제공]

그만큼 ‘계춘할망’은 순하고 따스한 영화다. 금지옥엽 키우던 손녀(김고은)를 잃어버리고 쓰러져가는 집을 지키며 손녀를 기다리던 계춘(윤여정)이 12년 만에 손녀와 재회하고 많이 변해버린 그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이다. 히어로물이나 스릴러 일색이었던 가정의 달 5월, 온 가족이 함께 볼만한 가족영화로는 ‘계춘할망’이 유일하다. ‘현대식 가정’을 묘사하는 시니컬한 영화도 아니지만, 눈물을 쥐어짜는 신파도 아니다.

“이 할머니가 이 아이를 받아들이는 걸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사람은 다 똑같지 않아요? 따듯한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젊은 사람도 좋아하고 늙은 사람도 좋아하는 거겠죠. 뚜껑을 열어 봐야 아는 거예요.”

할머니를 연기하면서는 본인의 증조할머니를 떠올렸다고 했다. “제 발음으로는 ‘징조할머니’죠.”(웃음)

“어렸을 때는 단지 할머니가 음식을 씹어서 건네주고 하니까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해서 멀리했어요. 할머니가 피난 나와서 아들도 손주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다는 것 같은 할머니의 역사는 몰랐던 거죠. 제가 오십이 넘어서 그 생각이 들고 나서는 매일 밤 할머니한테 빌었어요, 잘못했다고. 증조할머니는 내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자체가 예뻤을 것 같아요.”

“영화 순서대로 그 할머니와 그 손녀가 됐죠.” 손녀 역으로 호흡을 맞춘 김고은과는 영화 흐름대로 가까워졌다고 했다. 영화에서 손녀가 계춘할망에게 동화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는 이야기다. 

[사진=콘텐츠난다긴다 제공]

윤여정은 작년에 ‘계춘할망’ 촬영을 마친 후 잠시 휴식을 가졌다가 ‘죽여주는 여자’를 찍었다. 그때 워쇼스키 자매 감독이 제작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의 시즌2를 찍자고 해 올해 8월로 촬영 일정을 잡았다. 그 사이 노희경 작가가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를 함께 하자고 했다. 드라마는 13일부터 방영을 시작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열일(열심히 일)’한다는 주변의 말에 대해 윤여정은 “순서대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육십 넘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기로 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랑 작가하고, 순서대로. 돈이나 이름이나 이런 거 상관 없이. 그게 좋아요.”

‘노배우’ 처럼 보이지 않는 그이지만 ‘노익장’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내가 40대 같으면, ‘이게 망해서 앞으로 일이 없어지면 어떡하나’ 하고 생각하거나, 두 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양손에 떡 쥔 것처럼 재었겠죠.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나이엔 양손에 떡 쥘 일도 없고, 돈 안 돼도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하는 게 최고의 사치라고 생각해요.”

‘계춘할망’은 19일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116분.

jin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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