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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가 23일 서울 종로구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무실에서 열린 소설 ‘주피터 초상’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형, 나를 보고 미친놈이래.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사람들은 모두 수상쩍은 눈으로 내 시를 보고 있어. ‘연재 불가’라는 통보를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해? 너는 이미 ‘오감도’의 시인 이상이잖아? 조선의 문단은 시인 이상을 가졌고, ‘오감도’를 가졌는데.”
국내 최고의 이상 문학 전문가인 권영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이상의 삶과 사랑, 문학과 예술을 소설체로 풀어낸 ‘주피터 초상’을 출간했다.
권 교수는 23일 서울 종로구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무실에서 열린 ‘주피터 초상’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2023년 중국 산동대학에 외국인 석좌교수로 나가 일하면서 보니 중국에서도 이상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고 있고 오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일반 독자들이 이상이라는 특이한 존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이상의 평전을 하나 써 봐야겠다고 계획했다”고 말했다.
이전에 냈던 평론집과 달리 소설의 형식을 취한 것에 대해선 “글을 쓰다 보니 앞서 냈던 ‘이상 연구’를 따라가고 있었고, 일반 독자가 읽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주 무딘 글(솜)씨지만 조금 다른 스타일로 접근해 보자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 숙소 벽에 ‘결여’, ‘억압’, ‘금제’라는 세 개의 단어를 적어 놓고 숙고했다. 이는 이상이 일생에 걸쳐 고민했던 문제로, 사랑과 경제적 측면에서 결핍된 상태, 제도적 억압, 시대적 금제(금하고 억제)를 의미한다. 권 교수는 “세 가지를 놓고 이상이란 인물에 접근해 보자. 그동안 해 온 이상 연구는 문학에 대한 해석이 주였는데, 이번에는 인간 이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소설은 이상과 가까운 형이자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의 전지적 시점으로 이상의 삶을 그려낸다. 화가를 꿈꿨던 이상의 젊은 시절부터 폐결핵으로 인한 좌절과 기생 금홍과의 연애, ‘오감도’ 게재를 비롯한 집필 활동, 최저 낙원으로 삼은 제비 다방의 운영, 구인회의 동인으로 매진했던 출판 일, 변동림과의 결혼과 일본 유학 시기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앞서간 모더니스트이자 천재였던 이상의 짧고 굴곡진 일생을 구본웅의 시선을 빌려 들여다본다.
“이상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세한 연도를 책 뒤에 소개해 뒀는데, 중간중간에 빈칸이 굉장히 많다. 이를 제대로 채우지 않고서는 이상의 성장 과정이나 예술적 관심을 제대로 알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이상을 가장 가까이 증언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생각하다 소학교 시절부터 죽기 직전같이 같이 있던 사람이 화가 구본웅이 떠올랐다.”
이상은 구본웅과 함께 같이 그림 공부를 했고, 후일 구본웅의 아버지가 만든 출판사인 창문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김해경이란 본명 대신 ‘이상(李箱)’을 필명으로 쓴 것도 구본웅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자신이 받은 화구 상자를 경성고등공업학교 입학 선물로 준 데서 비롯됐다. 이상에게 계속 미술 공부를 하라는 뜻을 담은 벗의 선물에 감동한 이상은 이를 영원히 간직하겠다며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의 이상을 이름으로 삼았다.
책은 구본웅의 시각으로 인간 이상의 삶을 따라가며 고뇌와 선택의 순간들을 담았다. 큰아버지의 반대로 미술을 포기하며 겪은 좌절, 결핵으로 인한 육체적 나약함,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탓에 독자를 얻지 못한 낙담, 이곳에서 늘 빈궁하고 고독했노라 고백하는 이상의 인간적인 면면을 목격하게 된다.
권 교수는 그동안 이상이 지나치게 퇴폐적 인물로 평가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오히려 그의 순수한 면에 주목했다. 그는 “금홍이란 기생과의 만남도 이상이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한 순정한 청년이었고, 금홍 역시 기생이 아니라 연심 어린 여인으로서 보여주고 싶었다”며 “금홍은 이상이 문학과 예술에 빠지자 더이상 자신이 곁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떠났고, 이상은 헤어진 뒤 소설과 시에서 금홍 얘기를 많이 썼다. 결핍된 사랑을 금홍으로부터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수십 년간 이상을 연구한 전문가면서도 허구로 빈틈을 채운 이야기였기에 권 교수는 2024년 초고를 완성하고도 1년간 김연수 소설가, 안지영 평론가 등 주변 사람들에게 원고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심혈을 기울여 거듭해 수정 과정을 거쳤고, 비로소 책을 완성했다.
소설은 이상의 삶과 문학을 그리면서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과 한국 근대문학, 예술의 풍경을 함께 조망한다.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남은 위대한 작가, 하융이라는 이름으로 삽화를 그렸으며 김기림으로부터 주피터라는 찬사를 받은 ‘한국문학의 아이콘’ 이상을 박제된 존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만나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