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돌파력으로 기업 성장 발판
방문판매·연구개발·글로벌 판로 등
업종 불문 끈질긴 생존력 ‘공통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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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이 1994년 화성 1호 공장 앞에서 찍은 사진. 이 회장은 첫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한동안 품에 지니고 다녔다. ‘초심(初心)’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코스맥스 제공] |
지금 한국의 ‘허리산업’을 뒷받침하는 굴지의 창업가들엔 ‘영업맨’ 출신들이 많다. 과거의 고통은 오늘의 아픔을 이겨내는 토대다. 그 토대에서 영업맨들은 앞으로 한걸음을 더 내민다. 각 걸음은 쌓여 ‘성공’에 다가간다. ‘죽을 각오’로 창업에 뛰어들었던 그들의 공통 분모엔 ‘영업맨 DNA’가 놓여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화장품 ODM 기업 코스맥스를 창업한 이경수 코스맥스BTI 회장이 꼽힌다. 이 회장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동아제약에서 영업맨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 이후 대웅제약으로 옮겨 영업 전무(마케팅)까지 초고속 승진 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영업 전무까지 초고속 승진은 ‘영업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당시로선 비교적 늦은 나이인 46세, 창업을 결심했다. 분야는 ‘화장품’이었다. 이 회장의 자서전 ‘같이 꿈을 꾸고 싶다’엔 창업 초기의 힘든 나날들이 소상히 적혀 있다.
이 회장은 창업 초 일본 ODM 회사 미로토와 제휴했다. 부족한 기술을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기술력 없는 미래는 없다’고 판단했다. 연구소를 체계화 했고, 결국 30여년 후 ‘K뷰티’의 펄떡거리는 심장으로 코스맥스를 키울 수 있었다. 이외에도 농공단지에 화장품 회사를 세우기 위해 동의서를 들고 뛰었던 상황, ‘너무 싸다’는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더페이스샵에 물건 공급을 결정했던 일화 등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영업맨 DNA가 작동한 결과로 해석된다.
방문판매 조직을 성장 엔진으로 삼은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행보 역시 영업 DNA의 전형으로 꼽힌다. 윤 회장은 외국계 백과사전 방문판매 영업사원 출신이다. 그는 고객 접점에서 형성된 신뢰와 관계 관리 경험을 사업 모델로 확장했다. 학습지와 정수기 렌탈 등 반복 매출 구조를 구축하며 위기 국면에서도 현금 흐름을 유지한 전략은 영업 조직 기반 경영의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단순 제품 판매가 아니라 관리·서비스·재구매를 결합한 구조가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다.
광동제약의 ‘영업맨 DNA’는 창업주 고(故) 최수부 회장부터였다. 최 회장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섰고, 고려인삼산업사에 들어가 외판원으로 현장을 뛰며 자본을 모아 1963년 광동제약을 세웠다. 영업맨 시절 최 회장은 을지로의 사무실과 상점을 닥치는 대로 두드리다 양복점에서 경옥고 두 통을 팔아 첫 성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회사가 제약업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음료·유통(F&B)에서 강한 존재감을 보여온 배경에는, 제품을 “만드는 것”과 “팔리는 곳까지 책임지는 것”을 분리하지 않는 창업주식 실행이 깔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장평순 교원그룹 회장도 스스로를 영업맨이라 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장 회장은 “영업은 나의 천직”이라고 했다. 또 교원그룹은 ‘방문판매회사’로 규정해 왔다. 장 회장의 출발이 그를 ‘영업맨’이 되게 했다. 장 회장은 1980년대 초 전집도서 방문판매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4개월만에 당시 대졸자 초임 월급의 2년치에 상당하는 책을 팔아 “전국 판매왕”으로 선정됐다. 이후 입사 6개월만에 팀장, 1년만에 본부장 자리에 올랐다. 장 회장의 영업 전략은 하나다. ‘신뢰’다. 장 회장은 “정직”과 “신뢰”를 교원 성장 동력이라 언급했다.
한 제약업체 관계자는 “영업은 적성에 맞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직역이다. 당장 성과가 나지 않는데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할만큼의 ‘낙관론자’가 아니면 이어가기 힘들다”며 “대인 관계의 기술과 약속을 지켜 신뢰를 확보하는 일. 당신이 나를 믿게 만드는 방법 등은 창업과 성공의 가장 큰 밑거름이다. 그래서 영업맨들이 성공을 한 사례가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석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