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수치심이라뇨? 저는 화가 났는데요!”[수치스러운 피해자는 없다②]

지인 성추행 피해자 A씨의 토로
“변호사 조언은 이해하겠는데…
왜 성범죄만 수치심이라 해야 하나”
‘성적 수치심’, 유무죄 쟁점 되기도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피해자와 변호사 이미지. ChatGPT를 활용해 생성.


[헤럴드경제=안대용·안세연·양근혁 기자] “고소를 준비하면서 ‘성적 수치심’이 법적 용어니까 이 용어를 써야 한다고 변호사님이 조언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저는 전혀 수치스럽지가 않고 억울하고, 무엇보다 너무 화가 나는데 이걸 왜 수치심이라고 해야 하나요?’라고 했죠. 저는 그게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성추행 피해 고소를 준비하며 로펌(법무법인)을 찾았던 40대 여성 A씨는 변호사의 얘길 듣고 더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변호사가 A씨에게 분한 마음이 남지 않도록 고소 사건이 처리되게 하려고 진심을 담은 조언을 건넸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A씨로선 ‘성적 수치심이라고 해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납득되지 않았단 것이다.

A씨는 “우리가 교통사고 뺑소니를 당하면 억울하고 화가 나지 않나”라며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고 분노, 억울함 등등 여러 감정이 드는데 왜 성범죄만 ‘분노’, ‘불쾌감’이라고 표현 못하고 ‘수치심’이라 이야기해야 하나”라고 지적했다.

A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남성 B씨를 지난 2월 강제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업무상 주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에 참석했는데 자리가 이어졌고, 둘만 있는 공간에서 B씨가 성추행을 하려고 했다는 피해 내용을 고소장에 적었다.

이 일로 A씨는 병원 치료도 받고 있다. A씨는 “의사가 웬만하면 고소를 하지 말라고 하더라”라며 “너무 힘이 드는 일일 수 있으니 변호사가 전부 다 케어해줄 수 있는 게 아니면 그냥 다 잊고서 잠 잘 자고 일상을 보내는 게 현실적으로 나을 수 있다고 의사가 얘기하기도 했다”면서 토로했다.

A씨는 지난 3월 경찰에 출석해 고소인 조사를 받았다. 21일 헤럴드경제 취재 결과 경찰은 같은 달 하순 A씨가 고소한 B씨의 강제추행 혐의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임세준 기자


A씨와 같이 성폭력·성범죄 피해자들은 고소를 결심하는 것부터 쉽지 않고 고소를 한 뒤에도 형사 절차 단계마다 난관을 마주한다. 진술 외에 증거가 많지 않다는 사안의 특성 때문에 피해자 스스로 더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호소해야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어려움 중 하나다. 이 과정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서 밝혀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일인데, 가장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벽이 수사와 재판 과정 중 오가는 말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부담과 언어의 장벽이다. A씨가 지적한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도 성폭력·성범죄 피해자들에게 가장 답답한 장벽으로 꼽힌다.

실제로 ‘성적 수치심’은 경찰과 검찰 등 수사 단계에서는 물론 재판 단계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성폭력·성범죄 피해자 대리를 전문으로 하는 법무법인 심앤이의 심지연 대표변호사는 “실무상 수사 단계 및 법원 등에서 여전히 ‘성적 수치심’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며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가 추행의 주요 판단 요소 중 하나가 되다보니, 처벌을 위해서라도 피해자들은 수치심을 느꼈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성적 수치심 인정 여부는 형사재판에서 유무죄를 가르는 결정적 쟁점이 되기도 한다. 국가대표 선후배 간 ‘동성 성추행 논란’이 일었던 린샤오쥔(한국명 임효준) 사건이 대표적이다. 강제추행을 비롯한 성폭력·성범죄는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 구조인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남녀 사이 뿐만 아니라 동성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고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데 이 사안은 국가대표 동성 선후배 사이에서 발생해 사회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린샤오쥔은 대한민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시절이던 2019년 6월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훈련을 하다가 후배 황대헌의 바지를 잡아 당겨 다른 선수들 앞에서 신체 부위를 드러나게 한 혐의(강제추행)로 그해 12월 재판에 넘겨졌다.

린샤오쥔은 2020년 5월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2심 재판부는 린샤오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2심 재판부는 “강제추행죄에서 추행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행위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여기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피해자의 의사, 성별, 나이,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 행위태양, 주위의 객관적 상황과 그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히 결정돼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그러면서 “원심(1심)이 적법하게 채택·조사한 증거에 의해 인정되는 아래 사정을 종합하면, 원심이 판시한 피고인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했다는 점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인에게 폭력 또는 협박으로 피해자를 추행할 고의가 있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무죄 판결 이후 린샤오쥔은 귀화 절차를 밟고서 중국 국적을 택했다. 2021년 대법원은 이 같은 2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보고 린샤오쥔의 무죄를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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