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의 교실에서 회복의 교실로”…사과가 사라진 학폭 이렇게 풀자 [생존게임이 된 학폭⑥]

생존게임이 된 학폭⑥-전문가의 시선


[기획 의도]
학교폭력 엄벌주의가 교실을 비정한 ‘생존 게임’으로 밀어 넣었다. 사소한 다툼도 무조건 학폭위로 던져지면서 심의는 폭증했지만 정작 ‘학교폭력 아님’ 처분만 쏟아지며 교실의 자정 기능은 마비됐다. 입시 감점을 피하려는 어른들의 소송 대리전 속에서 아이들은 사과와 화해 대신 약점을 수집했다. 피해자 보호라는 본질을 잃고 사법화의 늪에 빠진 학폭 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학부모·변호사·교사·학생 4개의 엇갈린 시각으로 입체적으로 해부해보고자 한다.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상담을 하고 있는 모습. [챗GPT를 통해 제작]


[헤럴드경제=김용재 기자] 신고와 맞신고가 반복되면서 ‘생존게임의 현장’이 된 교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 제도가 학생 간 갈등을 교육적으로 해결하는 기능을 잃고 사법 절차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학교 현장이 사실상 준법정으로 변했다고 진단한다.

이들은 학교폭력 대응 체계를 전면 부정하기보다 경미한 갈등은 교육적으로 해결하고 중대한 폭력은 엄정 대응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교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학폭’ 대응 과정 에서 중재·회복 절차 강조해야


학교폭력 대책 수립에 참여해 온 이희현 한국교육개발원(KEDI) 연구실장은 현재의 학교폭력 제도가 엄벌주의와 입시 경쟁이 결합하며 본래 목적을 잃었다고 진단했다. 이 연구원은 “지난 10여 년간 수많은 학교폭력 대책과 예방 프로그램이 도입됐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사안 처리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며 “예방과 관계 회복은 구호에 그쳤고 실제 제도는 신고와 심의 처분 중심으로 작동해 왔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교실의 사법화를 낳은 배경으로 국민적 엄벌주의와 입시 제도의 결합을 꼽으면서 “나의 권리와 이익만 극대화하는 법치적 시민성으로 곧장 건너뛰면서 사과와 용서라는 교육적 덕목이 실종됐다”며 “또래 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갈등까지 모두 공식 심의 절차로 넘어가면서 맞신고와 쌍방 심의가 폭증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학교폭력 대응 과정에서 중재와 회복 절차를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대표적인 것이 핀란드의 학교폭력 예방프로그램 ‘KiVa’다. 핀란드 정부와 연구진이 공동 개발한 이 프로그램은 가해자 처벌보다 또래 집단 전체의 관계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8000여 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시행 9개월 만에 괴롭힘과 피해 경험이 유의미하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단위 시행 이후에는 수천 명 규모의 가해·피해 학생 감소 효과도 보고 있다.

이 연구원은 “핀란드 등 해외 국가들은 학생 생활과 공동체 교육을 교육과정의 중요한 축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한국은 학업과 입시 중심 구조가 지나치게 강하다”며 “회복 절차가 가해학생에게는 책임을 배우는 기회가 되고 피해학생에게는 안전한 치유 과정이 되며 교사에게는 민원으로부터 보호받는 장치가 될 수 있도록 정교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교폭력 연출 이미지. 기사와는 무관. 게티이미지뱅크


무분별한 신고 거르는 ‘사전 스크리닝 장치’ 도입 촉구


이같은 상황에서 무분별한 학교폭력 신고를 걸러낼 수 있는 사전 스크리닝 장치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있었다.

교사노조에서 학교폭력을 오랜기간 담당했던 박정우 교사는 “현재는 학부모가 학교폭력 신고를 하면 교사 입장에서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절차대로 이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됐다”며 “사안이 학폭위로 넘어가기 전 교육청 차원의 전문적인 숙려 및 스크리닝 절차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부모들은 학폭 신고를 하면 학교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라며 “교사는 민원을 피하기 위해 교육적 개입보다 절차적 대응을 선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맞신고 남용을 막기 위한 제도 개선도 과제로 꼽힌다. 이지수 변호사는 “현재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해도 서로 맞신고를 하면서 별개의 사건처럼 심리되는 경우가 많다”며 “맞신고를 독립 사안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사건으로 통합해 전체 맥락을 판단하는 심사 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어 “가해 책임을 희석하기 위한 전략적 역신고가 반복되면서 정작 피해학생 보호가 어려워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촉법소년을 상대로 압박용 형사고소를 남용하는 문제 역시 제도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열리기 전 마지막 모의평가를 3일 여의도여고 3학년들이 교실에서 시험 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입시제도 정교화 없이 ‘학교폭력 정상화’ 없다 지적도


입시 제도의 정교화 역시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현재 대학 입시에서는 학교폭력 조치사항이 광범위하게 반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제도가 학교폭력 예방에 일정 부분 기여한 측면은 인정하면서도 경미한 사안까지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관리하는 것은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 입시업계 관계자는 “전체 학교폭력 처분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1~3호 조치의 경우 학생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관계회복 프로그램을 성실히 이수했다면 대입 감점 적용을 일부 완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반복적·계획적 폭력이나 집단 괴롭힘, 중대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의 경우 현재보다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며 “모든 갈등을 신고와 소송으로 해결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사법적 보호와 교육적 회복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를 다시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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