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클로 2세’ 야나이 코지가 스크린으로 향한 이유? [취향의 발견]

유니클로 차남, 스크린에서 찾은 또 다른 경영
난민·장애 아동·청소 노동자…포용의 메시지
‘모두를 위한 옷’ 기업 철학, 패션 넘어 영화로
‘지속가능성’+‘사업 성장’의 장기 로드맵 일환

 

영화 ‘퍼펙트 데이즈’ [티캐스트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도쿄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는 오늘도 익숙한 일상을 시작합니다. 동트기 직전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이불을 개고, 몸이 기억하는 듯한 루틴을 거쳐 집을 나서면 기분 좋은 아침 공기가 그를 맞이하죠. 도쿄의 풍경과 소리들은 그의 출근길을 응원하는 배경음악처럼 흐릅니다.

히라야마는 일터에 도착해 꼼꼼하게 화장실을 청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고, 힘들고 더럽다고 생각할 그 일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그리고 자부심을 갖고 해나가죠.

퇴근 후의 시간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거나, 단골 술집에서 시원한 사케 한잔과 함께 또 다른 책을 펼치는 것이 하루의 마무리입니다. 지극히 평온하고 안전해 보이는 그의 하루는 묘한 위로를 건넵니다. 대단한 성취가 없더라도, 반짝이는 사건들로 채워지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반복되는 일상과 작은 행복 속에서 저마다의 ‘완벽한 하루(Perfect days)’를 살아내고 있다는 위로 말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2023)

지구 반대편 영국 런던에는 두 명의 남성이 좁은 호텔방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리아 출신 영화인 하산과 패티입니다. 내전을 피해 튀르키예에 정착했던 이들은 런던의 한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튀르키예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 통보를 받게 됩니다. 조국으로도,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들은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어 영국 난민 숙소 생활을 시작하게 되죠.

영화 ‘피난의 동지들’ [난민영화제 제공]

15년 지기 친구이자 내전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아온 이들의 불안한 기다림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폭력과 교차됩니다. 폭격은 피했지만, 어느 나라 공무원의 밀린 서류 더미 속 한 장이 되는 것은 피하지 못했죠. 하산은 간절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난민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 ‘피난의 동지들’, 2026)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를 따라가는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 그리고 하산 카탄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피난의 동지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비슷한 시각을 공유합니다. 바로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과 포용입니다.

히라야마의 묵묵한 일상은 무관심 속에서 쉽게 더러워지고 방치되는 공공 공간과 노동의 가치를 돌아보게 만들고, 하산과 패티의 삶은 국제사회가 해결해야 할 난민 문제를 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로 바라보게 만들죠. 그리고 이 두 영화에는 또 하나의 의외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들 작품의 뒤에 글로벌 의류기업 유니클로의 모회사 패스트리테일링 그룹에서 이사이자 수석집행임원을 하는 야나이 코지(柳井康治·49)가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를 제작하고 투자한 그는 유니클로를 일군 야나이 다다시 회장의 차남으로도 유명하죠.

옷을 만드는 패션 기업의 임원이 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요. 더구나 그가 유니클로 창업자의 아들이라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이번 ‘취향의 발견’은 영화에 대한 꾸준한 지원과 투자를 통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유니클로가(家)의 차남, 야나이 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 매출 32조의 패션 제국…후계에 쏠리는 관심

 

[헤럴드경제 DB]

우선 유니클로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2025 회계연도 기준 약 32조원의 매출을 기록한 유니클로는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브랜드입니다. 전신 오고리상사에서 출발한 모기업 패스트리테일링은 지난 1984년 히로시마에 유니클로 1호점을 열었고, 현재는 전 세계 25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의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좋은 품질의 기본 의류를 대량 생산해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전략, 그리고 히트텍과 에어리즘 같은 기능성 의류 개발은 유니클로를 세계인의 일상 속 브랜드로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누가 이 제국을 이끌 것인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올해 77세가 된 창업자 야나이 타다시(柳井正) 회장의 뒤를 이을 차세대 리더십에 대한 궁금증 때문입니다.

특히 장남 야나이 카즈미(柳井一海)와 차남 야나이 코지는 모두 현재 패스트리테일링 이사이자 임원으로서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골드만삭스 출신인 카즈미와 미쓰비시상사 출신인 코지는 각기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그룹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죠.

야나이 타다시는 일찌감치 “아들 누구에게도 사장직을 맡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입니다. 그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두 아들은 거버넌스를 담당하게 될 것”이라며 “훌륭한 경영진을 선임하고, 그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역할”이라며 후계 논란에 선을 그었죠.

야나이 회장의 말처럼 두 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패스트리테일링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후계 구도를 둘러싼 관심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데요. 이러한 관심 속에 공장도, 매장도, 패션쇼장도 아닌 스크린으로 향하고 있는 차남 야나이 코지의 행보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죠.

유니클로가 ‘난민 영화’ 투자에 나선 이유

 

야나이 코지 패스트리테일링 그룹 수석집행임원이 지난 2023년 진행한 지속가능성 목표 진척 상황에 대한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유니클로 제공]

대부분의 재벌 2세들이 사업 확장과 실적 경쟁으로 주목받는 반면, 야나이 코지는 지속가능경영과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프로젝트, 그리고 영화계 활동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활동은 난민 영화 지원 사업인 ‘디스플레이스먼트 필름 펀드(DFF)’입니다. 지난해 출범한 DFF는 전쟁과 탄압, 강제 이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영화인들이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펀드입니다. 유니클로는 초기 파트너로 참여해 지난해와 올해 각각 10만 유로를 지원하며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DFF의 출발점은 2023년 스위스에서 열린 글로벌 난민 포럼이었습니다. 당시 야나이 코지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배우 케이트 블란쳇과 만나 난민 문제와 영화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이는 난민 영화인을 지원하는 펀드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영화 ‘피난의 동지들’ 역시 DFF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작품입니다.

영화는 지난 17일 서울 서대문구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제10회 난민영화제’에서 국내 최초로 관객과 만났는데요. 이 자리에는 야나이 코지도 함께였습니다. 관객과 함께 난민과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 그의 발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유니클로의 난민 영화 지원을 ‘Made for All(모두를 위한 옷)’이라는 브랜드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했다는 점인데요.

야나이 코지 패스트리테일링 그룹 수석집행임원이 지난 17일 서울 서대문구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진행된 ‘제10회 난민영화제’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유니클로 제공]

유니클로는 지난 20여 년 동안 의류 지원과 긴급 구호,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난민을 지원해 왔습니다. 하지만 영화 지원은 조금 다른 방식입니다. 옷과 생필품으로 삶을 돕는 것을 넘어, 이야기와 문화의 힘으로 사람들의 인식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바탕에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에 대한 야나이 코지의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는 사람들의 생각과 시각을 바꿀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공감을 일으키게 하는 좋은 매체이기도 하죠.”

“과거 우리는 패션의 힘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영화 투자는 난민을 돕는 새로운 방식이죠. 유니클로는 DFF가 난민들의 이야기를 주류 사회로 가져오고, 난민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하는 플랫폼이 되기를 바랍니다.”

앞서 야나이 코지는 ‘퍼펙트 데이즈’, ‘썸바디 컴스 인투 더 라이트(Somebody comes into the light)’, ‘이퀄 플레이(Equal play, 2024)’ 등의 작품에 제작자로 참여하며 꾸준히 영화 제작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영화 ‘이퀄 플레이’ [유튜브 트레일러 갈무리]

‘퍼펙트 데이즈’는 유니클로가 후원한 시부야 공중화장실 개선 사업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고, ‘이퀄 플레이’는 장애 아동들이 스포츠를 통해 자신감을 얻고 차별에 맞서며 동등한 참여의 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죠. ‘퍼펙트 데이즈’가 노동의 존엄을, ‘피난의 동지들’이 난민의 목소리를 조명했다면, ‘이퀄 플레이’는 장애 아동의 기회와 포용을 이야기합니다.

화장실 청소부와 난민, 이주민, 장애 아동. 야나이 코지가 제작에 참여한 작품들이 향하는 시선이 모두 사회가 쉽게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에게 닿아 있다는 점은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들 어디에서도 유니클로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데요. 브랜드 홍보보다 브랜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관심과 경청의 태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죠.

공공 캠페인·장애인…영화가 전하는 ‘브랜드의 미래’

 

패스트리테일링이 제시한 장기 지속가능성을 위한 액션 플랜 다이어그램 [패스트리테일링 홈페이지 갈무리]

많은 기업들이 사회공헌 활동에 힘을 쏟습니다. 사회적 책임 역시 기업 활동의 일부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유니클로 역시 매출이 급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 사회공헌 활동을 본격화했는데요. 현재 패스트리테일링에서 이러한 사회공헌과 지속가능경영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야나이 코지입니다.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 역시 이러한 지속가능경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은 현재 패스트리테일링이 추구하는 성장 전략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입니다.

패스트리테일링은 2021년 말 ‘장기 지속가능성 목표와 액션 플랜’을 발표하며 지속가능성과 사업 성장을 동시에 실현하는 새로운 사업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이른바 ‘버터플라이 다이어그램’입니다. 이를 통해 그룹은 고객을 중심으로 공급망의 순환과 재사용·재활용의 순환이라는 두 개의 구조를 그리고, 그 바탕에 ‘모든 사람의 다양성을 존중한다’‘커뮤니티를 지원하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원칙을 내놓았는데요.

단지 많이 팔리는 옷이 아니라 사회·환경·인류 등 모든 차원에서 ‘좋은 옷’을 만드는 것. 그것이 패스트리테일링이 그리고 있는 미래의 방향임을 분명히 한 것이죠.

야나이 코지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온실가스 감축과 친환경 소재 확대는 물론, ‘LifeWear(궁극의 일상복)’라는 개념 안에 환경과 인권, 사회적 책임까지 통합하겠다는 구상을 밝혔습니다. ‘Life’를 단순히 개인의 일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사회 전체의 영역으로 확장한 셈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티캐스트 제공]

그는 “지금까지 없었던 의류와 패션, 그리고 사업 모델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 안에는 지속가능성이 단순히 사회적 책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죠.

같은 맥락에서 영화 제작자이자 투자자로서 야나이 코지의 행보 역시 이러한 철학과 맞닿아 있는 듯 보입니다. 패스트리테일링이 지향하는 미래를 떠올려보면, 영화계에서의 그의 활동은 패션과 무관한 외도가 아니라 오히려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의 또 다른 표현에 가깝습니다.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것에서 출발한 철학은 이제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누구의 이야기도 외면받지 않는 세상을 향해 확장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유니클로가 이야기하는 ‘Made for All’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를 위한 옷’을 넘어 ‘모두를 위한 사회’ 말입니다.

그래서 재벌 2세의 취미처럼 보였던 그의 영화 활동은 어쩌면 패스트리테일링의 미래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야나이 코지를 둘러싼 관심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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