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 한국형 SF의 ‘희망’이 될까 [리뷰]

나홍진 감독 ‘곡성’ 이후 10년 만 신작
호포항 마을 덮친 정체불명 괴물 공격
쫓고 쫓기는 경쾌·시원한 질주 1시간
악의 없는 악행…‘선과 악’의 불편한 질문

 

영화 ‘호프’ 보도스틸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포지드필름스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호프’의 시작은 오랜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홍진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저기 산 너머에서 먹구름이 막 몰려오기 시작할 때”였다. 대지에서 온전히 발을 떼고 다른 차원으로까지 뻗어나간 이야기는 그렇게 강산이 족히 변했을 시간을 거쳤다. 무언가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호프’는, 이제 그 먹구름에 갇혀 깜깜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한국 영화의 ‘희망’이 되어 2026년 여름 극장가를 찾는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지 싶죠. 굉장히 부담되죠.” 감출 생각이 없는 감독의 속마음에 곧장 뒤따른 “그래도 하나라도 더 해봐야죠”라는 책임감은, 영화 ‘호프’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를 새삼 실감케 한다.

사실 현재 한국 영화계의 상황을 논하지 않더라도, ‘호프’는 이미 태생적으로 기대작의 명성을 얻기에 차고 넘친다. ‘곡성’(2016) 이후 나홍진 감독의 10년만의 신작, 한국 영화 역대 최대 규모의 제작비, 황정민·조인성·정호연으로 이어지는 호화 캐스팅. 기다리지 않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작품은 그 오랜 기다림이 아깝지 않은 156분을 선사한다.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쫄깃해지며 정신없이 질주하지만, 그 맛이 온전히 시원하지만은 않은 나홍진식 불쾌함까지 오롯이 눌러 담았다. 누군가 한국형 SF(Science Fiction) 영화의 희망을 묻는다면, 그것은 ‘호프’에 있다고 말할 만하다.

영화 ‘호프’ 보도스틸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포지드필름스 제공]

영화 ‘호프’의 배경은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호포항이다. 출장소장 범석(황정민 분)은 논길 한가운데에서 정체불명의 공격을 받아 죽은 소가 발견됐다는 동네 청년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 범상치 않은 발톱 자국 앞에서 범석과 성기(조인성 분)를 비롯한 마을 청년들은 직감적으로 호랑이의 소행이라 짐작한다. 비상이 걸린 범석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분주히 무전을 돌리며 달려간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다. 송두리째 파괴된 마을과 길가에 널브러진 주민들의 시체, 그리고 정체불명의 괴성이 뒤섞인 생지옥. 범석은 총을 들고 이제는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뒤쫓으며 달리고 또 달린다.

마을로 내려간 범석을 뒤로하고 숲으로 향한 성기 일행은 또 다른 참상과 마주한다. 이미 무언가에 당한 소들이 널브러진 축사와, 물어뜯겨 나무에 걸려 있는 사람의 팔이 상황의 심각성을 말없이 증언한다. 성기 일행이 마을을 공격한 것의 흔적을 쫓아 더욱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범석은 마을에서 뜻밖의 생존자들을 만나고 또 허망하게 잃는 것을 반복하며 서서히 ‘무언가’의 정체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것이 호랑이가 아닌, ‘콩과 팥을 섞어 놓은 색깔’의 뭐라 설명하기 힘든 괴물임을 확인한 순간, 당장이라도 목숨이 날아갈 뻔한 범석 앞에 호포항 순경 성애(정호연 분)가 극적으로 등장해 그를 구해낸다.

범석과 성애는 본격적으로 마을을 공격한 괴물을 인정사정없이 뒤쫓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더욱 섬뜩한 사실을 마주한다. 이 마을을 노리는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 그 나머지와 맞닥뜨린 것은 숲속 깊이 들어간 성기 일행이다. 다짜고짜 마을을 공격한 이 괴물은 대체 어디서 온 무엇일까. 범석과 성애, 성기 일행은 끝을 알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마을을 지켜낼 수 있을까.

영화 ‘호프’ 보도스틸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포지드필름스 제공]

영화는 초반 1시간여를 숨 가쁘게 달린다. 범석을 따라 그 ‘무언가’의 정체를 일단 뒤쫓고 보는 시간이다. 끝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골목을 달리고, 거칠게 경찰차를 몰아대면서 영화는 속도감을 조금도 잃지 않고 앞으로 질주한다. 간간이 차도 날아다니고 사람도 날아다닌다. 타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쫓고, 그것에 쫓기는 내달림이 거침없고 짜릿하다.

여기에 밀도 있게 짜인 카체이싱 장면과 시원시원하게 터지는 총격 장면 등 시각적 스펙터클이 남은 1시간 반여를 내달릴 수 있는 충분한 추진력을 축적한다. 후반부에선 숲속에서 시작돼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와 좁디좁은 경찰차 안에서 각자 나름대로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는 배우들의 열연 역시 기대할 만하다.

괴물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영화의 3분의 1 정도가 지난 후다. 그 정체가 외계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인간과 외계인 그 사이 어디쯤 있는 괴물의 외형은 그리 낯설지 않다. 칸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당시 다수의 평론가가 지적했던 CG(컴퓨터 그래픽)의 미흡함도 딱히 거슬리지 않는다. 나 감독은 “칸 출품작은 후반 작업이 마무리되기 전 단계였다”며 “이후 한 달여를 후반 작업 마무리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외계인의 기괴함이 낯설고 불편할지언정, 서사적 몰입감에 방해받는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중반부 이후 영화는 필사의 사투를 벌이는 인간과 이들과 맞닥뜨린 외계인들의 표정을 병치시킨다. 그 과정에서 외계인들이 다짜고짜 호포항을 공격한 이유 역시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난다. 마이클 패스벤더·알리시아 비칸데르·테일러 러셀·카메론 브리튼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소화한 외계인들의 감정 연기가 다소 낯설긴 하다. 하지만 후속편이 나올 경우 이들이 연기하는 외계인이 서사의 중심이 될 것이 틀림없다는 점에서, 그것까지 감안한 캐스팅이라면 충분히 납득되는 수준이다.

영화 ‘호프’ 보도스틸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포지드필름스 제공]

 

영화 ‘호프’ 보도스틸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포지드필름스 제공]

서사의 중심이 쫓고 쫓기는 사투라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사투 속 인물들 각각의 행동과 판단에 조용히 녹아 있다. 나 감독의 작품들이 늘 ‘선과 악’이란 화두 위에 존재해 왔듯, ‘호프’ 역시 궤를 같이한다.

정호연이 연기한 성애는 이 영화에서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인물이다.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며, 공격하면 나쁜 사람이다. 생각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그를 이끄는 것은 분명한 선의다. 범석의 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출장소장으로서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알고, 행동해야 함을 아는 사람이다. 물론 담력이 충분하냐의 문제는 논외다. 그런 범석이 괴물인 줄 알고 총을 쏘아댔는데 알고 보니 친구였다고 해서, 그 행동을 ‘악’이라 규정하기엔 어딘가 찜찜하다.

영문도 모른 채 당한 마을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면 외계인이 이 영화의 진짜 악인가 싶지만, 양배(음문석 분)란 인물이 등장해 그가 저지른 만행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외계인=침략=악’이라는 판단 역시 경계가 흐려진다. 단순히 때려 부수는 것이 악인가. 악의 없는 악행은 악이 아닌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입장 차이, 그 무지가 빚어낸 참극을 그린다는 점에서 ‘호프’는 낯선 외지인의 등장으로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곡성’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영화는 명쾌한 오락적 쾌감 뒤에 왠지 모를 죄의식과 죄책감을 조용히 남긴다.

초자연을 넘어 우주까지 뻗어간 나 감독의 도전은 낯설고도 즐겁다. 외계인도 있지만, 맛깔나는 유머에다 신명 나는 액션까지 있다. 적어도 영화적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호프’에는 즐길 것들로 넘친다. ‘한국 SF는 망한다’는 속설이 오랫동안 이 장르를 짓눌러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액션과 위트, 메시지까지 알맞게 버무린 이 영화가 그 속설에 균열을 낼 수 있다면, ‘호프’란 제목은 단순히 작품명이 아니라 한국 SF 장르 전체를 향한 선언이 될지도 모르겠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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