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뒤편 날것의 세계로…이서진도 차인표도 ‘무대 직진’, 왜?

이서진 ‘바냐 삼촌’…최수종·차인표도 연극 출연
심리적 문턱 낮추지만 쏠림 현상·빈부 격차 우려도


연극 ‘바냐 삼촌’의 이서진 [LG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사극의 왕’이었고, ‘국민 드라마의 주역’이었다. ‘청춘스타’에서 ‘예능 스타’로 외연을 확장했던 중장년의 배우들이 무대로 향하고 있다. 배우 이서진(54)이 데뷔 이래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도전했고, 최수종(63)과 차인표(59)가 연이어 무대에 선다.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배우들의 ‘무대행’이다.

28일 공연계에 따르면 드라마와 영화, 예능을 통해 사랑받은 스타 배우들이 무대에 서며 연극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는 “연극은 작고 가난한 예술이라는 인식이 컸는데 몇 해 전부터 스타 배우들이 무대로 서고, 대극장 작품들이 등장하며 연극도 뮤지컬처럼 흥행할 수 있다는 인식 전환이 마련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서진 ‘바냐 삼촌’부터 최수종·차인표까지


요즘 연극계 ‘화제의 중심’은 이서진의 ‘바냐 삼촌’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던 ‘이서진 본캐’가 체호프를 집어삼킨 연극이다. LG아트센터가 해마다 5월 올리는 ‘대작 연극’을 통해 화려한 ‘스타 캐스팅’의 선봉에 서고 있다.

이서진은 1999년 데뷔 이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 LG아트센터가 제작한 ‘바냐 삼촌’을 통해서다.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4대 장막극 중 하나인 이 작품에서 그는 교수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지만 자기 삶이 무의미하다는 허탈감에 빠지는 중년의 바냐 역을 맡았다.

이서진이 ‘흔쾌히’ 무대에 선 것은 아니다. 처음엔 안 하겠다고 거절했지만, 마음을 바꾼 건 손상규 연출가의 집요한 설득 때문이었다. 개막 전부터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너무 힘들어 후회하고 있다”고 엄살을 부렸으나, 막이 오르자 관객 반응이 뜨겁다. 이서진의 ‘본캐’를 보는 듯한 생생한 자연스러움 덕에 첫 무대의 어색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말투, 제스처, 표정까지 ‘극사실주의’로 살려낸 이서진의 바냐에 객석에선 희극적 페이소스를 유발한다. 고아성과 함께한 마지막 장면, 소냐의 위로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대목 역시 화제가 되고 있다.

연극 ‘오이디푸스’로 9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최수종 [연합]


최수종은 오는 7월 개막하는 연극 ‘오이디푸스’(7월 4일, 세종문화회관)를 통해 30여 년 만에 본격적인 연극 무대에 선다. 그는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에서 운명과 진실 사이에서 무너지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를 맡았다. 최수종이 연극에 도전하는 것은 2017년 ‘하늘로 가지 못한 선녀씨 이야기’ 이후 10여년 만이다.

최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최수종은 “처음 연습 후 일주일 동안은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그만두고 싶었다”며 “거대한 운명에 맞선 감정선을 표현하는 과정이 정말 복잡하고 힘들어서 ‘징그럽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오랫동안 대하사극을 통해 태조 왕건, 대조영 등 역사적 영웅들을 연기하며 ‘왕 전문 배우’로 불렸다. 하지만 그가 맡은 오이디푸스는 승리하는 영웅이 아니라 몰락하는 인간이다 보니 영광이 아닌 붕괴의 서사를 그려야 한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최수종의 연기 인생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 될 것”이라며 기대했다.

배우 차인표는 올해 한국 초연되는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인공 존 키팅 역을 맡아 무대에 도전한다. 1993년 데뷔한 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출연하는 연극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작품에서 고(故)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바로 그 역할을 맡았다.

키팅은 명문 기숙학교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가르치는 교사다. 성적과 규율, 입시 경쟁 속에 갇힌 학생들에게 자유와 상상력, 삶의 의미를 일깨운다.

차인표는 “배우로 그렇게 오랜 세월 살면서 연극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하기 위해 기다린 것 같다”며 “오랜 세월 삶을 살다 대사를 봤더니 ‘그 말이 맞았구나’ 생각했다. 내가 알게 된 의미들을 젊은 관객에게 전달해 주고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제 대표작이 ‘사랑을 그대 품 안에’였는데, ‘죽은 시인의 사회’로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연기 갈증·날것의 매력…그들이 무대로 나온 이유


저마다의 커리어를 쌓아온 배우들이 무대로 돌아오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2024년 배우 전도연(‘벚꽃동산’), 조승우(‘햄릿’), 2025년 이영애(‘헤다 가블러’) 등 해마다 굵직한 배우들이 무대에 섰다.

공연계 관계자는 “매체 위주로 활동하던 스타 배우들이 연극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LG아트센터, 예술의전당 등에서 탄탄한 제작 지원을 받은 중·대극장 작품들이 나오면서다”라고 했다.

공연계의 한 관계자는 “10여년 전만 해도 배우들이 연극을 하겠다고 하면 소속사에서 돈이 안 되니 말리곤 했다”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대극장 연극이 한두 편씩 나오고 스타 캐스팅이 들어가며 소속사에서 만족할 만한 출연료를 주기에 배우들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작가 겸 배우 차인표가 한국 초연작인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도전한다. [연합]


실제로 과거 연극 무대는 돈은 안 되지만, 탄탄한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컸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투자 규모가 커졌고, 그만큼 보상도 돌아온다. 스타 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은 해마다 그해 최고의 티켓 판매량을 기록한다. 심지어 우리말로 연기를 해도 ‘해외 진출’까지 가능하다. 전도연의 ‘벚꽃동산’은 지난해엔 홍콩에서 막을 올렸고, 올해 9월엔 뉴욕으로 향한다. 이서진·고아성이 출연하는 연극 ‘바냐 삼촌’은 1335석의 LG아트센터 시그니처홀을 3층 객석까지 오픈해 일부 좌석만 남았고, 조성하·심은경이 출연하는 ‘반야 아재’는 1221석 극장이 전석 매진된 상태다.

“여기에 배우라면 누구나 안고 있는 연기 갈증과 도전 욕구도 한몫한다”고 이 관계자는 강조한다. 실제로 무대로 돌아오거나 도전하는 배우들은 저마다 ‘연기 갈증’을 이야기한다. 최수종은 “이순재, 박근형, 신구, 박정자 선생님들이 연극 무대에서 보여주시는 또렷한 발성, 관객들과의 호흡, 전달력, 무대에서의 움직임 등을 보며 참 많이 반성하면서도 또 다른 꿈을 키웠다”며 연극에 대한 오랜 동경에 대해 말했다.

1997년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데뷔한 이종혁은 영화와 드라마를 오갔고 무대에도 꾸준히 서 왔지만, 2인극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오랜만에 자극을 줘 볼까라는 생각했다”며 “2인극인 만큼 많은 대사를 외우는 것은 힘들지만 오랜만에 관객들을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무대에 도전하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힘들다’고 말한다. 연극 무대가 TV·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훈련 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선 반복 촬영이 가능하지만, 무대에선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배우의 모든 것이 날것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고쳐 찍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공연계 관계자들은 “연극을 비롯한 무대 예술은 AI(인공지능)시대에도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장르이자 라이브의 가치를 보여주는 장르라는 점에서 배우들이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실제로 배우들이 말하는 ‘무대의 매력’도 여기에 있다. 배우와 관객의 ‘초밀착 호흡’과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함이다. 이서진은 “연극은 매일 다른 공연이 만들어진다는 점에 실감한다”며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지만, 그러한 부분이 연극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자 묘미”라고 했다.

스타 배우들의 무대행에 그저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이면엔 자본과 관객의 쏠림 현상, 이로 인한 ‘티켓플레이션(티켓+인플레이션)’이 연극계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는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도전이 연극 생태계에 활력을 물어넣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대중에게 친숙한 얼굴이 무대에 서는 것 자체로 연극이라는 장르의 심리적 문턱을 낮추고, 새로운 관객을 유입하는 단비 같은 마중물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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