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작가 찬와이 “인간의 기억, AI 시대에도 유효”

‘기억을 지키다’·‘기억을 태우다’ 국내 출간
홍콩 배경 롄청·쑹윈 부부 등 가족 일대기
“우산혁명은 실패한 혁명…좌절감만 남겨”


찬와이 작가가 23일 서울 중구 스페이스에이드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민음사]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홍콩에서 시위(우산 혁명)가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참여하러 갔다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이 혼자 나오신 모습을 봤습니다. 우산을 지팡이처럼 들고 조용히 걷다가 경찰이 오면 잠깐 서고, 가면 다시 걸으셨습니다. 그분을 보고 롄청(소설 ‘기억을 지키다’의 등장인물)이 오늘날 홍콩의 상황을 맞았으면 어땠을지 떠올려보니, 틀림없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시위에 나갈 것 같았습니다.”

홍콩의 역사와 대중문화를 깊이 있게 풀어내 온 작가 찬와이(陳慧·66)가 ‘2026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영화 ‘첨밀밀’의 각본 기획자이자 홍콩 ‘센트럴 점령 운동’의 최초 지지자 10인 중 한 명이었던 그는 23일 서울 중구 스페이스에이드에서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첫 소설 ‘기억을 지키다’(민음사)와 후속작 ‘기억을 태우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1998년에 홍콩에서 출간된 ‘기억을 지키다’는 1930년대부터 1996년 홍콩 반환 이전까지 약 60년을 배경으로 홍콩의 발전 과정을 그렸다. 창작 단계에서 감정이 안정적이었다”며 “2015~2017년 연재한 ‘기억을 태우다’는 반환, 시위 등 사회적 변동을 다 보고 난 후에 써서 격정적인 감정이 드러난다”고 소개했다.

‘기억을 지키다’는 광저우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터전을 잡은 아버지 롄청과 어머니 쑹윈 부부, 그리고 열 명의 자식이 살아낸 삶의 궤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다유, 샹펑, 싼둬, 쓰하이, 우메이, 류허, 치시, 바바오, 주제, 스샹에 이르는 자식들의 이름에는 쓰하이 스토어, 우메이 패션, 류허 잡화점 등 롄청이 홍콩에서 일군 사업의 흔적이 반영돼 있다.

찬와이는 소설에서 격동의 시대에 혼란과 불안을 겪던 홍콩인들의 상황을 사실감 있게 그린다. 그러면서도 상처 입은 기억이 서로를 통해 다시 온전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후속작 ‘기억을 태우다’는 1997년 반환 이후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롄씨 일가와 주변 인물들의 후일담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홍콩의 현실을 드러낸다. 재개발 등 도시의 물리적 파괴가 인간관계와 삶의 붕괴로 이어지는 비극을 묘사한다.

두 작품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는 ‘향(香)’이다. ‘기억을 지키다’의 원제는 ‘습향기(拾香紀, 향을 줍다)’이고, ‘기억을 태우다’의 원제는 ‘분향기(焚香紀, 향을 태우다)’이다. 향은 홍콩이라는 공간을 상징하는 지표이자, 세월의 격랑 속에서도 끝내 휘발되지 않는 인간 마음의 깊은 향기를 뜻한다.

이와 관련 찬와이는 “(소설 제목이) 주인공인 스샹(습향)과 독음은 같은데 뜻이 다르다”면서 “향은 보이지 않고 지나가면 사라진다. 홍콩도 향기와 같지 않을까 싶었다. 홍콩이 향 생산으로 유명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찬와이 작가. [민음사]


‘우산 혁명’에 적극 참여했던 작가는 “우산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다. 뭔가 얻은 게 있어야 하는데 모두 좌절하고 부정적 감정이 남아 있다”면서 “이후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감정 속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그는 “‘기억을 지키다’가 출간됐을 때와 지금은 여러모로 달라진 것 같다”며 “홍콩이 가장 큰 포용이었는데, 반환된 뒤에는 포용적 부분을 찾을 수 없게 됐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2018년 타이완으로 건너간 작가에게 홍콩은 이제 가기 힘든 고향이 됐다. 아픈 상처지만 외면할 수는 없는 ‘기억’이다. 그는 “전작 ‘작은 폭력’에서 타이완 혁명을 배경으로 다뤘다. 그런데 쓰고 나서 보니 담겨 있는 것은 다 홍콩이었다”며 “다음 장편은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쓸 예정이다. 장소는 바뀌지만 안에는 홍콩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찬와이는 인공지능(AI) 시대에도 기억의 힘은 유효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기억을 지키다’의 마지막 부분에 ‘기억은 사랑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중국어로는 추억에 가깝다. 기억은 객관적 역사지만 추억은 주관적이고, 감정이 담겨 있다. 다른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면서 “AI는 유용한 것만 기억한다. 인간의 추억은 쓸모없지만 사실은 무엇보다 유용한 것이다. AI 사용을 완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고 했다.

“남는 것이 고작 잿더미뿐이라고 해도 그것 또한 내가 지나온 길이니까.”라는 그의 문장은 저마다의 상흔을 간직한 독자들에게 담담한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

찬와이는 한국 독자들에게 “소설을 읽었을 때 그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졌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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