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가?”…양인모·김치앤칩스가 만드는 상태 그 무엇

30일 GS아트센터 개최 기획 공연
양인모·김치앤칩스 콜라보 무대
초연 줄리아 울프의 ‘LAD’ 기대


바이올리닉스트 양인모가 미디어 아티스트 김치앤칩스와 신선한 클래식 무대를 꾸민다. [GS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수려한 선율의 변주, 고조된 갈등이 폭발하는 클라이맥스. 익숙하게 들어온 ‘관습적’ 드라마는 완전히 소거된다. 이제 객석에선 ‘음악을 보고, 빛을 듣는다’.

파가니니와 시벨리우스 콩쿠르를 석권하며 클래식계의 ‘젊은 심장’으로 자리매김한 양인모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직조해 온 미디어 아티스트 김치앤칩스의 만남. 30일 저녁 서울 강남 GS아트센터에선 이 둘을 엮는 참신한 기획으로 새로운 클래식의 문법을 제시한다.

전혀 다른 궤도를 걸어온 이들은 첫 만남부터 서로를 알아봤다. 김치앤칩스는 사실 “결이 다른 두 예술의 결합에 대한 부담이 앞서 제안을 망설였다”고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그 부담을 덜어낸 공신은 바로 양인모였다. 첫 대화부터 이들은 모턴 펠드먼의 음악과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새로운 서사라는 키워드로 대화를 확장했다.

“양인모씨와의 대화는 분명 신나고 재밌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느낌이 있었어요.” (김치앤칩스)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선 ‘협업’의 전제조건을 세웠다. ‘음악적, 시각적 문법’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김치앤칩스는 협업 자체를 “각자에게 익숙한 문법을 버리는 일”로 정의하며 “각자의 것을 내려놓는 방향이 아니라, 각자의 것에 서로의 것을 덧입히는 작업을 했다”고 짚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양인모는 “시간의 흐름과 상태를 하나의 서사로 읽어낼 수 있는 20세기와 동시대의 수많은 작품을 탐구했다“며 “연속성과 다양성을 모두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데엔 용기와 도전 정신이 필요했다”고 되짚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김치앤칩스가 바이올리닉스트 양인모와 신선한 클래식 무대를 꾸민다. [GS아트센터 제공]


서사의 기승전결을 지운 자리엔 시간, 공간, 음악, 공명, 빛이 들어찬다. 여기에 관객까지 하나로 뒤섞이는 ‘상태’ 자체가 하나의 공연으로 응집된다.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작품이 스스로 힘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김치앤칩스는 귀띔했다.

“그 시간, 그 장소, 그 무대, 그 관객들, 빛, 호흡, 떠도는 연기의 입자,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엮이며 우발적인 감정들이 여기저기서 크고 작게 터지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김치앤칩스)

공연에서 빛을 핵심 매체로 선택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김치앤칩스는 “시각과 음악의 협업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지 않도록 고려했다”며 “비물성의 빛이 무대를 구성하는 벽이나 오브제의 물성적 덩어리감을 우아하게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지나치게 많은 물리적 재료를 쓸 경우 짧은 설치 기간으로 인해 빚어질 리스크도 고려했다.

무대는 기존의 클래식 공연의 포맷을 벗어난다. 보통의 공연처럼 1부와 2부, 인터미션 등으로 나누지 않고, 60분간 하나의 응축된 흐름으로 이어간다. 양인모가 고심한 프로그램은 ‘시간’을 축으로 삼아 이어진다. 바흐와 스티브 라이히, 줄리아 울프가 한 무대에서 공명한다.

양인모는 “바흐가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라는 시대적 도그마는 이번 무대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며 “그가 구축한 음악적 패턴과 반복을 특정한 양식이 아닌, ‘시간’이라는 거시적 개념 속에서 온전히 조명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한국 초연되는 현대음악가 줄리아 울프의 ‘LAD’는 특히나 도전적 선택이다. 본래 9대의 백파이프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음압과 지속음(드론 사운드)이 핵심인 이 곡을 양인모는 바이올린 단 한 대의 울림으로 재해석한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GS아트센터]


그는 “수년 전 이 곡을 처음 듣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며 “동시대 음악을 듣고 그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낀 경험은 거의 없다”고 돌아봤다. 양인모는 이번 무대를 위해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라키 싱(Rakhi Singh)의 편곡 버전을 바탕으로 사운드 엔지니어와 함께 음향적 색채를 극도로 세밀하게 다듬었다.

“불협하는 두 음이 서로를 향해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마침내 옥타브에 도달하는 제스처는 일체성에 대한 갈망처럼 들렸어요. 여러 종류의 기타 이펙트 페달을 도입해 소리의 질감을 실험하고, 전자음향의 도움을 받아 원곡의 다성음악(Polyphony) 구조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해 볼 생각이에요.” (양인모)

드라마틱한 기승전결이 없어도 관객을 몰입시킬 만한 ‘연출적 장치’는 충분하다. 김치앤칩스는 “서사의 기승전결을 지우더라도 공연이 품은 요소들의 합주는 그 자체로 스펙타클함을 보여준다”며 “하나의 관통된 메시지를 강요하기보다 시시각각 다르게 지각되는 변주, 반복, 우발성을 빛의 움직임으로 시각화했다”고 귀띔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종착지는 아티스트의 존재마저 지운 ‘상태’의 공유다. 김치앤칩스는 “작품을 시작하는 것은 작가일지라도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작품 스스로가 진화하고 성장하는 것을 목도한다”며 “이번 공연 역시 독립적인 유기체로서 힘을 갖기를 바란다. 그 시간, 그 장소, 무대 위의 호흡과 떠도는 연기의 입자, 그리고 관객이 서로 엮이며 우발적인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하나의 상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시작과 끝이 선형적으로 예측되는 공연이 아니기에, 이들이 마주한 불안과 걱정은 작품을 추동하는 신선한 에너지로 작용한다. 양인모는 이번 공연이 관객에게 “나는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김치앤칩스는 “객석을 채운 천여 명의 관객이 각자의 가슴에 두근거리는 불꽃 하나씩 품고 돌아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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