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63)는 영화 ‘화장’(감독 임권택ㆍ제작 명필름)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섯 살에 아역 배우로 데뷔해 128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가 내놓은 답변치곤 겸손했다. 이후에도 안성기는 ‘화장’이 유독 힘든 작품이었다고 강조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이 남긴 여운이 부담으로 다가온 데다, ‘오상무’라는 인물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었다.
오상무는 갖은 스트레스와 고통에 짓눌린 중년이다. 화장품 회사의 중역으로 성공한 삶을 살지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전립선 비대증의 고통을 안고 지낸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아내를 돌보며, 생기 넘치는 젊은 여직원(김규리 분)을 마음에 품고 번민하기도 한다.
안성기는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화장’을 읽고 이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기면 어떨까 상상했다. 물론 ‘영화를 잘 만들어도 본전이겠다’는 우려도 따라 붙었다. 김훈 작가의 원작이 워낙 섬세하고 수려했기 때문이다. 우연치 않게 명필름이 ‘화장’의 영화화에 나섰고, 임권택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겼다. 자연스럽게 오상무 역은 임 감독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안성기에게 돌아갔다. 임권택과 안성기, 대한민국 대표 감독과 배우로 꼽히는 이들의 만남에 영화 팬들도 들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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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 |
▶‘아내는 뼈만 남은 육신으로 몸부림을 치다가 실신했다.’(김훈의 ‘화장’ 중)=안성기는 ‘화장’을 통해 임권택 감독과 10여년 만에 한 작품에서 재회했다. 그 사이 임 감독의 손엔 필름 카메라 대신 디지털 카메라가 들렸다. 물론 그가 처음 디지털 카메라를 잡은 건 ‘화장’보다 앞선 ‘달빛 길어올리기’(2011)에서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작업 방식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필름 카메라 시절의 완벽주의를 고수했다.
“예전엔 이것저것 다 찍을 수 없으니까 편집해가는 식으로 촬영을 했는데, 감독님은 그런 방식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으셨어요. 더 찍어도 되는데 금세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죠. 예비 컷을 안 찍으니 개인적으로는 더 집중력이 생겨서 좋았어요. 또 감독님은 머릿속에 그려둔 장면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고 있다가, 아침에 촬영장에 오셔서 현장의 상황이나 가구 배치, 소품 등에 맞게 변경을 하세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개는 꽉 짜여진 스토리보드에 익숙해서 약간만 변수가 생겨도 당황하거든요.”
여든 노장 임권택 감독 뿐 아니라, 김호정과 김규리의 연기 열정도 놀라웠다. 특히 김호정은 뇌종양 환자를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해 삭발에 체중 감량은 물론, 전신 노출까지 감행했다. 안성기는 “김규리, 김호정 두 배우 모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대단했다”며 “김호정은 남들 밥 먹을 때 못 먹고 미안할 정도로 고생했다. 여성이 삭발하는 것도 쉽지 않고, 아름다움 대신 마르고 죽어가는 역할을 선택한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치켜 세웠다.
▶‘당신께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거친 액션이나 파격적인 분장보다 심리적인 중압감이 배우에겐 더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안성기에게 ‘화장’은 손에 꼽을 만큼 힘든 작품이었다. 다소 무겁고 먹먹한 영화다보니 촬영장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안성기 역시 오상무에 몰입한 상태를 이어가다 보니 의기소침해졌다. 게다가 병원과 장례식장 등 촬영 장소가 부산에 있어, 숙소와 촬영장을 오가는 일상을 반복하며 기분을 전환할 기회도 없었다.
“코미디 영화를 한 편 찍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영화에 빠져 지냈어요. 오상무의 심리가 단선적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여러가지 일이 얽혀 있어서 눈빛도 맑지 않고 복잡해요. 직장에선 스트레스를 받고, 전립선 비대증까지 앓고,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와중에 부하 직원에 대한 사랑까지 싹트면서 굉장히 복잡한 심리 상태잖아요. 자칫 잘못해서 몰입이 깨질까봐 조심스러웠어요.”
그렇게 감독과 배우들이 역량을 쥐어짜내 탄생한 ‘화장’은 공개되자마자 해외 유수 영화제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베니스 국제영화제와 토론토 국제영화제, 밴쿠버 국제영화제 등 내로라 하는 영화 축제에 잇따라 초청 받았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도 초청돼 상영을 마쳤다.
그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주시는데 정말 진심이 담긴 뜨거운 박수였다. 감독님과 배우들 모두 뭉클해졌다”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화장’은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그 나이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고민을 얘기했다고 생각한다”고 뿌듯한 마음을 드러냈다.
물론 국내 반응도 좋다. 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언론 매체들의 호평도 이끌어냈다. 이제 극장 관객들의 평가 만을 남겨두고 있다. “다른 영화에 비해 유독 (개봉 결과가) 궁금하다”는 안성기는 “일단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다. 흥행은 우리의 몫은 아니다. 영화가 탄탄하고 좋으면, 관객들이 외면하지 않고 찾아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어째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그토록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요.’=안방극장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중견 배우는 많지만, 안성기처럼 영화 ‘외길인생’을 걷는 배우는 드물다. 그는 영화 외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고, 굳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털어놨다. ‘빨리 빨리’ 찍는 것을 싫어하는 그에게 TV 드라마 촬영장은 감히 엄두가 안 나는 공간이었다. 대신 안성기는 영화 현장을 즐겼고, 한 우물을 파온 것에 만족했다. 다만 연기에 있어서는 여전히 부족함과 갈증을 느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의 약점은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죠. 늘 연기에 부족함을 느끼고 배우는 과정은 끝이 없다고 생각해요. 연기자로 살면서 매사가 선택의 연속인데, 너무 결정할 것이 많다 보면 남의 떡이 커 보이기도 하고 그래요.”
영화계 고참이 되다보니 후배들이 그에게 바라는 역할도 많아졌다. 각종 영화제의 심사위원부터 영화계 질서를 위한 각종 캠페인 참여, 최근엔 부산 국제영화제의 독립성과 관련해 그의 발언을 기대하는 눈들이 많았다. 사실 안성기는 영화 외 분야에 관여하는 것은 철저하게 단절했지만, 영화와 관련된 이슈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그의 청춘과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현장이기에, 한국 영화계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60여 년은 안성기에게 연기자보다는 영화인으로 보낸 시간이었다.
“사실 기억이란 게 그렇게 긴 것은 아니잖아요. 한 세대가 지나면 대중에게 제 존재도 잊혀지겠죠. 살아가는 동안 열심히 살고,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영화를 통해 즐겁고 행복한 시간, 많은 것을 느끼는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요. 그 다음까지 기억해 달라는 건 욕심이겠죠.(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