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 재해석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모두가 시저를 향해 칼을 겨눴다. ‘공화정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계획된 ‘시저 암살’의 시간.
‘전쟁 영웅’으로 로마 시민의 절대적 지지와 신임을 받아온 시저를 ‘공화정 체제를 위협, 왕이 되려는 잠재적 독재자’로 본 원로원의 결단이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시저를 둘러싸는 사람들.
“누가 시저의 마지막 숨을 거둘 것인가.” 시저는 죽을 때까지 죽지 않았다. 집단 환각에 빠진 암살 파티를 목도하며 손을 떠는 친구 브루터스(유승호)에게 시저(손호준)는 “나의 숨을 거두게 하는 영광은 네게 주겠다”며 칼을 건넨다.
셰익스피어가 쓴 명대사 ‘브루터스, 너마저’는 사라졌다. ‘정계의 슈퍼스타’ 시저는 최후의 순간, 인간의 무력함 대신 자기 죽음마저 통제하는 ‘주체자’로서 마지막을 맞는다. 시저가 자신의 권력을 유산으로 남기고, 또 다른 시저를 낳게 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연극 ‘킬링 시저’의 한 장면. 극본을 쓴 오세혁 작가는 “그 뒤로 펼쳐질 이야기가 많다”고 귀띔했다. ‘줄리어스 시저’는 시저가 암살 당하기 전의 이야기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나 ‘킬링 시저’는 암살 순간과 이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줄리어스 시저’가 연극 ‘킬링 시저’(5월 10일 개막,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로 다시 태어났다. 배우 손호준 유승호가 시저와 브루터스로 호흡을 맞춘다. 시공을 넘나들며 공명해 온 이 정치극은 공교롭게도 계엄과 탄핵, 이후 대선까지 앞둔 대한민국의 어수선한 정치 상황에서 막을 올린다.
개막을 앞두고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난 김정 연출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로마의 이야기를 지금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킬링 시저’는 고대 로마 시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영어 명칭 ‘줄리어스 시저’) 암살 계획을 세운 권력자들의 암투를 담아낸 정치극이다. “추락하는 인간이 죽기 직전까지도 버티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의 가능성이 될 수 있겠다는 연출가의 생각은 고전 재해석의 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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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호가 부르터스로 출연하는 연극 ‘킬링, 시저’ [토브씨어터컴퍼니 제공] |
‘줄리어스 시저’를 ‘킬링 시저’로 재창작한 오세혁 작가는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고 하는 자, 권력을 무너뜨려 더 올바른 권력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의 싸움을 생각했다”며 “저마다 정의와 자유를 외치나 각자가 생각한 정의와 자유가 달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오는 구호 속에 과연 국민이 있는지 ‘킬링 시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극엔 지난해 ‘엔젤스 인 아메리카’로 첫 무대에 도전한 배우 유승호를 비롯해 같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손호준, 양지원(카시우스, 안토니우스 역)이 출연한다. 배우 김준원도 손호준과 시저 역에 더블 캐스팅됐다.
애초 이 연극의 탄생엔 세 배우 조합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로 친분이 두터워진 세 배우 유승호 손호준 양지원의 뜨거운 연기 갈망이 오세혁 작가에게로 향했다.
오 작가는 “2년 전 장장 5시간 30분에 달하는 김정 연출의 ‘이 불안한 집’을 보고 너무나 압도당해 7년 만에 연락하게 됐다”며 “며칠 후 만나 언제 한 번 ‘뜨거운 연극’을 해보자고 한 뒤 1년 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지원 배우가 ‘뜨거운 배우 3명이 모여 진짜 뜨거운 연극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와 김정 연출에게 연락해 ‘뜨거운 배우들이 있는데 같이 한번 해보자’해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이 과정 자체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돌아봤다.
유승호의 두 번째 연극 도전은 시기상으로 빠른 편이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마친 것이 지난해 10월. 첫 연극 이후 스스로 “너무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던 유승호는 “그땐 많이 부족했다. 무대 공포증이 심했고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자체가 저한테 큰 도전이라 어려운 것들 투성이었다”라고 돌아봤다. 연극을 마치고 인터뷰로 만났던 유승호는 당시 바로 무대에 도전할 의사를 보이진 않았다.
유승호는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함께했던 배우들이 제게 ‘언젠가는 다시 연극 무대에 오르고 싶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기적인 마음일 수 있지만 정말 그런 순간이 왔다”며 “제가 아직도 왜 몸이 움직이는지는 모르겠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제 안에 도전하고 싶은 것, 깨고 싶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음이 잘 맞는 형들과 내게 기회가 왔을 때 도전하고 싶었다. 늘 하던 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며 “닥치는 대로 몰라도 하려고 하며 모든 배우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 그게 부디 무대 위에서 잘 발현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했다.
양지원은 정치적 야망과 공화국 수호의 명분 안에서 갈등하는 카시우스와 안토니우스를 연기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노력할 때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며 “정의를 부르짖는 브루터스를 시험해 보려고 찾아온 메피스토펠레스(괴테 ‘파우스트’)처럼 악을 담당하는 존재로 생각하며 연기하고 있다. 그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인물로 해석하고 있다”고 했다.
김준원은 자신이 연기하는 시저에 대해 “절대권력 또는 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며 “초반부에 죽고 나서 ‘옥타비아누스 시저’라는 인물로 부활하게 되는데, 부활한 옥타비아누스는 불멸하는 권력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했다.
‘킬링 시저’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완전히 재창작해 새롭게 내놨다. 기존의 익숙한 대사는 사라졌고, 익숙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세혁 작가는 “원작 ‘줄리어스 시저’라는 씨앗을 두고 많이 고민했다. 원작에서 우리가 가장 기다리는 순간은 시저가 암살당하는 순간, 암살자들의 운명이 변하는 순간”이라며 “암살자들이 어떤 악몽과 운명 속에서 갈등하고 이전투구를 벌이는지 자료와 상상력을 통해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권력의 ‘아귀다툼’을 보여줄 ‘킬링 시저’가 관객과 만나는 시기가 공교롭다. 대선 전에 무대에 올라 대선 이후까지 이어간다. 기획 단계에선 예상치 못한 일이다.
김정 연출가는 “이 연극은 기본적으로 정치극이다. 정치의 본질적 의미는 나를 희생하는 것, 내가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닌 내 이웃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모든 수많은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이 작품은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를 다루지만 사실 자기 자신을 바치는 행위라고도 생각한다. 모든 걸 바쳐 사회의 자유에 다가선다는 의미가 진정성 있게 읽히길 바란다. 이를 전달하기 위해 유머를 덜고 묵직하게 걸어가고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