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도 조사해라” vs “트럼프 절친 맞잖아”…엡스타인 두고 서로 “타격” 우기는 미 정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4일(현지시간)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로 향하는 에어포스원에서 엡스타인 문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조용히 해, 이 돼지야(Quiet, quiet. Piggy)”라며 발끈하고 있다.[CNN 뉴스 캡처]

[헤럴드경제=도현정 기자]억만장자 금융인에서 미성년 성착취 범죄자로 전락해 스스로 삶을 등진 제프리 엡스타인의 e-메일 문건이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하원, 상원을 급속도로 통과해 자신 앞에 온 엡스타인 문건 공개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대통령 서명으로 발효된 법은 30일 이내로 문건을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미 법무부는 피해자의 신원 등 민감한 개인정보는 제외하고 문건을 공개하기 위해 준비 작업을 진행중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엡스타인 문건 공개 요구는 민주당의 ‘사기극(hoax)’이라며 공화당이 이 법안에 찬성하면 안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습니다. 문건공개를 주장한 마조리 테일러 그린 하원의원을 “배신자”로 규정하며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정도였습니다. 테일러 그린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였음에도 말이죠.

2000년 2월 플로리다 마러라고 클럽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부터)과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 제프리 엡스타인과 그의 여자친구이자 성범죄 공범인 길레인 맥스웰이 포즈를 취했다.[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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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iz.heraldcorp.com/article/10547530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엡스타인에 대한 언급을 싫어했는지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주말을 보내기 위해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로 향하는 에어포스원(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벌어진 기자들과의 논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엡스타인 물건 공개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와 수년 전부터 관계를 끊었다고 답하다가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되자 “조용, 조용히 해. 이 돼지야(Quiet, quiet. Piggy)”라며 발끈했습니다. 여러 방송사 카메라들이 이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화를 주체할 수 없는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문건 공개를 막아보려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6일 돌연 입장을 바꿨습니다. 사회관계망(SNS)에 공화당 의원들에게 문건 공개 표결에 찬성하라 독려하는 글을 올린 것입니다. 자신은 거리낄 것이 없으니 문건을 공개해도 상관없다는게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이미 여론은 기울었고, 대통령 한 사람이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사안이 흘러가자 트럼프는 주특기인 여론전으로 역공을 꾀하는 모습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엡스타인 문건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학교 총장 등을 거론하며 민주당 인사들이 대거 연루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무부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엡스타인의 범죄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조사하라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법안 서명 직후에도 SNS에 “민주당 사람들의 진실 및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관계가 곧 드러날 것”이라 게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 리드 호프먼 페이팔 창업자,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체이스 회장 등 민주당 측 인사들이 엡스타인의 성범죄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래리 서머스 전 총장은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냈습니다.

그는 이미 공개된 문건에서 엡스타인의 문란한 생활을 알고 상당부분 이에 동조했던데다, 자신의 불륜도 엡스타인에게 상담한 일이 드러나 오픈AI 사외이사 등 모든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페이팔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연쇄 창업을 해 일명 ‘페이팔 마피아’라 불리는 리드 호프먼은 민주당 지지 성향인데다 대표적인 반(反) 트럼프 인사입니다. 지난 대선 당시 트럼프는 막아야 한다며 경선 경쟁자였던 니키 헤일리 전 주 UN 대사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할 정도였습니다.

호프먼은 트럼프가 자신을 엡스타인과 엮어 공격하자 엑스(옛 트위터)에 “트럼프와 그의 중상모략에 무릎 꿇지 않을 것”이라 게시했습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체이스 회장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인사여서 트럼프의 눈 밖에 난 상황입니다.

지난 9월 미국 민주당이 공개한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간 편지.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제프리 엡스타인에게 여성의 나체 윤곽을 배경으로 하고, 의도적으로 하체 부위에 서명을 한 편지를 보냈다며 이를 공개했다. 트럼프는 이에 대해 자신은 이 같은 편지를 쓰지 않았다며 반발했다. [미 하원 감독위원회 엑스 계정]

민주당은 여유있는 모습입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타인의 친분은 이미 예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고, 최근 일부 공개된 문건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엡스타인의 성범죄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성범죄 피해로 고통스러워하다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한 여성과 트럼프 대통령이 엡스타인의 집에서 몇 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는 내용도 공개됐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엡스타인 e-메일 2324건을 분석한 결과 1670건에서 트럼프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보도했습니다. 문건 중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된 것이 절반이 넘는다는 겁니다.

사망한지 6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떠들썩한 엡스타인 스캔들을 보면 세상일이 참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초반에 엡스타인 스캔들로 ‘재미를 본’ 인물이 다름아닌 트럼프 대통령이거든요.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엡스타인의 자살이 석연치 않다고 의혹을 제기하며, 엡스타인과 친밀했던 민주당 좌파들과 이를 은폐하는 이들을 폭로하겠다 주장해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줄임말로, 극우 보수 진영을 일컫는 말) 세력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엡스타인과 가까웠던 민주당 측 유력 인사들이 본인의 범죄 연루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엡스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의혹을 흘리며 지지세력 결집 계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엡스타인 문건을 모두 공개하라는 요구는 이때부터 나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잠잠했던 이슈가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은 트럼프와 반목과 화해를 반복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폭로가 계기가 됐습니다. 머스크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때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맡았다가 지난 6월 물러나면서 “트럼프가 엡스타인 파일에 이름이 있다.

그게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은 진짜 이유”라 주장했습니다. 팸 본디 법무장관이 한달 후인 지난 7월 “‘엡스타인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고, 그의 죽음도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 재확인했지만 그때부터 문건을 모두 공개하라는 요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엡스타인을 두고 ‘음모론’으로 재미를 봤던 트럼프 대통령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진 의혹을 감당하지 못해 곤혹스러워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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