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안전’에 발목…“모듈단위 검사 방식 도입해야”

‘배터리 생태계’ 시장창출단계부터 가시밭길
‘거래 못하게 하는 안전’ 시장 실종 주요원인
BMS 기반 이력관리·보험 기준 표준화 절실


한 기술자가 전기차량 배터리 팩에서 배터리 모듈을 분해해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



정부가 핵심광물 재자원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선 배터리 재사용 시장이 수거 단계에서부터 막히며 수출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시장 실종’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전 중심으로 설계된 현재의 규제가 사업화 비용과 체계 구축 시간을 더디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배터리 재사용 생태계가 활성화 되지도 하지 못한 채 고사할 것이라 우려도 여전히 나온다. 특히 ‘인증 문턱’은 산업의 경제성을 낮추는 주요 원인으로 비판받는다.

배터리 ‘2차 시장’은 크게 재사용 시장과 재활용 시장 두가지로 구분된다. 전기차 등에서 사용된 배터리를 회수한 뒤 잔존 성능을 평가해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에 재사용하는 시장(재사용)이 한 축이고, 또다른 하나는 배터리를 분해해 리튬이나 니켈·코발트 등 핵심광물을 다시 쓰는 산업을 재활용 시장이라고 구분한다.

업계에선 재사용 시장이 적용처에 따라 고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지만, 안전성검사·책임보험 등 제도 요건을 충족해야 해 사업화 문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활용은 폐배터리·스크랩·블랙매스 등 투입물 단계에서 폐기물 규제, 수입·통관 기준, 인허가 요건이 사업 속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평가가 있다.

국내에선 재사용 단계에서 안전 기준이 지나치게 ‘시험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사업화 속도를 떨어뜨리고 비용 부담을 키웠다는 평가가 많다. 업계 관계자는 “안전을 강조하는 건 당연하지만, 제도가 ‘거래 가능한 안전’이 아니라 ‘거래를 못하게 하는 안전’으로 작동한다”며 “그 여파가 수거부터 금융, 수출까지 전 구간에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수거다. 배터리 재사용 산업이 활성화되려면 일정 물량을 장기적으로 확보해 라인을 가동하고 원가를 낮춰야 한다. 그러나 인증 절차가 길고 불확실성이 크면, 재사용 기업은 수거 계약을 공격적으로 맺기 어렵다. 배터리를 보유한 주체들 역시 재사용 시장에 배터리를 파는 것을 꺼리게 된다. 한 재사용 기업 관계자는 “수거를 늘려도 ‘팔 수 있는지’가 불확실하면 재고 리스크가 된다”며 “결국 시장 물량이 얇아지고 재활용으로만 쏠리게 된다”고 했다.

이력 관리와 등급(그레이딩) 체계의 부재도 난관이다. 해외 주요국은 배터리관리시스템(BMS) 데이터와 비파괴 진단 등을 활용해 잔존 성능을 분류하고, 용도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방식으로 거래 신뢰를 만든다. BMS 데이터 기반 이력관리와 등급화 표준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물리적인 검사를 통과해야 유통이 가능하다. 배터리이력관리 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고 말했다.

보험과 금융은 ‘시장 실종’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으로 꼽힌다. 재사용 배터리 기반 ESS는 설치 이후 운영 리스크를 관리할 보험 가입이 필수적이고, 금융 대출 역시 담보와 책임 구조가 명확해야 가능해진다. 그러나 인증이 ‘제품 단위 시험’에만 집중될수록,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이 제조사에게 있는지 진단기관에게 있는지, 설치기관에게 있는지 등이 불분명한 채로 남는 경우가 많다. 한 ESS 업계 관계자는 “책임 배분이 정리되지 않으면 보험이 보수적으로 변하고, 보험이 없으면 금융도 따라오지 않는다”며 “결국 사업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출도 같은 이유로 막힌다. 통상 해외 바이어는 잔존 성능 평가 방식과 데이터, 안전관리 프로세스, 사고 책임 구조를 함께 요구한다. 국내에 공인 등급 체계와 표준 문서가 부족하면,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거래를 성사시키기가 어렵다. 무역업계 관계자는 “해외는 ‘어떤 기준으로 분류했나’와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나’를 먼저 묻는다”며 “국내 기준이 시험 중심으로 고착되면 오히려 국제 거래에서 활용 가능한 패키지(데이터·등급·책임)가 약해진다”고 전했다.

업계에선 안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시장을 구축하기 위해선 전반적인 ‘규제의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모듈·팩 단위 평가와 비파괴 진단을 확대하고, BMS 기반 이력관리와 공인 그레이딩 기준이 배터리 제작단계에서부터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또 책임 배분과 보험 인수 기준이 표준화 돼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인증기관 확충과 인증 처리 기간 단축도 해결돼야 할 대목이라고 했다.

정부 역시 사용후 배터리 통합 관리체계와 제도 개선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다만 현장에서는 “안전을 강조하는 정책 기조가 ‘시장 형성’과 함께 설계되지 않으면, 수거부터 수출까지 연결되는 배터리 2차 시장은 성립키 어렵다”는 우려가 크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 없이 규제만 있으면, 안전도 관리되지 않는다”며 “거래가 반복되는 시장을 만들어야 안전 기준도 현실에서 작동한다”고 말했다.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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