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수계 도량부터 등신불까지”…남종선 초조 광동성 혜능조사 [정용식의 사찰 기행]

(106) 중국 광동성 남화선사, 광효사


한국 불교 뿌리를 찾아서(4)

중국 광동성 남화선사 천왕보전 앞 가사와 발우를 본뜬 청동 모형상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신라 승려 원효가 서해 가까이 충청남도 어딘가의 동굴에서 잠결에 해골 물을 맛있게 마셨으나, 잠이 깬 후 썩은 물이었음을 알고 깨달음을 얻어서 했던 말이라고 한다.

신라 육두품 출신 원효(617~686년)는 진골 출신 의상과 함께 661년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했다.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며 주변의 눈초리나 시선을 무시하고 파격적인 행보로 속세에 섞여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에게 대중 교화를 했다.

“마음이 생기면 가지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가지가지의 법이 멸한다.”

이같이 말한 원효대사는 어찌 보면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고 자기 마음에서 부처를 보라”며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가 깨달을 수 있다는 파격적 가르침을 펼친 중국의 6조 혜능대사를 연상케 한다.

남화선사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시기가 중국 선종의 법맥이 5조 홍인에서 혜능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며 도의선사가 중국에서 선종을 들여왔다는 784년에 비해서도 120여년이 빠른 시기였다.

달마 대사의 ‘한 송이의 꽃에서 다섯 꽃잎이 나니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리라’(一花五葉)는 예언대로 (한송이 꽃) ‘달마’에게서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 등 다섯 꽃잎이 피어난 것이다.

마침내 6조 혜능조사에 이르러 남종선이라는 열매를 맺어 한국, 일본 등으로 전파됐다.

경남 하동 쌍계사의 창건 설화엔 통일신라 723년에 삼법, 대비 두 스님이 (황금) 2만금을 주고 중국 선종의 6대조인 혜능조사의 정상(머리)을 가져와 봉안하고 작은 움막을 세운 것이 시초라고 기록한다.

한국 선종(조계종)의 뿌리는 6조 혜능대사와 맞닿아 있음을 의미하며 진실 여부를 떠나 중국 조계산 남화선사엔 두상을 포함한 혜능의 진신(등신불)이 모셔져 있었다.

남종선의 창시자 제6조 혜능조사(惠能, 638~713년)


남화선사 천왕보전 가는 길


내가 서쪽으로 떠난 지 200년 뒤에는 이 금란가사를 종지로 삼은 일은 그치게 될 것이며 자연 불법은 항하의 모래알처럼 세계를 두루하여 가만히 도를 깨닫는 사람들이 천만을 넘으리니…

달마대사 (최인호 ‘길 없는 길’ 2권 61쪽)

달마가 죽어 서역으로 떠난 지 200년 뒤, 6조 혜능조사가 출연한 이후부터는 금란가사를 신표로 전하는 일이 없게 됐다.

남화선사 천왕전 앞마당에는 금색으로 두른 커다란 발우와 가사를 청동으로 만들어, 여기가 금란가사의 마지막 종착지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남화선사 천왕보전 앞 가사와 발우를 본뜬 청동 모형상


선종의 6대 조사이며 남종선의 초조인 혜능조사는 ‘본래 청정한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며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했고, 선종사상의 정수를 담은 ‘육조단경’을 남겼다.

육조단경은 혜능의 행적과 설법, 문답을 제자가 정리한 것으로 핵심은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고 자기마음(본성)에서 부처를 보라”는 것이다.

오랑캐 땅이라 불리던 남쪽 고장에서 태어나 글조차 배우지 않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나무꾼 혜능은 어느 날 나무를 팔고 집으로 가던 중 주막집에서 한 손님이 암송하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출가하기로 결심한다.

황매현까지 홍인조사를 찾아간 혜능은 “사람들이야 북쪽 사람 남쪽 사람이 있겠지만, 부처의 성품이 어찌 남북의 구별이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수많은 제자의 눈 때문에 5조 홍인조사는 혜능을 8개월간 방앗간에서 방아만 찧게 했다.

홍인의 수제자였던 신수(606~706년)를 제치고 혜능이 먼저 깨달음을 얻었으나, 1년도 되지 않은 행자 생활과 배움이 짧아 사람들의 시기를 살까 염려한 홍인은 23세 혜능에게 몰래 의발을 전수하고 6조로인가하며 남쪽에 피해 있으라 당부했다.

혜능대사 추모 전시 기념관


혜능은 영남지방에서 15년간 사냥꾼 틈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광효사에 도착해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1000여명이 넘는 홍인의 제자들은 부처의 금란가사가 무식쟁이 행자승에게 넘어가 오랑캐 소굴인 남쪽 지방으로 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 의발을 빼앗기 위해 혜능의 뒤를 쫓은 것이었다.

혜능조사는 남쪽(광동성) 조계산에 남화사를 중창하고 “인간은 도를 닦아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깨달은 성품이므로 이를 단박에 알아차리면 된다”는 ‘돈오법문’을 열어 36년간 제자들을 지도했다.

남종선의 돈오사상이 출발하게 된 것이다. 혜능조사가 주창한 ‘돈오선’은 신분, 지식과 무관하게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설법해 선종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신라 말 중국에 건너간 많은 스님이 혜능조사의 남종선을 체득하고 돌아와 ‘구산산문’을 개창해 한국 선불교의 출발이 됐고, 지금의 한국 불교 대부분의 뿌리가 됐다.

남화사 앞마을에는 조(曹)씨가 많이 살아 개울 이름이 조계(曹溪)였고 뒷산 이름도 조계산인데 ‘조계’는 혜능조사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고 우리나라 조계종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광동성 신흥현 고향 생가터에 자신이 창건한 국은사에서 713년 혜능조사는 입멸했으나 시신은 남화사로 옮겨 진신 육신상을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

혜능조사의 진신이 모셔진 광동성 조계산 남화선사


남화선사 연못다리


중국 선종의 중심 도량 ‘남화선사’는 502년 인고 고승 지략삼장법사가 창건해 황제(양무제)가 ‘보림사’라 이름 지었는데 송나라 태조가 남화선사로 개칭했다.

광동성 소관시 조계산 언덕에 있으며 1500년 역사와 전통으로 남북조시대에 조성된 불상을 비롯해 북송,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의 국보급 유물들이 산재해 있는 큰절로서 많은 순례객들이 찾고 있다.

남화선사 산문. 조계(曹溪)라는 현판과 ‘칙사(勅賜) 남화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산문에는 조계(曹溪)라는 현판과 왕이 이름을 지어줬기 때문인 듯 ‘칙사(勅賜)남화선사’라는 현판이 위아래로 걸려 있다.

남화선사 산문. 조계(曹溪)라는 현판과 ‘칙사(勅賜) 남화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산문을 들어서니 혜능조사가 심었다는 1400여년 된 나무는 잎사귀 몇 개만으로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해자(垓字) 같은 느낌의 연못 다리를 건너 일주문 역할 하는 ‘보림도장’를 지나니 넓은 마당과 함께 본격적인 사찰 경내이다.

보림도장


포대화상과 사천왕을 모신 ‘천왕보전’ 앞에 가사와 발우를 본뜬 대형 청동 모형 상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천왕보전 앞 가사와 발우를 본뜬 청동 모형 상


대웅보전에는 삼세불과 함께 특이하게 좌우 벽면에 수많은 나한, 선지식인들이 화려한 색상으로 조각돼 있다.

남화선사 대웅보전


뒤편에는 관세음보살이 변신하는 여러 모습도 있어 무척 아름답고 웅장해 보인다.

남화선사 대웅보전 삼세불


대웅전 뒤편 마당에는 1338년에 제작되었다는 ‘천승과’(천명의 스님이 공양)라는 큰솥이 옛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대웅전 뒤편 마당의 큰솥인 ‘천승과’(천명의 스님이 공양)


현재도 남화선사엔 200여명의 스님이 상주한다고 한다.

남화선사 조사전


조사전(육조전)에는 혜능조사를 중앙으로 해서 명나라 단전화상과 감산덕천화상의 진신상을 좌우에 있다.

조사전 혜능조사(가운데)와 단전화상(왼쪽), 감산덕천화상 등신불.


모든 등신불이 옻칠하고 향을 발라 검은색을 띠고 있다.

탁석천


남화선사에 물이 부족해지자 혜능조사가 지팡이로 땅을 치니 물이 솟았다는 ‘탁석천’은 넓고 깔끔하게 관광지로 꾸몄는데 한쪽 벽에는 육조단경을 새겨뒀다.

탁석천


‘탁석천’ 자리는 조계산의 아홉 마리의 용이 모인 곳이라 해서 ‘구룡천’이라고도 한다.

남화선사 영조탑


뒷마당 중심에 예전에 혜능의 진신을 모셨다고 하는 8각 5층 전탑인 ‘영조탑’이 있어 함께 탑돌이를 하고 육조전 앞에서 예불을 드렸다.

혜능대사 추모 전시 기념관 벽에 새겨진 글 ‘각조’(覺照)와 남화선사를 방문한 정용식 ㈜헤럴드 상무


혜능대사 추모 전시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노란 벽에 각조(覺照, 깨달음을 비추다)란 제목과 “세상을 떠나 불법을 찾는 것은 토끼에게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글 앞에서 자세를 취해봤다.

혜능대사의 삭발 수계처 광동성 광효사


광효사 입구


광쩌우시(廣州市)가 생기기 이전인 남북조시대(397~420년) 인도 스님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달마대사와 6조 혜능조사도 머물렀던 오래된 사찰 광효사는 영남불교의 총본산으로 불린다.

광효사 대웅전


천왕문(중국 사찰은 포대화상이 천왕문의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을 지나면 너른 마당 앞에 대웅보전이 있다.

그 뒤편에 혜능조사가 뒤늦게 삭발하고 계를 받았던 현장이 있다.

광효사 보리수


홍인조사로부터 6조로 인정받았지만 15년을 숨어 지내다 뒤늦게 이곳에서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광효사 보리수 아래


혜능조사가 삭발하였던 곳은 일찍이 지략삼장이 중국으로 올 때 인도에서 가져온 최초의 보리수 나무 아래였다.

삼장법사는 혜능의 삭발계를 예견한 듯 “170년 이후에 이 나무 아래서 육신보살이 계를 받고 최상승의 법을 설하여 무량한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혜능조사의 머리카락을 모신 예발탑


삼장법사가 심었던 최초 보리수는 죽고 재이식한 손자 보리수가 아름다운 자태를 들어내고 그 옆에는 혜능조사의 삭발한 머리카락을 모신 8각 7층 전탑이 있다.

광효사가 삭발 수계 도량임을 상징하는 ‘의발탑(依發塔) 또는 예발탑’이라는데 탑이 날씬하고 조형미가 돋보인다.

광효사 대웅전


특이하게 광효사 대웅전 지붕 기와가 황금색이고, 지붕 끝에는 용머리가 얹혀 있다.

이는 황제가 현판을 써서 하사한 황제 사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효사 대웅전 법당


또 절에서 향을 피우지 않고 꽃으로 공양하는데 장미를 송이당 3원(한화 약 650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광효사는 향을 피우지 않고 꽃을 공양한다


꽃 공양 때문인지 사찰이 깔끔하게 보이고 광저우 시내 중심의 관광 사찰임에도 번잡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광효사 무우수 나무


사찰 곳곳의 줄기가 뿌리가 되어 퍼지는 커다란 용나무들로 인해 이국적 분위기와 룸비니동산에서 마하 부인이 석가모니를 출산할 때 잡았다는 ‘근심이 없는 나무’ 무우수(無憂樹)나무가 노란 꽃을 피우고 있어 감동이었다.

광효사 무우수 나무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만나기 위해 광동성으로 입국 후 기거하며 발우를 씻었다는 ‘세발천(우물)’도 한쪽에 보존하고 있었다.

한국불교의 뿌리 남종선(南宗禪)


남화선사 전경


5조 홍인조사 밑에서 ‘참선하는 법(禪法)’의 차이 때문에 두 갈래의 뿌리가 나왔다. 수제자 신수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선은 깨달음의 방법을 ‘점진적인 수행(점오, 漸悟)’에 뒀고, 6조로 인가받은 혜능조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종선은 ‘한순간의 깨달음(돈오, 頓悟)’을 중시했다.

‘북종선’은 수도 낙양 등 대륙 북부에서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아 초기에는 영역을 확장했으나 빨리 쇠퇴했다.

‘남종선’은 양자강 남쪽 강남(江南)에서 활동하며 남악회양(懷讓, 677~ 744년), 청원행사(行思, ?~740년), 하택신회(神會, 685~760년) 등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되면서 교세를 확장해 중국 선종의 주류가 됐다.

혜능조사의 남종선은 위앙종·임제종·조동종·운문종·법안종 등 선가 5종(禪家五宗)으로 분화 발전하면서 ‘한 꽃에서 다섯 봉우리가 형성되었다’는 달마의 ‘일화오엽’이 여기에도 빗대어지기도 한다.

남종선이 한반도 등으로 전파되면서 남종선 초조인 육조 혜능조사는 선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사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조계종 뿐만아니라 한국 불교의 뿌리가 됐다.

전남 순천시 선암사 만세루.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한국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순천 조계산 선암사에 입구 석주엔 방출조계 일파청(放出曹溪 一派淸) 벽개남악 천봉수(劈開南岳 千峯秀)란 글이 새겨져 있다.

내용인즉슨 “조계 혜능(6조)이 나타나자 온 물결이 맑게 되었고, 남악회양(7조) 스님이 등장하자 일천봉우리가 빼어나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선암사의 뒷산도 혜능대사의 조계를 옮겼고 만세루에도 6조 혜능의 전법을 계승한 절이라고 해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현판이 붙어있기도 한다. 한문 조(朝)는 현판을 쓴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김익겸)가 조(祖)를 착각한 듯하다.

이제 혜능의 제자 회양이 있었던 남악 형산으로 중국 선종 마지막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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