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도시서 3만명 못 채우면 우스워”…‘구순’ 신구의 무대 열정

신구·박근형 ‘베니스의 상인’
오는 7월 8일부터 국립극장
“귀 안 들려도 무대는 내 삶”


배우 박근형(왼쪽)과 신구.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귀가 잘 안 들리고 몸이 뜻대로 안 됩니다. 세월을 이길 수는 없죠. 그래도 아직 힘이 남아 있습니다.”

구순의 신구, 팔순의 박근형에게 “무대는 곧 삶”이었다. 후배 박근형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 신구(90)는 ‘시간의 흐름’을 담담히 인정하면서도, 무대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집념을 꺼내 보였다.

2023~2025년 전국 139회 공연을 매진시킨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노장 배우가 다시 한 무대에 선다. 이번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 오는 7월 8일부터 8월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000석 무대를, 두 배우 모두 전 회차 원캐스트로 채운다.

신구는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놀(NOL) 서경스퀘어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공연 기간 만석을 만들려면 3만명이 와야 한다. 서울시가 1000만 도시인데 3만 명 동원 안 되는 건 우스운 일 아니냐”며 의욕적으로 말했다.

구순의 배우는 올해 들어 강행군의 연속이다. 장진 감독의 ‘불란서 금고’ 무대를 지키며 차기작 연습을 병행하고 있다. 그는 “나이 드니까 내 몸이 내 뜻대로 안 되지만, 아직 남은 힘을 동력 삼아 연극을 하고 있다”며 “연극을 하는 시간은 늘 즐겁고 보람 있다”고 말했다.

신구는 이번 작품에서 베니스의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공작 역을, 박근형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역을 맡았다. 박근형이 샤일록을 연기하는 것은 무려 67년 만이다. 1959년 중앙대 재학 시절 학교 공연에서 샤일록을 맡은 이후 처음이다.

그는 “20대엔 샤일록을 권선징악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라고 봤다. 악한 놈이 벌을 받는다는 식이었다”며 “이 나이에 이르니 그가 처해 있는 환경 속에서 ‘사람’으로서의 샤일록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67년의 간극은 한 배우가 희곡 속 인물에 대한 관점과 표현을 완전히 다시 쓰게 했다. 그는 “학생 시절엔 내 마음대로 표현했다. 지금은 진정한 배우로서, 진정한 예술가로서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집중하고 있다. 그때보다는 좀 완숙해졌을 것”이라며 웃었다.

배우 신구가 12일 서울 종로구 NOL 서경스퀘어에서 열린 연극 ‘베니스의 상인’ 제작발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연출을 맡은 오경택 역시 샤일록을 평면적인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차별과 박해를 받은 그를 선악의 이분법적 관점에서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했다.

이번 ‘베니스의 상인’은 현대적 ‘문제극’으로 다시 태어난다. 오 연출가는 “사람은 다양한 욕망을 가진 복잡한 존재다. 이 작품을 통해 ‘선택적 공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공정성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정의란 무엇이고 무엇이 공정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피력했다.

무대 위에서 일생을 살아온 두 배우는 한국 연극계의 구조적 문제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박근형은 “우리나라의 위상은 세계적인데 불행하게도 창작극이 없다”며 “ 노벨문학상도 타는데 연극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너무 없다”고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이어 ‘베니스의 상인’에 이르기까지 고전 작품을 주로 선택하는 질문에 나온 답변이었다.

그는 “방송에 출연하다 연극 무대에 다시 왔는데, 50~60년 전하고 거의 변한 게 없었다. 방법부터 구성까지 그렇다”며 “어떻게 하면 좋은, 참된 연극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될 수 있으면 정통극부터 하면 좋을 것 같아 신구 형님과 4년 가까이 계속 무대에 서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저희가 가장 바라는 것은 우리의 창작 희곡”이라며 “꼭 좋은 창작 희곡이 나오게 해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오경택 감독(왼쪽부터), 배우 이승주, 카이, 박명훈, 한세라, 최수영, 박근형, 신구, 원진아,김아영, 김슬기, 조달환, 최정헌, 이상윤이 12일 서울 종로구 NOL 서경스퀘어에서 열린 연극 ‘베니스의 상인’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


이번 공연이 뜻깊은 것은 두 배우가 후배들을 위해 조성한 ‘연극 내일 기금’을 통해 태어난 신예 배우들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이다. 신구·박근형의 기부를 시작으로 출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함께 한 ‘연극 내일 프로젝트’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박승재, 엄현수, 김윤지, 이준일, 주홍 등 5명이 앙상블로 참여한다.

박근형은 “960명이 지원했고, 30명을 선발해 세 그룹으로 나눠 세 연출가가 모여 창작극을 공연하는 프로젝트였다”며 “신구 형님과 공연하며 누린 기쁨을 되돌려 줄 방법을 고민하다 시작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젊은 청년에게 학교보다 더 빠른 길로 갈 수 있는 (연기) 교육 기관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 올린 공연을 지켜보며 박근형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가 생각났다. 선생님이 없어 훈련도 받지 못하고 영화 엑스트라로 나가서 번 돈으로 무대를 올렸던 때”라며 “이번 시작을 발판 삼아 앞으로도 계속해서 후원하고 잘 이끌어져 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신구·박근형의 ‘베니스의 상인’에는 안토니오 역에 카이와 이승주, 포셔 역에 소녀시대 출신 최수영과 원진아, 바사니오 역에 이상윤, 제시카 역에 김슬기, 로렌조 역에 최정헌, 랜슬럿 역에 박명훈과 조달환 등이 출연한다.

안토니오 역을 맡은 카이는 “신구, 박근형 선생님 같은 대가들과 작업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고, 네리사 역의 한세라는 “두 선생님과 함께 공연한다는 소식에 집에 경사가 났다”며 웃었다.

연극 무대에 처음 도전하는 김아영(제시카 역)은 “올해 초 성장에 대한 욕구가 커졌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됐다”며 “동료들과 선배님들을 보면서 내공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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