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생후 2개월에 황제로 오르다
자아도 없는데 혼돈의 한가운데로
정점 고작 1년…20여년 ‘무명죄수’
글·거울까지 허락 없이…서글픈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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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이바노비치 트보로즈니코프, 요새에서 이반 6세 시신 앞에 선 바실리 미로비치, 1884,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추정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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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야로센코, 죄수, 1878, 캔버스에 유채, 143.1×107.6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tretyakovgallery.ru,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이반 6세와는 직접적인 관련 없음]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는 이름 없는 죄수였다.
그는 묘한 분위기를 품었다. 어쩌면 동전 몇 닢에 영혼을 판 하찮은 사기꾼 같았다. 그게 아니면, 혁명을 꾀하다가 잡힌 위험한 사상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위화감을 풍겼다. 머리칼 밑으로는 기름기가 줄줄 흘렀다. 쑥 들어간 눈 밑으로, 움푹 팬 볼 밑으로도 살가죽이 맥없이 흔들렸다. 가시처럼 마른 팔다리 또한 그저 밑으로만 축 늘어질 뿐이었다. 그런데도 시선이 가는 건, 이런 와중에 고개만은 꼿꼿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이 마치 무엇이라도 되는 양. 실상은 무엇 따위 없고, 무슨 일도 도모할 수 없어 보이면서. “…그러니까, 저자의 정체를 아무도 몰라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젊은 간수가 물었다. “우리가 전달받은 건, 저 사람이 근 20년간 옥 생활을 했다는 점 말곤 없다오.” 늙은 간수가 답했다. 사실이었다. “영감님. 그래봤자 저 죄수는 이십대로 보이는데, 그렇다는 건….” “생각을 비우시오. 더 깊게 파고들려고 하지 마시오.” 말이 끊겼다. 이제 공간을 채우는 건 정적과 한숨이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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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이반 6세,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오라니엔바움 야외 박물관 [fine-art-images.ne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젊은 간수의 생각이 맞았다.
어떤 죄수로만 불린 그 사내는 아주 어릴 적, 누가 봐도 아기였던 그때부터 옥살이를 했다. 미상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 속 앳된 모습. 이 남자가 가장 자유로웠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림이 어딘가 특별하지 않은가. 이렇게 어린데도 머리칼은 단정하다. 자세 또한 교육이라도 받은 듯 당당하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은 총명하고, 살짝 미소 짓는 표정은 온화하다. 금색 자수와 장식끈으로 꾸며진 푸른 예복은 고급스럽다. 이것은 왕족을 그리는 방식임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손 아래 붉은 쿠션도 왕궁 소품이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반짝이는 왕관은 왜 함께 놓여있는가. 이 죄수는 설마, 한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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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안드레아스 뮐러(1733~1816), 이반 6세(유력. 또는 이번 3세), 동판에 유채, 54.5×37.5cm, 덴마크 국립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죄수는 러시아 제국의 제5대 황제였다. 이반 6세. 이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뿐인가. 이 자는 러시아 역사상 최연소로 왕위에 오른 자였다. 세계사에서는 의외로 열 살 안팎 나이로 최고 권력에 서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는 으레 ‘소년 왕’ 정도의 칭호가 따라붙곤 한다. 이반 6세에게는 이런 말도 붙일 수 없었다. 그가 군주로 오른 건 고작 생후 2개월 때였다. 앳된 소년까지도 되지 못한, 아직 본인이 무엇이 됐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아기 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젖먹이 이반 6세의 통치 기간은 1740년 10월28일부터 1741년 12월6일. 기껏해야 1년1개월 정도였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쯤 별의 기간이 끝나고 만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사실상 옥살이를 했다. 당연히 죄 따위야 없었지만, 그만큼 운 또한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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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카라바크, 안나 이바노브나, 1730, 캔버스에 유채, 262x205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lj.rossia.org,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아기 이반 6세는 어쩌다 그 나이로 황제가 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왜 이토록 허무하게 모든 것을 잃고 말았는가.
시간을 한 뼘만 더 거슬러본다.
안나 이바노브나.
그녀는 이반 6세 직전, 러시아 제국의 제4대 황제였다. 옹알이 이반 6세를 일찌감치 차기 권력으로 점찍은 후견인이기도 했다. 안나가 그를 후계자로 둔 이유는 명료했다. 안나의 아버지, 이반 5세의 피가 이 아이에게 ‘옅게나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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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르크 나티에, 표트르 1세, 1717, 캔버스에 유채, 142.5x110cm, 에르미타주 미술관 [The Hermitage, St. Petersburg3, img15.nnm.ru,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렇다면 아기 이반 6세에 앞서 이반 5세는 누구인가.
이반 5세는 한때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 표트르 1세와 국가를 이끈 공동 차르였다. 다만, 표트르 1세의 입지가 워낙 탄탄했던 만큼 영향력은 없었다. 몸이 약해 오래 살지도 못했다. 1696년, 2월. 사망 당시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표트르 1세는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홀로 권력을 쥐었다. 아예 단독으로 통치를 이어갔다. 언제까지? 29년이나 더. 표트르 1세가 죽은 후로는 그의 배우자 예카테리나 1세(러시아 제국 제2대 황제)가 군림했다. 다음으로는 표트르 1세의 친손자인 표트르 2세(러시아 제국 제3대 황제)가 왕관을 이어받았다. 그사이 한때 공동 지도자였던 이반 5세의 핏줄은 중심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방에서 뒷방으로, 뒷방에서 방 바깥으로 밀려날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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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르크 나티에, 예카테리나 1세, 1717, 캔버스에 유채, 142.5x110cm, 에르미타주 미술관 [barmin-ekb.ru,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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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표트르 2세, 1720년경, 캔버스에 유채, 88x69cm, 러시아 역사 박물관 [Google Art Projec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러다 우연히 기회가 왔다.
표트르 2세가 예기치 않게 죽었다. 고작 열네 살이었다. 천연두로 인한 요절이었다. 배우자도 없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다. ‘표트르 일가’의 남자 직계가 끊기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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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이반 5세, 1801~1810, 캔버스에 유채, 83×70.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갑작스럽게 주인을 잃은 권력은 방황했다.
‘차기 황제가 될 수 있는 1순위는 누구인가.’ 권력은 명분을 좋아한다. 가장 그럴듯한 명분의 냄새를 귀신처럼 맡는다. 정처없이 걸어가면서도 기가 막히게 품 아래에 둥지를 틀어버린다. 이번에도 그랬다. 권력은 이미 흐릿해진 이반 5세의 발자국을 다시 파헤쳤다. 이반 5세. 표트르 1세에 밀려 존재감도 없고, 요절까지 하고 만 운명이었지만… 그의 자식은 여전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있었다. 핏줄로만 따지면 분명 그랬다. 표트르의 남자 대가 끊긴 상황인 만큼, 지금으로는 이보다 더 적합한 대상이 없었다.
권력은 이반 5세의 딸 안나 이바노브나를 제4대 황제로 올렸다. 당시 그녀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물론 표트르 일가에도 남성이 없을 뿐 여성은 남아 있었다. 적당한 명분만 세우면 외려 그 집안의 여인을 위로 올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권력이 이를 모른 척한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강골 표트르 1세의 기운을 피하고 싶었다. 그의 피가 흐른다면 그게 누구건 쉽게 다룰 수 없을 터라는 공포가 있었다. 반면 공동 통치자였던 이반 5세는 생전에 어눌하고 만만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딸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이 있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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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미상, 이반 6세, 1740년경, 러시아 박물관 [Shakko, fine-art-images.ne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안나를 황위로 올렸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그녀에게는 뜻밖의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심약했던 아버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안나는 시늉으로나마 다시 기어들어온 권력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안나는 비밀경찰까지 동원했다. 궁의 분위기를 즉각 공포로 물들였다. 그런 한편 뒤로는 확실한 후계자 확보에 공을 들였다. 본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당장 병을 얻거나 암살이라도 당한다? 또 한 번 표트르 일가가 재역전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노릇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안나에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반 5세의 유일한 외손녀이자 그녀의 유일한 조카딸. 안나보다 스물다섯 살이나 어린, 안나 레오폴도브나였다. 꽤 희석돼 있긴 하지만, 그녀도 이반의 혈육이지 않은가. 그녀가 미래에 낳을 자식을 데려오면, 어떻게든 이반의 대(代)는 이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안나는 본인이 우려한 가장 큰 산은 넘었다.
1740년, 8월. 레오폴도브나, 그녀가 아들을 ‘낳아준’ 것이다! 이름은 이오안 안토노비치. 곧 제5대 황제 이반 6세가 될 그 아이였다. 안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아기를 후계자 명단에 올렸다. 내 자식인 양 보란듯 어르고, 때가 되면 바로 군주 수업에 밀어 넣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힘과 정치의 속성을 가르치고, 동토의 제왕이라면 가져야 할 변덕과 잔혹함도 가르칠 마음이었을 터였다. ‘자기 친아들도 아닌, 조카딸의 아들을 그저 이반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최종적으로는 권력이 이러한 의심에 잠식되기 전, 왕위 계승 명분을 거듭 덧바를 계획이었으리라. 하지만 안나는 그러지 못했다. 안나는 죽었다. 급사였다. 1740년, 10월에. 이반 6세가 태어난 후, 겨우 2개월 만에.
젖먹이는 그렇게 이반 6세가 돼 왕좌에 앉았다. 아니, 아직 바로 앉을 수도 없는 만큼 ‘누웠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먹고, 자고, 우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죽은 안나가 총애했던 인물, 에른스트 요한 폰 비론 공작이 섭정(攝政·군주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직위)으로 판 위에 올랐다. 이 체제의 수명은 고작 3주 정도였다. 근위대의 반란 때문이었다. 레오폴도브나, 즉 이반 6세의 친어머니가 쫓겨난 비론의 빈자리를 채웠다. 아마 그녀가 근위대를 부추겼을 것이다. “당연히 친어미가 자식을 돌봐야 하지 않겠느냐. 외국인(비론의 가문은 독일계였다)이 아니라”는 식의 명분을 세웠을 것이다. 레오폴도브나는 안나가 살아있을 적 그녀에게 대체로 고분고분했다. 사실, 뒤로는 오래전부터 이런 욕망을 그려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레오폴도브나의 정치적 역량은 썩 좋지 못했다.
그녀는 아기 황제 이반 6세를 위한 이상적인 섭정이 되지 못했다. 생각은 많고, 움직임은 굼떴다. 일은 쌓이고, 고문 또는 관리들과의 논쟁은 잦아졌다. 분위기는 동토의 숲 한가운데처럼 금세 얼어붙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일단 레오폴도브나에게 납작 엎드리고 봤던 권력. 녀석이 재차 고개를 들어올렸다. 숨을 죽인 채 눈알을 굴렸다. 초대 황제 표트르 1세와 제2대 황제 예카테리나 1세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이제 그녀 앞에서 미래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반 일가가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 재역전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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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카라바크,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1720년경, 캔버스에 유채, 78x63cm, 에르미타주 미술관 [hermitagemuseum.org,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1741년, 11월25일의 밤. 옐리자베타가 레오폴도브나의 침실에 들어가 속삭였다. 옐리자베타는 드레스 위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권력이 끌어모은 추종자 무리 또한 묵직한 무장 차림이었다.
앞서 그녀는 이런 말로 명분을 쥐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은밀하고도 대담한 쿠데타였다. 잠든 레오폴도브나에게 전한 ‘일어날 시간’이라는 건, ‘당신이 끌어내려질 시간’이란 뜻과 같았다. “아, 아기를 놀라게 하지는 마세요!” 옐리자베타가 말했다. 그래봤자 생후 15개월밖에 안 된, 제5대 황제 이반 6세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군복 입은 무리는 이반 6세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요람 옆에서 한 시간을 서 있었다. 눈을 뜨고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옐리자베타가 달려가 자기 무릎에 앉혔다고 한다. “아가,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단다. 잘못이 없는데…”라고 말하며.
바람을 탄 권력은 그 순간에선 아무도 이길 수 없다. 이는 누구보다도 레오폴도브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서른두 살 옐리자베타의 시대가 왔다. 젖먹이 이반 6세는, 그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친 스물셋의 레오폴도브나는 맥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중앙 무대에서 퇴장했다. 모든 건 이반 6세 즉위 후 1년2개월도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섭정 비론 공작에서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이어 이반 6세를 끌어내리고 제6대 황제가 된 옐리자베타. 훗날 러시아 역사는 이를 ‘궁정 쿠데타 시대’의 가장 굵직했던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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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스 콘라트 판젤트, 표트르 3세(대관식), 1762년, 캔버스에 유채, 106×82.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hermitagemuseum.org,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이반 6세는 그때부터 이름을 잃었다. 그의 발 밑에는 황제가 아닌, 국가의 비밀 죄수로 삶이 깔렸다.
새롭게 황제가 된 옐리자베타는 이반 6세의 기록을 가차 없이 없앴다. 아기 왕의 얼굴 또는 이름 박힌 동전, 즉위 과정을 극적으로 담은 문서, 어서 자라 똑 부러진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는 문장이 담긴 책과 편지 등을 체계적으로 말소했다. 그뿐인가. 한때 황제이자 권력의 핵이었다는 점을 기억도 못 할 그 아이에게 잉크와 종이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 거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게끔. 나아가 세상을 제대로 인식조차 할 수 없도록. 이는 후환을 없애기 위한 금지령이었다.
이반 6세는 리가(현 라트비아)로 쫓겨났다. 이어 시골마을 콜모고리까지 밀려났다. 머문 기간은 12년. 그는 이제야 소년이 될 수 있었다. 그다음은 돌고돌아 슐리셀부르크 요새 내 감금되는 처지에 놓였다. 이곳은 제국 끄트머리에 겨우 매달린 외딴 땅이었다. 요새 사령관조차도 이 이름 없는 죄수의 신원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반 6세 본인은 옛 과거를 일부 알게 됐다고 한다. 어떻게 말과 글도 배웠고, 이는 성경까지 막힘없이 읽는 수준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처지를 딱하게 본 시종이 도움을 줬을 수 있다. 나아가, 이반 6세는 언젠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을 때 본인을 ‘군주’로 칭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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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데르 로슬린, 예카테리나 2세, 1780년경, 캔버스에 유채, 85.5x68cm, 빈 미술사 박물관(모작) [Kunsthistorisches Museum, Public Domain, wikimedia.org] |
이반 6세를 밀어내고 제6대 황제가 된 옐리자베타는 1762년에 죽었다. 이는 이반 6세의 기록 말살형이 21년간이나 이어졌다는 점을 의미한다.
옐리자베타에 이어선 제7대 황제로는 그녀의 조카 표트르 3세가 올랐다. 그는 훗날 일부 역사서에 대놓고 얼간이라고 칭해지기도 할 만큼 순진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반 6세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오직 그의 입장으로 보면, 이 죄수는 여전히 잠재적 위험이었는데도.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고작 6개월이었다. 제8대 황제는 표트르 3세의 아내, 예카테리나 2세였다. 표트르 3세의 얼빠진 정치외교 행태를 보다 못한 무리가 쿠데타를 일으킨 결과였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는 결코 순진하지 않았다. 이는 이반 6세 입장에선 최악의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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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이바노비치 트보로즈니코프, 요새에서 이반 6세 시신 앞에 선 바실리 미로비치, 1884,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추정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바실리 미로비치는 러시아 제국 육군 제25스몰렌스크 보병연대의 군인이었다.
그는 가난하게 컸다. 그의 할아버지가 표트르 1세 세력에 맞서다가 패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유산 박탈이었다. 그런 만큼, 아마 표트르 일가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미로비치는 슐리셀부르크 요새의 소위로 부임했다. 그 또한 그곳에 있는 ‘이름 없는 죄수’를 마주했다. 그리고, 어떤 계기에서인지 그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젊은이. 다른 이들이 그랬듯, 자네도 행운의 앞머리를 움켜쥐길 바라오.” 미로비치는 보다 젊을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신념처럼 평생 가슴에 새겨왔다. 행운의 앞머리. 이 죄수를 구출하고, 진짜 황제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탐욕스러운 권력을 끌어들이면…. 그것이야말로 행운의 앞머리에서 일등 공신이 될 수 있는 길 아닌가. 미로비치는 결심했다. 이 죄수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기로.
1764년, 7월 5일. 시간은 새벽 2시. 미로비치와 휘하 병사들이 나섰다.
경비병을 제압했다. 서둘러 요새 정문을 뚫었다. 사령관이 현장을 찾았다. 수상한 기척에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곤봉을 휘둘러 기절시켰다. 문을 열었다.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밤은 깊어지고, 발걸음은 깊숙해졌다. 어느덧 이름 없는 죄수의 방 앞까지 왔다. 그의 감시병들이 겹겹이 있었다. 역시나 무언가를 숨기는 듯 수상한 모습이었다. 양측은 긴 시간 교전을 벌였다. 어느 쪽도 밀거나 밀리지 않았다. 곧 휴전 협정을 맺었다. 미로비치는 어떤 죄수, 즉, 이반 6세와 직접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 “우리가 폐하를 구출하겠습니다.” 이 말을 목 끝에 올린 채 마지막 문을 열었지만… 이반 6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공기는 아직 따뜻했다.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무슨 짓이오! 감히 폐하를…” 미로비치는 소리쳤다. 곧 그 자리에서 우두망찰했다.
이것은 결코 순진하지 않았던 예카테리나 2세가 감시병에게 내린 비밀 명령이었다(다만, 이는 이반 6세 폐위 직후부터 계속 유효했던 말이었다고도 한다). 어떤 죄수, 이반 6세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세상과 등졌다. 어쩌면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삶을 마쳤다. 나이는 고작 스물네 살이었다. 미로비치는 목적을 잃었다. 외려 이반 6세의 죽음만 앞당긴 채 체포됐다. 그 또한 참수형으로 생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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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야로센코, 삶이란 어디에나 있다, 1888,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picture.art-catalog.ru,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 표트르 1세부터, 제8대 황제 예카테리나 2세까지.
기껏해야 백 년도 되지 않는 시간을 다루는 이 글에서만 등장한 황제가 여덟 명 이상이다. 그만큼 피와 연기, 혼미와 혼란의 시대였다. 이반 6세에게는 죄도 없고, 한때 옐리자베타가 속삭인 말처럼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저 대혼돈의 시대의 한가운데 태어난 게 실수였다면 실수일까. 역사는 어떤 이에게는 야속하리만큼의 큰 행운을, 또 어떤 이에게는 눈물겨울 수준의 참사를 안긴다. 다시 한번 이 말을 되새기게 된다. 역사에는 영혼이 없다는 것. 이반 6세의 시신이 묻힌 곳은 슐리셀부르크 요새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완전히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명화로 읽는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 나카노 교코, 한경arte
Robert Nisbet Bain, The Pupils of Peter the Great(London, 1897)
Mikhail Semevsky, Ivan VI Antonov’ich(Saint Petersburg, 18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