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프랑켄슈타인
죽은자를 꿰매 만들어진 존재
버려진 피조물은 괴물이 되고
상실에 잠긴 여인은 이를 썼다
신과 인간의 무책임함을 고발
그녀가 던진 가장 무서운 질문
![]() |
| 리처드 로스웰, 메리 셸리(얼굴 확대), 1840년경, 캔버스에 유채, 73.7x61cm,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Scan of a prin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죽은 자를 이어붙여서
![]() |
| 시어도어 폰 홀스트, 자신의 피조물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1831, 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in. Private collection, Bath., Public Domain, wikimedia.org]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때는 18세기. 주인공 이름은… 그래요. 빅터였어요. 스위스 제네바의 상류층, 프랑켄슈타인 가문의 도련님이었어요.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는 어릴 적부터 과학 실험에 관심이 많았어요. 불과 얼음, 수은과 전기를 다루는 데 쾌감을 느꼈지요. 그러던 어느 날(세상 모든 전설은 이 말과 함께 시작되죠!), 그는 깨달았어요. 본인이 어쩌면, 그간 없던 생명체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점을요.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퀴퀴한 공동묘지부터 찾았어요. 그곳의 무덤이요. 삽을 들고 하나씩 파헤쳤어요. 관 뚜껑을 뜯어버렸지요. 이를 탈탈 털어 땅바닥에 쏟고는… 맞아요. 챙겨온 포대 주둥이를 열었어요. 고르고 고른,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 잔뜩 담았어요. 그런 뒤 작업실로 돌아왔어요. 서둘러 창문을 내리고 커튼을 쳤지요. 그제야 자루에서 덩어리를 하나씩 꺼냈어요. 펼친 천 위로 올려놓고 퍼즐 맞추듯 꿰맸어요(벌써 소름이 돋죠?). 심혈을 기울였어요. 온통 차갑게 식은 것뿐인데도 땀이 쏟아졌지요. 마지막 땀방울을 훔치려는 순간, 빅터는 하던 일을 멈췄어요.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그가 만들어낸 그것. 그러니까, 크리처(creature). 설마했던 그게 갑자기 움찔거렸어요. 살아난 거예요. 눈을 뜨고, 쇳소리를 내며, 막 태어난 짐승처럼 관절을 꺾었어요.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어요. 아니, 분명 ‘제일 보기 좋은’ 부분들만 챙겨와 붙였는데… 하나로 모아보니 외려 더 불쾌해졌어요. 빅터는 어떻게 했을까요?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도망치고 말았어요. 하지만 빅터는 그러지 말아야 했어요. 그따위 무책임한 짓을 하면 안 됐어요. 왜냐하면…”
‘괴담 내기’가 시작된 그날
![]() |
| 리처드 로스웰, 메리 셸리, 1840년경, 캔버스에 유채, 73.7x61cm,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Scan of a prin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메리 양.”
“네?”
“이 내용. 혹시, 당신이 직접 떠올린 건가요?”
“네. 언제까지나 남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1816년 여름의 어느 날.
공기는 차갑고, 분위기는 스산했다. 연기와 잿가루는 수개월째 흩날리고 있었다. 지난해 탐보라산의 대형 화산이 폭발한 데 따른 여파였다. 사람들은 이 기간을 아예 ‘여름이 없는 해(여름이 사라진 시간)’라고 부르기도 했다.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조지 고든 바이런, 작가 지망생 존 폴리도리, 그리고 의붓자매인 메리 고드윈과 클레어 클레어먼트. 청춘의 남녀 다섯은 스위스 제네바 내 빌라에 모여 있었다. 퍼시와 메리, 바이런과 클레어 사이 정열의 불꽃이 튀고 있던 만큼, 기운은 어딘가 묘하고 아슬아슬했다. 바깥에서는 번개가 거듭 번쩍이고 있었다. “우리, 이 서늘한 분위기에 맞춰 유령 이야기나 해볼까요?” 바이런의 말이었다. 은근한 긴장감을 풀기 위한 제안이었다. “좋아요.” “시간을 죽이기에 좋겠네요.” 모두가 동의했다. 먼저 퍼시가 자신의 어릴 적 경험으로 이들을 빙 둘러앉게 했다. 바이런은 흡혈귀 이야기를 했다. 폴리도리는 그 내용에 홀린 양 빠져들었다가, 본인 순서에 맞춰 해골 여인의 모험담을 풀었다(폴리도리가 흡혈귀에 대해 먼저 운을 띄웠다가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이제 메리 차례. 그런데,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녀는 훗날 “이야기가 있어?”라는 물음에 “(매번)굴욕적인 부정의 답만 해야 했다”고 회상하기까지 한다. 다시 퍼시와 바이런이 대화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문학에 이어 철학과 과학, 종교와 신비주의까지 대화 주제를 넓혔다. 최대 화두는 ‘갈바니즘(galvanism)’이었다. 특히나 죽은 개구리에 전기를 대자 그것이 살아난 듯 움찔거렸다는, “이 방식을 활용하면 시체가 되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오르내렸다.
악몽은 어떻게 이야기가 됐는가
![]() |
|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 원고, 1816, 보들리안 도서관 [bodley.ox.ac.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메리는 아직도 무서운 일화 하나 짓지 못한 굴욕감에 젖어 있었다.
토론에서도 오가는 이야기만 엿듣듯 하며 잠자코 있던 이유였다.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침실 등불이 하나둘 꺼졌다. 그리고, 아마도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 메리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신기루를 본다. 음산한 공포가 산짐승처럼 뒤를 밟는다. “(…)나는 사악한 학문에 젖은 창백한 학생이, 자신이 조립한 조각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봤다.” 훗날 그녀는 당시 목격한 환영을 이렇게 돌아본다. 그리고 얼마 후 또 한 번 괴담 경연이 열린 시간. 메리는 자신이 본 ‘깨어있는 꿈’의 장면을 묘사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뒤틀린 호기심, 그것이 불러낸 크리처, 이어지는 잔혹한 사건들…. 기어코 모두의 등골을 오싹하게 한 이야기를 만들고야 만 것이다. 훗날 영문학 SF(Science Fiction)의 효시로도 칭해지는 악몽,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 매혹적인 소설은, 그저 승부욕에 찬 여인이 내기에서 우연히 빚은 결과물인가. 아니다. 실은 조금 더 복잡하다. 더욱더 심오하고, 확실히 더 치명적인 배경을 안고 있다. 장난 섞인 내기는 ‘트리거’일 뿐,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무르익고 있었다. 물론 메리 본인도 이를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무책임한 세상 앞에서
![]() |
| 시어도어 폰 홀스트, 자신의 피조물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내 ‘크리처’ 부분 확대, 1831, 테이트 브리튼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 크리처. 이 생명체는 눈을 뜬 즉시 연구실 밖으로 나간다.
크리처는 한 가족의 집 근처 창고로 숨는다. 조금씩 언어를 깨우치고, 인간과 사회의 습성도 엿본다. 그곳에 섞여 들어가고 싶은 욕망 또한 강하게 느낀다. 크리처는 용기를 낸다. 인간에게 먼저, 그리고 거듭 손 내밀어본다. 245㎝의 키, 얼굴을 가리는 긴 흑발, 노란 눈동자와 혈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보랏빛 피부. 세상은 그런 기괴한 존재를 안아주지 않았다. 슬금슬금 피하고, 나아가 흠씬 두들겨 패고, 심지어는 총을 쏴버리기도 한다. 크리처는 원래 여리고 순진한 편이었다. 속이 깊고 지적인 면도 있었다. 일단 태어난 만큼 나 또한 사랑을,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다들 왜…. 크리처는 의문을 품는다. 나의 창조주인 그놈, 프랑켄슈타인은 무책임하게 도망쳤다. 날 품은 시대는 기를 쓰고 등을 돌린다. 그때부터,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녀의 남다른 여정
![]() |
| 윌리엄 고드윈, 메리 셸리(메리 고드윈)의 탄생을 기록한 일기, 1797, 보들리안 도서관 [bodley.ox.ac.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그녀는 부모부터 보통이라곤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은 추종자를 여럿 거느린 정치 철학자였다.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도 주목받는 사상 교육자 겸 작가였다. 두 사람 모두 급진 성향이었다. 그간 없던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일, 야성의 그것을 길들이는 작업에도 열린 태도를 갖춘 인물들이었다. 메리는 1797년 런던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출산 후 곧 숨졌다. 사인은 산욕열이었다. 아버지는 1801년에 재혼했다. 상대는 메리 제인 클레어먼트. 그녀 또한 꽤나 격정적이었으나, 나름대로 교양과 지식은 있었다. 메리는 어릴 적부터 정치와 혁명, 문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졌다. 당연했다.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은 매일 낮과 밤 응접실에 머물렀다. 그중에는 미국의 전 부통령 에런 버, 영국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키지 등 굵직한 인사도 여럿 있었다. 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귀동냥하는 일만으로도 지식이 쌓였다. 혼자 있을 때는 그리스와 로마를 배경으로 한 고전을 읽었다. 그때부터도 때로는 글을 끄적였다. “대담하고, 의욕적이면서, 약간은 오만했다. 열정이 엄청났으며, 특히나 인내심으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어보였다.” 이는 열다섯의 메리를 본 아버지의 평이었다고 한다.
![]() |
| 레지널드 이스턴, 메리 셸리의 미니어처 초상화(데드마스크를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 1857, 상아에 수채, 10.8×8.6cm, 보들리안 도서관 |
메리는 1812년 11월, 퍼시와 처음 만났다. 메리는 열다섯, 퍼시는 스무살이었다.
만난 곳은 집. 퍼시는 손님이었다. 당시 그는 메리의 아버지, 윌리엄이 설파하는 일종의 자유사상에 심취해있었다. 둘은 2년 뒤 다시 마주했다. 재차 눈빛을 주고받았다. 문학과 문장 이야기로 가슴 속 꽃을 피웠다. 둘은 통했다. 어느덧 “나의 열정을 숨길 수 없으며”, “숭고하고 황홀한 순간”이라는 말도 주고받았다. 사월의 꽃잎 내려앉듯 손까지 포갰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둘은 묘지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메리는 그에게 몸을 던졌다. 퍼시가 유부남이라는 점은 상관치 않았다. 오죽하면 그해 여름에 함께 야반도주를 할 만큼. 사실 메리는 늘 사랑이 고팠다. 아버지는 똑똑했다. 그만큼 엄하고, 고집도 셌다. 새어머니? 그녀는 은근히, 하지만 확실히 메리가 아닌 자기 자식부터 챙기고 있었다. 메리도 관심이라는 것을 받고 싶었다. 좋아. 이 정도면. 가죽이 터질 듯 배가 불러. 한 번이라도 이렇게 말해보고 싶은 바람이었다. 신이 이를 건네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이를 잡아 뜯을 마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곧 본인이 임신을 했다는 점을 알아차린다.
내 삶을 망친 자들을
![]() |
| 시어도어 폰 홀스트(스케치), 윌리엄 슈발리에(판화제작), 마침내 내 출발의 낡이 밝았다(1831년 《프랑켄슈타인》 개정판 삽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비극적 실험에 발을 딛게 되는 장면 [Internet Archive and HathiTrus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크리처는 자신의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간다.
그에게 말한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내 신부도 만들어 달라고. 그렇게만 하면 오지로 떠나 둘만 살겠다고. 프랑켄슈타인은 격정이 깃든 크리처의 눈을 본다. 본인이 죽인 인간의 피로 물든 놈의 손도 본다. 요청을 받아들인다. 그때 그 방식 그대로 다시 작업에 나선다. 조각을 맞추고, 붙이고, 꿰매고…. 시간이 흐른다. 크리처의 신부가 창조되기 직전에 이른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두 번째 피조물이 눈을 뜨기 직전, 이를 다시 해체해버린다. 예측할 수 없는 공포, 통제하지 못한 불안에 깔려버린 것이다. 크리처의 희망은 압도적 절망이 된다. 그는 고개 숙여 절규한다. 이어 고개 들어 맹세한다. 나의 신, 나의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이여. 내 삶이 찢어진 만큼, 네 생도 짓밟아주겠다고.
크리처는 프랑켄슈타인의 주변 인물을 하나둘 살해하기 시작한다.
개인의 저주, 문학의 축복
![]() |
| 작자미상, 퍼시 셸리, 19세기경(추정 또는 대략적인 기록), [Wikipedia,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1815년, 2월. 메리는 열여덟에 첫째 딸을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곧 잠들 듯 하늘로 올랐다. “내 아이가 죽었다. (…) 나는 더는 엄마가 아니다.” 그녀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여름.
메리는 제네바의 그 빌라에서 괴담 내기 한다. 몇 번의 굴욕 후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크리처의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을 빚어낸다. 원래는 손바닥만 한 단편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다만 퍼시가 그 자리에서 “더 듣고 싶다”며 힘을 실었다. 그래서 문장도 몇 배는 더 길게 붙일 수 있었다고 한다. 메리는 앞서 그해 1월에 둘째 윌리엄을 출산했다. 이 아이를 돌보며 1817년 초여름에서야 초안을 다 썼다. 그녀는 창작열이 뿜는 환희 속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 외려 슬픔과 우울 속에서, 이를 질겅질겅 씹으며 절박하게 손을 놀렸다. 가장 많이 한 혼잣말은 “괴롭다”, “아프다”와 같은 호소였다. 그것은 뜻하지 않은 개인의 저주이자, 결과적으로는 문학의 축복이었다. 그렇다면, 그사이 무슨 불행이 있었는가. 메리는 아버지와 멀어졌다. 그는 사랑에 홀린 딸의 일탈을 오직 오점이자 수치로만 보는 모습이었다. 메리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남다른 사상가이지 않은가. 그런 만큼 그만은 본인을 이해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복 여동생도 죽었다. 그다음은 내연남 퍼시의 아내도 사망했다. 아버지와 이복 여동생 건으로는 또 한 번 외로움을, 퍼시의 아내가 세상을 등진 데 대해선 뿌리 깊은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 와중에 살아남은 둘째 아들, 윌리엄 또한 썩 튼튼하게 자라지는 못하는 듯했다.
무책임한 신을 원망할 수 있는가
![]() |
| 윌리엄 파월 프리스, 연인들의 자리(퍼시 셸리와 메리 셸리), 1877, 캔버스에 유채, 64×50.5cm [sothebys.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메리는 신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에게 원망과 합리화는 생존 본능과도 같으니.
신은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빚었다.
그러곤, 미련도 없이 바깥 세계로 밀어 떨어뜨렸다. 그게 다였다. 만들 때는 나름대로 정성을 쏟았을지언정, 이를 끝으로는 완전히 손을 놓은 듯보였다. 내가 눈을 뜬 후 들은 말은 “엄마를 잡아먹고 태어난 자식”이었다. 믿었던 아버지는 나를 내몰았다. 새어머니는 진작부터 내 존재를 멀리했다. 무리하게 뛰어든 사랑은 역시나 어긋난 결과를 줄줄이 낳았다. 돌아보니 내 곁에 남은 건 자기혐오의 잿가루뿐이었다. 슬펐다. 있는 곳마다 폐허였다. 그저 완전히 망가지고, 완전히 망가뜨리기만 반복하는 듯했다. 이 따위 삶이라면 신은 나를 왜 만들었는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면 이 피조물을 왜 툭 던져놓았는가. 지독하리만큼, 무책임하게.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가 신을 원망할 자격이 있을까.
메리는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와 당신들 또한 툭 던져놓고는 모르는 척하는 일이 한 둘인가. 가장 이성적인 척을 하는, 가장 계몽된 양 행세하는 인간조차도 그 따위였다. 한심한 사랑싸움과 얼빠진 범죄, 나아가 미완성된 전쟁, 뒷심 없는 혁명과 이데올로기, 불확실한 과학 이론마저 인간의 이성과 계몽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메리가 써내려간 프랑켄슈타인의 삶. 창조주를 흉내 낸 이 인간은 본인이 만든 뒤 내버린 피조물에게 대책 없이 붕괴되는 식으로 흘러간다. 물론 극적 공포와 재미도 따져 이야기를 펼쳤을 것이다. 산업혁명과 계몽주의의 물결, 낭만주의의 역습 등 당시 시대적 배경도 반영했을 것이다.
그런 한편, <프랑켄슈타인>은 그녀가 무책임한 신에게 가하는 경고이자 응징이기도 했을 테리라. 아울러 무엇보다도, 그런 신에게 따질 자격조차 없는 인류에게 던지는 거울이자 고발장이었을 터였다.
죽은 자신의 창조주 앞에서
![]() |
| 나다니엘 위톡, 토마스 찰스 웨이지먼, 코벤트 가든 왕립 극장 소속 T.P. 쿡이 연기한 《프랑켄슈타인》 괴물 분장 장면, 1823년(추정) ‘프랑켄슈타인의 운명’ 무대, 37×29.5cm, 석판화, 뉴욕 공공도서관 [New York Public Library‘s Digital Librar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이제는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 크리처를 추격한다. 프랑켄슈타인에게 남은 감정은 분노와 복수심뿐.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크리처는 이를 비웃듯 도주를 이어간다. 발이 닿은 곳은 어느덧 얼음 대륙. 프랑켄슈타인은 동토를 헤맨다. 갈라진 얼음 위로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놈을 죽이기에 앞서 먼저 죽기 직전에 이른다. 어쩌면 살아남을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대가를 치르는 길에 오른다. 크리처는 프랑켄슈타인의 최후를 알고 몹시도, 진심으로… 슬퍼한다. 그에 대해 “나를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탄까지 한다. 크리처는 떠난다. 뱃전을 넘어 빙하를 타고 사라진다. 곧 죽었는지, 더 오래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 |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판본 속표지의 크리스티 경매 스캔본, 1818 [Cropped and slightly rotated from christies.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메리는 1818년에 《프랑켄슈타인》을 출판했다.
“매우 대담한 소설.” <라 벨 아상블레>
“구성과 언어 등 모든 면에서 힘을 갖지만 (…) 끔찍하고, 혐오스럽고, 불합리한 작품.” <쿼터리 리뷰>
《프랑켄슈타인》은 비평가들에게 엇갈린 반응을 받지만, 대중적으로는 거의 공개와 동시에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메리는 속이 까맣게, 그러다 하얗게 타들어 갈 만큼 울어야 했다. 1819년 6월, 둘째 아이 윌리엄이 죽었다. 앞서 1818년 9월, 그러니까 9개월 전에는 이제 겨우 한 살이 된 셋째 아기 클라라마저 땅에 묻어야 했다. 뱃속에 품었던 세 자식을 모두 잃은 것이다. 고작 스물두 살 나이에. 곧 넷째이자 재차 첫째가 된 아들을 낳을 수 있었지만, 쥐어뜯긴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너는 도망쳤다. 슬픔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음울한 길로. 너를 위해서라도 나는 따라갈 수 없으니, 나를 위해서라도 돌아와 주기를.” 퍼시는 정식 아내가 된 그녀를 위해 이런 글까지 썼다. 그리고 1822년. 그런 퍼시마저 세상과 등졌다. 요트 사고였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진작에 동토의 심장부로 떠난, 크리처의 옛 짓거리를 다시 떠올리게 할 만큼 허무한 끝맺음이었다. 신과 인간 세계를 응징한 글은 이례적 호응을 얻었지만, 그녀 또한 그런 세상에 거듭 응징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재건할 것인가
![]() |
| 루이 에두아르 푸르니에, 퍼시 셸리의 장례식, 1889, 캔버스에 유채, 129.5×213.4cm, 워커 아트 갤러리 [uwFW5-eMuEhgAA at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21세기 말, 먼 미래. 인간이 관계 놀음과 권력 다툼을 하는 사이, 전 세계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한다. 무엇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식,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무기 둘 다 속수무책이다. 인류가 순리 앞에서 압도적 패배를 한 것이다. 라이오넬과 몇 명만이 겨우 살아남는다. 하지만 이 또한 잠시였다. 이들은 도피를 위해 배에 올랐지만, 하필 눈앞에 펼쳐진 건 폭풍우였다. 결국 부서진다. 끝내 가라앉는다. 그러다 단 한 명, 라이오넬만이 ‘최후의 인간’이 돼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메리의 또 다른 소설,《최후의 인간》의 줄거리는 이렇다.
그녀는 신보다도 못한 인류의 무책임함을 재차 비춘다. 이보다도 못한 무기력함을 밑바닥까지 후벼판다. 그렇다면, 메리가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 없다. 없어보인다. 대신 질문을 건넨다. 인류의 태만이 겹겹이 쌓여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최후의 ‘너’는 무엇부터 재건할 것인가.
대답은 들을 수 없겠지만…
![]() |
| 리처드 로스웰, 메리 셸리, 1840~1843, 캔버스에 유채, 29.5x24cm, 보들리안 도서관 [Art 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메리는 삶을 일찍 꽃피웠다.
이런 것을 하나라도 창조해 냈다면, 그 자체로 인생이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 법한 작품은 진작에 쏟아냈다. 메리는 이후 작가 겸 편집자로 바쁘게 살았다. 소설 《퍼킨 워벡의 운명》, 《로도어》, 《포크너》 등을 연달아 썼다. 아들과 여행도 다녔다. 그사이 단편도 투고하고, 그녀만의 소소한 사회 운동도 했다. 나름대로 로맨스도 몇 번을 경험하며 남은 삶을 힘껏 유영했다.
물론, 메리답게 매 순간이 쉽지는 않았다.
메리는 때때로 위협에도 시달렸다. 메리의 사생활이 낱낱이 담긴 편지를 공개하겠다는 협박, 죽은 남편 퍼시의 옛 기행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이는 일종의 사기였다), 메리와 퍼시 사이 있었던 야반도주 등 스캔들을 적나라하게 공표하겠다는 협박…. 메리는 지쳤다. 아무리 그녀라도 조금씩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메리는 1839년부터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몸의 일부가 마비되는 증상도 겪었다. 더는 글조차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천천히 죽어갔다. 1851년 2월, 메리는 끝내 눈을 감았다. 사인은 뇌종양으로 추정된다. 향년 쉰네살이었다. 메리의 책상 서랍에는 퍼시와 주고받은 노트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죽은 자녀들의 머리카락 뭉치도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메리는 하늘로 올라가 드디어 따질 수 있었을 것이다. 신의 무책임함을 놓고 달려들듯 옷깃을 휘감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란듯 자랑하며 흔들었으리라. 그 무책임함을 내가 어떻게 승화했는지를 보여주는, 《프랑켄슈타인》 초안을. 신은 끝내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고개를 돌린 채 슬쩍 웃음을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피조물이여. 잘했고, 잘 이겨냈고, 인류의 유산으로, 시대의 지침으로 잘 남겼다. 이런 식의 혼잣말을 하며.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문학동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현대지성
최후의 인간, 메리 셸리, 아고라
The Journals of Mary Shelley, Shelley, Mary.,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Mary Shelley‘s Literary Lives and Other Writings, Shelley, Mary., London: Pickering & Chatto
Finding Mary Shelley in her Letters, Bennett, Betty 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