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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저울에 표시된 무게, 주유기의 주유량, 수도와 가스 계량기의 검침 숫자까지, 우리는 일상과 산업 전반에서 측정(계량)을 거쳐 나온 수많은 숫자를 마주하며 살아간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 계측기 화면에 뜬 숫자를 아무런 의심 없이 ‘신뢰’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정확한 기준을 유지해 주는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59년 미터협약에 가입하며 세계 표준의 틀 안으로 진입했고, 이를 국내에 정착시키기 위해 1961년 ‘계량에 관한 법률’(이하 계량법)을 제정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계량법은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지형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 공급망이 자국 중심으로 재편되고 기술이 곧 안보가 되는 시대다. 이제 측정은 시장의 공정한 거래를 담보하는 역할을 넘어, 반도체·방산·우주항공 등 국가전략산업의 수율과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전략 자산, 즉 ‘측정 주권’의 개념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기에 정부가 금년 하반기 계량법 개정을 통해 ‘산업계량’의 정의와 지원 근거를 신설하려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고 고무적인 일이다. 기존 계량이 ‘시장의 공정성’에 방점을 두었다면, 이번에 새로 도입되는 ‘산업계량’은 제조 현장 등 산업 전반의 측정 정밀도를 끌어올려 품질 초격차를 확보하고 기술 주권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첨단산업 현장에서 초정밀 측정의 중요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머리카락 두께의 수만분의 일에 불과한 나노미터(nm) 단위의 미세 공정을 다투는 반도체 현장에서는 완벽한 측정이 초격차 제품 품질을 결정짓는다. 단 0.01 mm의 미세한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우주항공 산업 역시 결국 철저한 측정과의 싸움이며, 최근 가파르게 성장 중인 K-방산 수출 전선에서도 해외 바이어들의 까다로운 측정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필수 조건이다.
국가측정표준기관의 관점에서 ‘측정표준’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준을 확립하는 일이라면, ‘산업계량’은 그 기준이 산업 현장의 실핏줄까지 막힘없이 흐르도록 대동맥을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 두 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대한민국 첨단전략산업의 강력한 품질 초격차가 완성된다.
이미 글로벌 계량 패권 경쟁은 소리 없는 전쟁터다. 중국은 ‘계량강기(量强基) 2030’ 전략을 통해 계량을 국가 전략 자원화하고, 50개 이상의 산업측정시험센터를 구축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역시 첨단 측정 역량을 전략 자산으로 육성 중이다. 우리가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해외 측정 기술에 종속되어 첨단전략산업의 주도권을 내어주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과제는 법적 토대 위에 과감하고 신속한 인프라 투자의 싹을 틔우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계량법 개정을 계기로 국가전략기술 맞춤형 측정 솔루션을 제공하고, 권역별 산업계량지원센터를 육성해 산업 현장을 밀착 지원할 방침이다. 나아가 디지털 교정성적서와 AI 기반 가상 측정시스템을 도입하고, 미래형 측정전문인력 양성에도 속도를 낼 예정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제조·IT 강국이 된 것은 수십 년 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인프라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계량법 개정을 동력 삼아, 이제는 산업의 뿌리인 ‘측정 인프라’ 고도화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때다. 이를 통해 10년 후 대한민국이 반도체·바이오·방산·우주 등 국가전략산업에서 품질로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주권 강국으로 도약하기를 기대한다.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