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하다 제자母와 간통 혐의까지…“고칠 수 없다면 견뎌라” 철학자의 이유있는 외침[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세네카 편]

마누엘 도밍게스 산체스, 세네카의 죽음(일부 확대), 1871, 캔버스에 유채, 270x450cm, 프라도 미술관 [Galera online, Museo del Prado.,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216. 세네카

황제 제자의 사형 선고를 받은 철학자
질병·시기·유배 담금질 중 사유 계속
화·불행 다스리고 ‘못 바꾸는 환경’ 수용
구분하고 받아들이는 삶, 죽음으로 완성
‘부자 사상가’, “위선적” 비판도 있는데


사형수가 된 황제의 은사
저항없이 선고를 따랐지만…


마누엘 도밍게스 산체스, 세네카의 죽음, 1871, 캔버스에 유채, 270x450cm, 프라도 미술관 [Galera online, Museo del Prado.,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리하여, 그대는 당장 죽어야 마땅하리라.”

65년 4월, 로마 제국.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전령이 읊은 이 말을 듣고도 잠자코 있었다. 그가 안고 온 소식이 황제가 내린 사형 선고였는데도 그랬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에게 죽으라고 할 수 있는가!” 그의 지인이 외려 피가 맺힐 듯 주먹을 쥐었다. 그럴 만도 했다. 세네카. 그는 현재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으니. 즉, 그는 어릴 적부터 봐온 제자에게 죽음을 강요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세네카는 딱히 감정 동요가 없는 듯보였다.

“유언장을 쓸 시간은 줄 수 있는가?” 세네카는 전령에게 이런 질문이나 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군.” 졸지에 사형수가 돼버린 그. 이러한 통보에 또 고개나 끄덕일 뿐이었다.

세네카는 주위를 둘러봤다. 바로 옆에는 왈칵 울음이 터진 아내가 있었다. 건너편에는 직전까지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친구들이 있었다. 세네카는 입을 열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의 뜻을 남길 기회도 얻지 못했군. 그렇다면… 내가 단 하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내 삶의 자취(imago vitae suae)를 남겨드리겠소.” 이는 미리 준비했던 말이었던 양 막힘이 없었다.

마누엘 도밍게스 산체스, 세네카의 죽음(일부 확대), 1871, 캔버스에 유채, 270x450cm, 프라도 미술관 [Galera online, Museo del Prado.,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세네카는 차분히 걸었다.

옛 제자인 네로의 명을 저항 없이 따르려는 듯보였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 실패. 두 번째 시도도… 실패. 이쯤 되면 죽기도 전에 지칠 법도 한데, 그는 변함없이 꼿꼿하고 꿋꿋했다. 세네카는 옷을 벗었다. 고목 같은 몸을 보였다. 그대로 따뜻한 물이 있는 욕조로 갔다. 안으로 들어가 힘을 빼고 눕듯이 앉았다. 앞서 긁어낸 여러 자국에서 선홍빛 피가 피어났다. 그는 잠들 듯 눈을 감았다. 누가 끌어당기는 듯 팔을 늘어뜨렸다. 죽음치고는 우아한 방식이었다. 사형식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숭고한 순간이었다. 마누엘 도밍게스 산체스 <세네카의 죽음>을 보면 이 장면을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낭만적으로 재구성한 그림이라고 하지만, 당시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웬만한 문장보다 더 편하게 발을 맞춰준다. 화폭 속 어떤 이는 얼굴을 감싼 채 쓰러져 절규한다. 몇몇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공허한 표정을 짓고, 누군가는 그대로 굳은 양 자리를 뜨지 못한다.

그렇다면, 세네카는 대체 무슨 이유로 죽었을까.

누구도 납득하지 않는 이 분위기 속에서, 왜 그토록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여기서 미리 말해둘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세네카는 죽고 말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는 않았다는 것.

“고칠 수 없는 일 견뎌야”
‘철학자’ 세네카의 가르침


페테르 파울 루벤스, 죽어가는 세네카, 1612~1616, 패널에 유채, 65.2×50.8cm, 플랑탱 모레투스 박물관 [dams.antwerpen.b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세네카에게는 철학이 있었다.

내용은 간결했다. 일종의 선(先)구분, 후(後)수용이 그것이었다.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세네카는 매순간 본인이 ‘바꿀 수 없는 일’‘바꿀 수 있는 일’을 냉정하게 구분했다.

사건, 사고, 시대의 파고와 그 위를 떠다니는 운명 같은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생각과 판단, 거기에 맞춰 선택하고 행동에 나서는 건 내 마음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바꿀 수 없는 것 앞에서는 담담하되, 털끝만큼이라 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을 놓고선 가장 맹렬하고 치밀한 자세를 취한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자연, 보다 명확하게는 세상의 ‘자연적인 일’에 순응하기를 권한 스토아학파에 뿌리를 둔 태도이기도 했다. “고칠 수 없는 일은 견디는 게 최선이다.” 이는 세네카가 남긴 깨달음의 문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알고 있는 것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다르다. 알고 있는 것과 이를 실천하는 것 또한 다른 범주에 있다.

다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네카는 이러한 구분과 수용의 철학을 시험할 기회가 넘치도록 많은 삶을 살았다. 질병, 시기, 유배, 치명적 배신…. 모두 ‘내 몫은 붙들고, 내 몫이 아닌 일은 놓아두라’는 문장을 뼛속 깊이 새겨야 했던 나날이었다. 진작에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스토아학파와 마주한 시절
요양생활도…아프다 지쳤던 순간


테오도르 갈레, 세네카, 1605, 겐트대학 도서관 [Seneca de jongere, Opera, qvæ exstant omnia, Universiteitsbibliotheek Gen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세네카는 기원전 4년께 코르도바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작가이자 학자였다. 세네카는 혈육을 따라 어릴 적에 로마로 갔다. 거기서 크고 자랐다. 세네카는 곧 철학자 아탈루스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계승자였다. 세네카는 그를 통해 제대로 된 사유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향락에 젖은 삶을 꼬집고, 순결과 절제, 아울러 부당하고 불필요한 쾌락을 떨쳐낸 정신을 찬미했다. 내 안에서는 먹고 마시기를 더 줄여야겠다는 열망이 피어나곤 했다.” 이는 훗날 세네카가 당시를 돌아보며 남긴 문장이었다. 세네카는 아탈루스와 함께 소티온 등 여러 저명한 철학자 밑에서 문학과 문법, 수사학도 배웠다. 그는 특히나 질문이 많았다고 한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답을 찾을 때까지 집요하게 버텼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네카는 모든 공부를 접은 채 이집트로 갈 수밖에 없었다. 때문이었다. 세네카는 종종 호흡 곤란을 겪었다. 천식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시점에는 결핵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넌더리가 날 만큼 아팠다. 아프다 지쳐 그릇된 선택도 고민할 지경이었다. 세네카는 이집트에서 몸을 다독였다. 날씨로만 보면 로마보다 이 땅이 나았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총독 가이우스 갈레리우스가 그의 이모부였다. 그는 권력의 신임을 받는 거물이었다. 이모 또한 조카를 끔찍이 아꼈다. 세네카는 덕분에 최대 10년 정도의 요양 생활을 했다. 그사이 또래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을 보며 억울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책을 또 펼쳤다. 무르익는 시간이었다. 그때부터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했다.

세네카는 31년께 로마로 돌아왔다. 나이는 서른다섯 전후였다.

그는 곧 재무관직에 올랐다. 성공적인 진로였다. 그에게는 피나는 연습으로 다져진 웅변술이 있었다. 몸을 회복하는 사이 읽고 쓴 문장들로 채운 지식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삶의 경험도 있었다. 그는 초연해져 있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홀릴 수밖에 없었다. 세네카는 부와 명성을 차곡차곡 쌓았다. 하지만 앞서 예고했듯, 그의 삶은 또 몇 번이나 꼬이게 된다. 그가 바꿀 수 없는 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시기,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누명


칼리굴라의 대리석 초상 흉상, 37~41년경, 대리석,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www.metmuseum.org,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제3대 황제 칼리굴라(네로의 전 전대 황제)를 간결하게 칭한다. “미친”이라고.

칼리굴라는 어느 정도 판을 읽는 능력이 있었다. 통치에 필요한 이해력이 있었으며, 정책을 짜는 데 있어 나름의 행정력도 보였다. 즉 완전히 무능한 군주라곤 할 수 없었다. 다만 문제는 성격이었다. 그는 많은 순간 격정적이었다. 때로는 ‘술에 취한 듯’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전설처럼 들리는 일화에 따르면, 세네카는 그런 칼리굴라의 눈 밖에 나버렸다. 황제보다도 연설을 잘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세네카는 칼리굴라에게 “석회 없는 모래”라는 조롱도 들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속 따위가 없다는 식의 비아냥이었다. 칼리굴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네카를 죽일 계획까지 짰다. 처분을 명령하기 직전, 칼리굴라의 정부 중 한 명이 이를 막아 세웠다고 한다. “저 병치레가 잦은 말라빠진 몸으로는 가만히 둬도 죽을 것”이라는 말로. 훗날 세네카는 “나는 죽음에 가까운 듯했기에 외려 구원받을 수 있었다”며 그때를 돌아봤다고 한다.

게라르드 반 혼토흐로스트, 세네카의 죽음, 1652년경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위기는 또 있었다.

간통 혐의였다. 그것은 제4대 황제, 기번의 표현으로는 “허약했던” 클라우디우스(네로의 전대 황제) 치세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는 겨우 4년의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암살당한 칼리굴라의 뒤를 이어받은 자였다. 다만 이번에는 황제가 아닌, 그의 황후 발레리아 메살리나 등이 권력 투쟁을 벌이던 중 뒤집어쓰게 된 누명이었다. 세네카는 법정에 섰다.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 죽을 위기에 처했다. 지겨운 병과 황제의 시기에 이어 이번에는 날조. 벌써 세 번째였다. 그나마 다행히 클라우디우스가 형벌을 유배 정도로 정리했다. 목은 붙을 수 있었다. 몸은 저 멀리 황량한 땅, 코르시카섬으로 가야 했지만. 그렇게 또 한 번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는 운명 앞에 서야 했다.

섬에서의 유배 생활,
‘화’ 들여다보며 성찰하다


루카 조르다노, 세네카의 죽음, 1684~1685, 캔버스에 유채, 155x188cm, 루브르 박물관 [Web Gallery of Ar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41년부터 49년까지, 8년. 그러니까, 사십대 중반부터 오십대 초반까지. 세네카가 코르시카섬에서 보낸 기간이었다.

세네카도 인간이었다. 분했다. 약이 오르고, 울화도 치밀었다. 불행과 부조리 앞에서 모욕감도 느꼈다. 하지만 역시나 또 어쩌겠는가. 그는 신이 아니었다. 전설 속 영웅도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이 외딴섬의 한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많은 순간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자신의 분노와 마주하고, 대화하고, 심연 속 타오르는 눈동자까지 들여다봤다. 따지고 보면 는 위험했다. 놈은 이성을 흔들었다. 분별없는 광기로 내몰았다. 그것은 솔직함으로 포장할 수만은 없었다. 외려 사치, 낭비, 어리석음과 같은 못난 상태와 가까웠다. 방황하는 눈빛, 달아오르는 얼굴, 얼룩덜룩하고 비뚤어진 자세…. 이는 틀림없이 추하게 보이기 쉬운 모습이었다. 그뿐인가. 어떤 상황이든 당장 화를 낸다고 해 달라지는 것 또한 없었다. 강요나 위협 등으로 행여나 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다고 한들, 그것은 반드시 후폭풍을 불렀다. 인간의 언어와 몸짓 따위 관심 없을 우주가 개인의 울분을 진심으로 동정할 리 없었다.

화를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를 내지 않는 일이었다.

더 필요한 건, 화가 나기 전에 이를 막아내는 일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 기적과도 같은 내면의 용기와 인내를 붙든 채 쓸려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품위를 지키면, 적어도 나의 적들에게 기쁨을 주지는 않으리라. 세네카가 또 한 번 내린 결론이었다. 세네카는 유배 기간, 《분노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등을 쓰고 그만의 철학을 정리했다.

5대 황제 네로의 스승 ‘화려한 부활’
하지만…“위선적” 비판에 노출되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세네카와 네로, 1617년경, 패널에 유채, 71×89.5cm [harveymillerpublishers.files.wordpress.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세네카가 그렇게 담금질을 이어가는 사이, 로마에서는 격동이 일고 있었다.

정쟁과 암투에 몰입하던 황후 메살리나도 죽었다. 그녀는 치밀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허약했던” 남편,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만만히 봐 반역까지 꾀했지만, 결과는 응징과 처형이었다. 빈자리를 채운 새로운 황후는 소(小) 아그리피나였다. 그리고, 그녀가 품에 안고 온 아들이 바로 네로였다. 아그리피나도 만만찮은 맹수였다. 내가 데려온 자식, 네로를 어떻게든 황제로 만들겠다. 그녀의 목표는 하나였다. 아그리피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 그녀가 보인 움직임 중 하나가 외딴섬의 철학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웅변과 문장으로는 세네카를 뒤따를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세네카는 그렇게 네로의 스승(magister)이자 친구(amicus)가 돼 삶과 정치를 가르칠 자리에 섰다. 둘의 나이차는 마흔한 살이었다. 아그리피나도 이 과정에서 명분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내 자식이 최고의 제왕학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사이 그녀는 클라우디우스를 구슬리고, 군대도 부추겼다. 모든 퍼즐이 맞춰질 무렵에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했다. 시기가 절묘했던 만큼, 아그리피나 주도의 독살이란 말이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거론되고 있다.

조르주 앙투안 로슈그로스, 메살리나의 죽음, 1916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54년, 10월13일. 네로가 제5대 황제로 올랐다. 그의 뒤에는 웃음짓는 아그리피나가 있었다. 또, 곁에는 세네카도 함께 있었다. 네로의 즉위도 극적이었지만, 세네카의 복귀 또한 신화만큼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는 또 한 번 살아서 돌아왔다.

‘네로의 초기 5년’(quinquennium Neronis)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네로가 혼미해지기 전, 나름의 선정을 베풀었던 시절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리고, 이 기간은 세네카가 그와 함께했던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 세네카는 네로가 연설문을 쓰는 데 도움을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치 철학을 조언하고, 정치와 정무적인 상황에서 충고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구스타프 베르트하이머(1847~1902), 아그리피나의 난파, 미상, 캔버스에 유채, 160×240.5cm.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네로는 아그리피나를 죽이기 위해 난파 직전의 배에 그녀를 태운 적이 있다고도 한다. [Heritage Auctions,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런 네로가 59년 이후로 서서히 일그러진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네로아그리피나, 즉 자기 친어머니를 죽인 이후였다. 사실 네로는 본인보다 강골인 아그리피나를 진작부터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사소한 걸음걸이부터 결혼 상대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 그녀에게 점점 더 악감정을 키웠다. …그녀가 나를 황제로 올린 만큼, 나를 황제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공포와 불안은 ‘감히’라는 화를 자극하고, 분노는 ‘그렇다면 내가 먼저’라는 광기까지 불러들였다. 그래서 살해한 것이었다. 세네카가 가장 경계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세네카가 수습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단 네로의 만행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연설문을 올렸다고 한다. 당장 바꿀 수 있는 일, 정치적 불안과 혼란의 김부터 빼는 것.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는 일, 죽은 이를 살려내는 것…. 이러한 판단에 따른 행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이에 따라 세네카는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통제불능 네로, 또 찾아온 위기
‘압도적’ 재산 지금도 논쟁거리


안토니오 리치, 네로와 아그리피나, 19세기경, 알라 폰초네 시립박물관 [Cremona, Museo Civico Ala Ponzon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올라가는 건 힘들지만, 내려가는 건 쉽고 즐겁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이성도 그렇다.

세네카의 말은 ‘내려가기 시작한’ 네로에게 통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또한 황제의 성가신 눈엣가시가 된 듯했다. 세네카는 고발도 당했다. 수일리우스라는 자의 행동이었다.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다. 세네카가 가혹한 조건으로 고리대금업을 해 엄청난 뒷돈을 받았다는 게 하나였다. 후자가 더 치명적이었다. 과거의 어느 날, 세네카가 황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와 사실상 간통을 한 적이 있다는 게 그것이었다.

세네카는 원래도 돈이 많았다. 집안부터 부자였고, 권력의 실세로 있을 때 벌어들인 수입도 상당했다. 그는 평소에도 ‘철학자 주제에 돈이 많다’는 말로 숱한 지적을 받아왔다. 이번 공격 또한 그 연장선으로 여겼을 것이다. 세네카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는 돈을 갖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고. 왜? 돈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기에. 돈의 양보다는 내가 그것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는지, 아니면 노예가 돼 매달리고 있는지를 따지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루카 조르다노, 세네카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바이에른 주립 회화 컬렉션 [Monaco di Baviera,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앞서 나온 그의 핵심 철학. 그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의 구분이지 않은가. 된다면 최선을 다하고, 안 된다면 깔끔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돈은 그에게 더 많은 선택지와 영향력을 줄 수 있었다. 더 넓은 운동장에서 철학을 실천할 여유도 내어줄 수 있었다. 돈을 이렇듯 신발과 마차처럼 수단으로만 대하면 문제 될 게 없다는 식이었다. 아울러 모든 수단이 그렇듯 곁에 있다면 유용하게 쓰고, 어쩌다 떠난다면 미련 없이 보내주면 된다는 의견이었다. 논쟁의 초점은 재산 규모가 아닌 이를 대하는 자세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세네카는 그 점에 대해선 결백하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이를 배부른 자의 변명 내지 자기합리화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세네카가 정말 ‘상업적인’ 고리대금업을 한 게 사실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수 있다. 수단 아닌 목적으로 돈을 대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기에 그렇다. 다만,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에 따르면 고발인 수일리우스는 미심쩍은 이였다. 본인부터도 이미 횡령 혐의가 있었다. 결국 세네카의 조치로 재산 절반이 몰수된 후 추방당하기도 했던 자였다고 한다. 아울러 누구도 아닌 황제의 어머니를 구설에 함께 올렸다는 건, 네로의 묵인 내지 허락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즉, 이번 고발건은 이 자체로 거대한 기획이자 음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네카의 재산 축적에 대한 ‘위선’ 논란, 고발 내용의 사실 유무 등을 놓고선 지금도 매서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네로 암살’ 음모에 동참했을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통제’…담대한 최후


자크 드 랑주(추정), 세네카의 죽음, 1630~1650, 캔버스에 유채, 120x160cm [Dorotheu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세네카는 끝없는 공격에 지쳤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물러섬이었다.

세네카는 62년과 64년, 네로에게 거듭 은퇴를 청했다. 네로는 그때마다 뜸을 들였다. 영향력은 빼앗아갔지만, 옷을 벗게 만들지는 않았다. 세네카는 서서히 궁과 멀어지기를 택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만큼, 시골 영지로 돌아가 글을 쓰고 지인들과 토론을 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1년이 또 흐르고, 65년 4월. 갑자기 찾아온 전령이 황제의 말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대는 당장 죽어야 마땅하리라”는 그 명령을.

네로는 직전에 암살 위기를 겪었다. 네로의 반대파는 그를 죽인 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라는 인물을 새로운 구심점으로 추대할 생각이었다. 이른바 ‘피소 음모’였다. 하지만 계획은 너무 쉽게 탄로났다. 결과는? 살아남은 네로의 무자비한 숙청이었다. 네로는 이번 일로 최소 열여덟 명을 죽여야 할 자로 지목했다. 그 안에 세네카도 있었다. 세네카가 실제로 그 일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즉, 세네카의 입장에선 갑작스럽고도 억울한 순간이었을 터였다.

마누엘 도밍게스 산체스, 세네카의 죽음(일부 확대), 1871, 캔버스에 유채, 270x450cm, 프라도 미술관 [Galera online, Museo del Prado.,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마누엘 도밍게스 산체스, 세네카의 죽음을 위한 스케치, 1870, 캔버스에 유채, 30x50cm, 코르도바 미술관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래도 이쯤 되면 세네카가 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바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악을 쓰고, 발버둥을 치고, 모르는 척을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단순한 패배주의라고 볼 수 없었다. 그간 벌어진 모든 일과 사정을 따졌을 때 내릴 수 있는, 지극히 이성적인 결론이었다. 이미 군대 또한 집을 에워싸고 있는 듯보였다. 이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건, 죽음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와 품위뿐. 그래서, 세네카는 담대하게 죽었다. 어쩔 수 없으니 목숨은 내놓지만, 내 철학과 품격만은 빼앗지 못한다는 자세였다. 다시 산체스의 <세네카의 죽음>을 보라. 세네카가 담긴 욕조 위에는 월계관 모양의 풀로 엮은 고리가 올라가 있다. 이는 승리와 명예의 상징이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죽고 말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는 않았다.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는 만큼 살지 않고, 해야 하는 만큼 산다.”

세네카는 언젠가 이런 글을 썼다. 삶의 양보다는 질을 생각하고, 그릇된 삶보다는 고결한 죽음을 택하는 게 낫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끊임없이 그것을 고민했기 때문일까. 훗날 네로의 비참한 말로와 견줘보면, 그는 자기가 멈춰야 할 때를 잘 맞힌 격이었다.

참고자료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민음사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타키투스의 역사, 한길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화에 대하여, 현대지성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인생의 짦음에 관하여, 현대지성

Asmis, Elizabeth; Bartsch, Shadi; Nussbaum, Martha C., Seneca and his World(Seneca: Anger, Mercy, Reveng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Ker, James.,The Deaths of Seneca,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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