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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질투하는 키르케(일부 확대), 1892, 캔버스에 유채, 180.7×87.4cm, 남호주 미술관 [Google Art Projec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키르케는 타오르는 듯 풍성한 머리칼을 가졌다. 두 눈은 황금빛이었고, 곧게 뻗은 등허리는 광선처럼 꼿꼿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대해 대놓고 “사랑스러웠다”고 노래했고, 아폴로니오스는 눈동자에 놓고 “빛처럼 반짝였다”고 표현했다.
키르케는 혈통도 고귀했다.
여러 전승에 따르면 그녀 몸에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기운이 있어서일까.
그녀는 탁월한 외모만큼이나 내세울 재주도 많았다. 특히나 마법과 예언, 약초와 물약에 능했다. 이를 끌어모아 여러 묘약(妙藥)을 만드는 일에도 특출한 면을 보였다. 그런 키르케는 어릴 적부터 꿈을 키웠다. 자기 눈에 맞는, 아름답고 재주 많은 상대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일. 그러나, 그녀는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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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질투하는 키르케(습작), 종이에 목탄과 연필, 24x22cm [Sotheby‘s London,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인기척이라곤 거의 없는 섬에 사는 점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녀의 성격이었다.
키르케는 잔혹했다.
심기를 털끝만큼이라도 건드리면 거리낌없이 위해(危害) 마법을 걸 만큼 파멸을 즐겼다. 그렇게 해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일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니 신과 인간 사이 평판도 바닥을 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키르케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는 바다의 하급신, 반인반어의 글라우코스.
키르케는 멈칫했다. 그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기에. 하지만, 글라우코스가 마음에 둔 이는 따로 있었다. 키르케를 찾아온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글라우코스는 얼마 전 스킬라에게 사랑을 말했다. 그녀는 물과 목욕을 좋아하는 투명한 피부의 님프였다. 말은 닿았지만, 마음은 통하지 않았다.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 통보뿐이었다. 스킬라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스킬라가 하반신은 물고기인 그의 모습에 그저 도망치듯 떠났다는 말도 있다. 글라우코스는 그러고도 스킬라를 놓지 못했다. 그릇된 집착이었다. 그래서 글라우코스는 키르케를 만난 것이었다. 당신이 만들 줄 안다는 그 약. 사랑의 묘약을 한 병만 꺼내줄 수 있는지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키르케는 먼저 글라우코스에게 위로하는 척 다가섰다.
머리를 쓰다듬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슬쩍 말을 흘렸다. “내가 그 여자 대신 당신을 더 사랑해줄 수 있다”는 은근한 고백이었다. 글라우코스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키르케의 두 눈을 봤다. 그의 표정에는 정색만이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감동이나 벅참 따위 감정이라곤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키르케여. 나에게는 스킬라뿐이오. 그 건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반응은 짧고 단호했다.
키르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에게는 스킬라뿐’이라는 말을 거듭 곱씹었다.
…정말 그대에게는 스킬라밖에 없을까? 거절당한 사랑은 질투와 복수를 낳았다. 그리고, 이 두 발의 화살은 모두 애꿎은 스킬라를 향해 날아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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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질투하는 키르케, 1892, 캔버스에 유채, 180.7×87.4cm, 남호주 미술관 [Google Art Projec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늦은 밤, 키르케는 스킬라가 물놀이를 하는 웅덩이에 독초의 물을 풀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질투하는 키르케>가 그 장면을 담고 있다. 키르케의 눈빛은 매섭다. 노려보는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건 그저 분노뿐. 짙은 청록색 가운은 두른 채 아주 꼿꼿하게, 심지어는 당당한 자세로 즙을 쏟고 있다. 녹색 용액은 하릴없이 아래로 흐른다. 그녀가 맨발로 떠 있는 물 아래, 심상찮은 거품을 만들며 파동을 일으킨다. 키르케가 선 곳만 휘몰아친다. 숲은 고요하고, 한 뼘 너머 물결은 잔잔하다. 이는 그녀의 존재감, 정확히는 그녀가 품은 악감정의 묵직함을 더 부각하게 한다.
이것은 키르케가 가진 최악의 액체였다. 몸이 닿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마는 저주의 물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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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질투하는 키르케(일부 확대), 1892, 캔버스에 유채, 180.7×87.4cm, 남호주 미술관 [Google Art Projec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스킬라는 아무것도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한 번 그 웅덩이에 풍덩 잠겼다.
키르케는 스킬라가 머리칼 한 올까지 물에 젖은 모습을 봤다. 그제야 주문을 외웠다. 갑자기 비명이 나왔다. 그것은 스킬라가 내는 소리였다. 스킬라는 괴로운 듯 두 팔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몸의 모든 부위가 울룩불룩하게 뒤틀렸다. 끝내는 개의 형상을 한 머리 여섯 개가 뱀처럼 길게 솟아나고는, 그대로 무엇이든 씹어 먹는 바다 괴물이 되고 말았다. 해사한 외모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워터하우스 또한 그림에 스킬라의 운명을 그렸다. 키르케의 발밑을 다시 보면,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다. 길쭉한 목과 몸통, 커다란 지느러미의 그 존재. 아마, 더는 스킬라라고 할 수 없게 된 스킬라일 것이다. …글라우코스여. 이래도 그대에게는 스킬라밖에 없는가? 키르케가 이같은 악행을 저지른 이유였다.
글라우코스는? 도망쳤다. 스킬라를 피해, 아울러 키르케를 피해 바닷속 깊이 모습을 감췄다.
따지고 보면 그에게도 이번 재앙의 책임이 있었다. 명확한 거절의 말을 들었으면 뒤에서 꼼수를 부리지 말아야 했다.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를 키르케를 찾아가지도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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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질투하는 키르케(일부 확대), 1892, 캔버스에 유채, 180.7×87.4cm, 남호주 미술관 [Google Art Project,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키르케는 그런 글라우코스를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다면 이제 복수의 맛도 본 만큼 스킬라를 님프의 본모습으로 돌려줄 것인가. 키르케는, 그러지 않았다. 방치했다. 그대로 있게 했다. 끔찍한 괴물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게끔 했다. 글라우코스도 글라우코스지만, 그녀야말로 마지막까지도 최악의 인성을 보여준 것이다.
스킬라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의 삶은 난데없이 무너졌다.
스킬라는 집착의 피해자이자, 질투의 희생양이었다. 스킬라는 앞으로는 원망, 뒤로는 절망에 사로잡혀 나날이 포악해졌다. 부푼 몸집에 걸맞은 바다로 나가선, 어부와 탐험가 등 보이는 모든 이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위협하기도 했다고 한다.
괴물이 되기 전 스스로 세상과 등졌다는 설도 있다. 신이 그런 스킬라를 불쌍히 봐 암초로 만들어줬지만, 차라리 다른 많은 이에게 그랬듯 별자리로 만들어줬으면 어땠을까. 그녀는 암초가 된 운명 또한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습 그대로 오가는 배를 끌어들여 난파시키는 등 주변 뱃사람을 위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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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턴 리비에르, 돼지들과 함께 있는 키르케, 1896 [arthive.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