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사진전
입과 손 계속해 놀린 최악의 선동가
약한 몸, 실패 거듭…오염된 길 올라
영웅·적 만들어 입맛 맞게 여론조작
히틀러 돕고 ‘총력전’ 연설로 피바람
남긴 건…불타는 도시, 그릇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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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쿠프 공항에서 꽃다발을 든 채 웃고 있는 37세 요제프 괴벨스(일부 확대), 1934, 폴란드 국립 디지털 아카이브 [Unknown author, Narodowe Archiwum Cyfrowe, Public Domain, commons.wiki |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4년 3개월간 이어간 <후암동 미술관>이 2개월가량 휴관에 들어갑니다. 지난 늦봄, 동그란 생명체가 태어났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아기와 함께 몇 조각 추억을 줍고 오겠습니다.
오염된 땅 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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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제프 괴벨스, 1916, 툴레 역사 아카이브 [Unknown author, Archivo Storico Thul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는 몸이 약했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다. 폐렴에 걸리고, 골수염도 앓았다. 병 때문에 오른발이 굽는 증상까지 겪었다. 없는 살림에 큰 수술도 했지만, 결국 다리를 저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는 그런 모습이 싫었다. 우울감이 차오르면 다락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머리는 좋았다. 그는 우등생이었다. 특히 글을 잘 썼다. 독해력도 탁월했다. 작문 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아 학생 대표로 연설을 한 적도 있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등 독일의 여러 명문 대학에서 문학과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늘 기침을 달고 살긴 했지만, 그 와중에 박사 학위까지도 무난하게 딸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안광은 없었다. 표정은 어둡고, 분위기도 음울했다. 자랑스러웠던 대표 연설? “유감스럽지만, 웅변가 자질을 갖추지는 못했다”라는 학교장의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부러움을 산 박사 학위? 이를 따고도 취업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작가를 꿈꾸며 소설도 쓰고, 희곡도 몇 편 구상해봤지만 이 또한 신통치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나라는 얼마 전 전쟁에서 졌다. 그냥 전쟁도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크디큰 포화 속에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희망이 없었다. 지금도 쉽지 않지만, 앞으로는 더 힘든 상황이 도래할 게 분명해보였다.
사내는 그쯤부터 뒤틀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번번이 실패해야 하는가.
그는 실패를 본인에게서 찾지 않았다.
탓할 대상과 그 이유를 찾고자 방황했다.
그러다 타깃을 잡았다. 기성 정치권이었다. 당장의 혼탁한 사회와 맥없는 패배. 이는 그들이 과감해야 할 때 과감하지 않고,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해 생긴 결과라고 믿었다. 권력자와 자본가가 자기 잇속이나 챙기다 보니 지금 같은 시대가 왔다고 막무가내로 확신했다. 이런 생각이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원망의 씨앗을 또 다른 오염된 땅에 뿌리고 만다.
또 그런 와중에, 사내는 때마침 한 남자를 봤다.
그는 당시 독일국 뮌헨에서 “옛 영광을 되찾자”는 식의 구호로 체제 전복을 시도한 자였다. 결국 붙잡혀 감옥신세까지 졌지만, 여전히 “나의 투쟁”을 이어가겠다며 손을 드세게 흔들던 인간이었다. 사내의 눈이 트였다. 그래. 세상이 나에게 맞춰주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투쟁해 ‘나에게 맞게끔’ 바꾸면 될 일이지 않은가. 오염된 씨앗은 위험한 사상으로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사내는 정치를 하기로 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이른바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런 뒤, 그곳에 있던 문제의 이 남자와도 곧 마주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의심도 있었다. 그의 주장 중 각론에선 분명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될 덕목을 갖췄다. 타고난 호민관이자, 미래의 독재자였다.” 훗날 이런 식의 회상을 할 만큼, 이 인간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눈앞의 그가 인류사상 최악의 학살자가 될 것을 모른 채. 아니, 언뜻 보였다고 한들 이를 못 본 척한 채로.
아직도 가래가 끓는, 여전히 불편하게 걷는 사내의 이름은 요제프 괴벨스였다.
아울러, 그런 그가 자신의 글과 말을 평생 바치기로 한 상대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영웅과 악당을 창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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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서 열린 ‘국가 노동의 날’ 행사에서의 요제프 괴벨스, 1933 [Uncredited photographer, Press photo distributed through a news agency, audiovis.nac.gov.pl, szukajwarchiwach.gov.pl,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괴벨스는 그만의 방식으로 정치를 해석했다.
어떤 정치는 이성이 아닌 감성만으로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그간 쌓은 문장력을, 지금껏 다져온 문학적 감수성을 활용해보기로 한다. 이를 무고한 시민을 향한, 선전선동의 칼로 내질러볼 생각이었다.
가령 괴벨스는 앞장서 울먹이며 영웅을 만들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핏대를 세우며 악당도 창조했다. 영웅을 중심으로 결속하게 하고, 악당을 몰아세우면서 또 한 번 단합하게 이끌었다. 교묘한 기만과 협잡이었다. 1926년, 괴벨스는 베를린 내 나치당을 관리하는 가우라이터(Gauleiter·일종의 지역 최고 책임자)에 올랐다. 이 장기를 십분 활용했다. 효과는 대단했다.
그는 사실 아닌 효과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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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쿠프에서의 요제프 괴벨스, 1934, 옝제주프 프십코프스키 박물관 [Unknown author, Muzeum im. Przypkowskich w Jdrzejowi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호르스트 베셀은 나치 산하의 준군사조직 ‘돌격대’에서 활동한 20대 청년이었다.
베셀은 집안이 좋았다. 명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의 법학도로 장래도 밝아보였다. 괴벨스의 말에 쉽게 감동했고, 그의 뜻에 따라 과격한 면도 자주 보였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어느덧 거리의 폭력배 집단으로 악명을 떨쳤다. 당에서는 그런 저돌적인 면을 외려 좋게 봐 차기 지도자감으로도 점 찍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랬던 베셀이 혼수 상태에 빠졌다. 독일 공산당원들의 습격에 따른 일이었다. 괴벨스는 신문 《공격》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이는 그가 발행하는 선전 매체였다. 괴벨스는 베셀이 죽어가는 상황을 생생하게 중계했다. 특기인 작문 실력을 줄줄이 발휘했다. 베셀이 숭고하게, 아울러 낭만적으로 세상과 등지고 있다는 식으로 포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추켜세우고, 정적을 놓곤 “때려잡아야 한다”고 맹폭했다. ‘돌격대’ 소속으로 베셀과 그의 동료들이 벌인 사건 사고에 대해선 입을 싹 닫은 채였다.
베셀은 어느덧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청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한 달 반을 버티다 고통스럽게 죽었는데, 장례식에 아우구스트 빌헬름 황자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괴벨스는 땅에 묻힌 베셀의 손도 놓지 않았다. 베셀이 쓴 글을 토대로 만든 곡,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당가이자 대중적 노래로 만들기 위한 판도 짰다. 그 결과, 괴벨스는 베셀을 영웅이자 순교자 격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는 거기서 나오는 모든 감정과 상징을 나치당의 자산으로 바꿨다.
그런 한편으로는 낙인도 열심히 찍었다.
대표적 희생양은 베를린의 부경찰청장 베른하르트 바이스였다. 괴벨스는 그가 미웠다. 무슨 정치적 작당을 꾸미려고만 하면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었기에 그랬다. 그래서, 괴벨스는 바이스를 위선적인 ‘유대인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웠다. 그를 베른하르트가 아닌 이지도르(유대인을 연상시키려는 의도로 붙인 이름) 바이스로 칭하는가 하면, 신문 《공격》 등을 또 활용해 인신공격과 근거 없는 비방을 거듭 이어갔다. 바이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괴벨스를 거듭 고소했다. 하지만, 무작정 쏟아지는 온갖 말들에 그의 입지와 명예는 계속 추락할 뿐이었다. 이런 식이었다. 괴벨스는 그렇게 나치의 적을 내몰았다. 영웅을 만드는 기술, 악당을 창조하는 방식 모두 악질적이었다. 진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싶고, 무엇을 믿고 싶어하는가.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이들의 격정과 눈물을 끌어낼 수 있는가. 기실 그가 주목한 건 사실이 아니라 효과였다.
대중계몽선전부 장관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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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 1934, 폴란드 국립 아카이브 검색 포털 [Unknown author, www.szukajwarchiwach.gov.pl,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괴벨스는 ‘상공의 히틀러’도 만들었다.
그 시절 가장 현대적인 기기. 그런 한편 아직은 무섭고 불안하기도 한 교통수단, 비행기.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이를 권했다. 열린 태도와 대담한 마가짐이 있는 듯 띄우려는 홍보 전략이었다. 나라 곳곳 시민에게 더 촘촘하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판단도 깔려 있었다. 그렇게 하늘에 히틀러가 있었다면, 땅에는 섬뜩한 구호가 들끓었다. “가면을 벗기자!”, “목을 붙잡자!”, “기름 낀 배를 짓밟자!”는 식의 짧고 과격한 문구였다. 많은 이가 앞장서 핏대를 올렸지만, 괴벨스의 존재감은 이곳에서도 상당했다. 그는 어느덧 옛 모욕을 딛고 웅변의 대가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효과적인 연설을 위해 연극까지 연구했다. 원래도 이를 좋아하긴 했지만, 시험 준비하듯 배우들의 대사와 동작을 뜯어봤다.
당시 독일은 지쳐 있었다. 1차 대전 패배 후 물어내야 할 전쟁 배상금은 여전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최악의 경제공황까지 드리워지면서, 많은 이가 내일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강해보이는 지도자. 일단 뽑으면 가만히는 있지 않을 듯한 정치 집단. 언젠가부터 사회는 이를 원하는 듯보였다. 그리고, 무게추는 야속하게도 그 방향으로만 내려갔다. 결국 1933년 1월30일. 독일 나치 정권이 탄생하고 만다.
그런데, 훗날 미래가 증명했듯 정작 가장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던 건 그들이었다.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런 글을 썼다. 그가 칭한 ‘우리’가 가는 곳은 후자였다. 그곳은 가장 악랄하다 못해, 가장 끔찍하고 추악한 수렁이었다. 괴벨스는 나치 독일의 대중계몽선전부 장관으로 부임한다. 당시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메시지와 이벤트를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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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그 왕립극장에 있는 요제프 괴벨스, 1942, 헤이그 시립 아카이브 [Anonymous, Haags Gemeentearchief,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괴벨스는 라디오를 사랑했다.
괴벨스는 라디오를 통해 지도자에 대한 충성, 우리 민족의 순수성, 국가의 번영을 위한 희생 등 그가 규정한 ‘독일적’ 가치를 열심히 송출했다. 라디오는 본질적으로 내용을 흘리기만 할 수 있는 기기다. 청자는 들을 수 있을 뿐, 실시간으로 반박을 할 수 없다. 이 특징을 철저히 꿰뚫어 일방향 선전의 도구로 삼은 격이었다. 그는 이른바 ‘인민의 수신기’라고 칭한 값싼 라디오 배급도 진두지휘했다. 이는 1938년까지 거의 1000만대 이상이 팔리게 된다.
이밖에 자극적인 구경거리도 만들었다. 대표 사례로는 책 화형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괴벨스는 나치 학생들을 시켜 그가 ‘비독일적’이라고 여긴 책을 층층이 쌓아 올렸다. 그러곤 불씨를 던졌다. 대규모 처형을 행하듯 태워버렸다. 그가 지목한 제국의 적들, 가령 유대인과 외국인, 자유주의자와 평화주의자 등이 쓰거나 이를 다룬 서적은 연기가 돼 피어올랐다. “자국의 지배를 위해 모든 기술적 수단을 완벽하게 활용했다. 라디오와 확성기 등 장치로 인해 800만명의 사람들이 독립적 사고를 빼앗겼다.” 나치 독일의 군수부 장관 출신인 알베르트 슈페어는 당시 독일 사회를 이렇게 돌아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괴벨스는 공격 타깃을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좁혔다. 역시나 유대인이었다.
말은 계속 독해졌다. 비난은 멸시로, 멸시는 증오로, 증오는 결국 폭력을 부를 명분의 탈을 썼다. 이를테면 ‘탐욕스러운 자들’에서, 이제는 ‘곤죽을 내버려야 할 놈들’로. 결국, 절대 터져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만다.
학살이 구호에서 현실이 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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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쿠프 공항에 있는 요제프 괴벨스, 1934, 폴란드 국립 디지털 아카이브 [Unknown author, Narodowe Archiwum Cyfrow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나치 독일의 핍박으로 쫓겨나는 처지가 된 폴란드계 유대인, 열일곱 살의 헤르셸 그린슈판.
부모는 이미 그들에게 재산을 빼앗겨 빈털터리였다. 집안 자체가 미래는커녕 바로 내일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린슈판은 결심했다. 본인이 만날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의 독일 인사를 죽이기로 맹세했다. 그린슈판은 프랑스 파리로 갔다. 권총을 구했다.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문을 열었다. “나는 독일 정보기관의 스파이”라고 입을 뗀 후 “극비 문건을 전달해야 하니 지금 부를 수 있는 최고위직을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이게 통했다. 3등 서기관이었던 에른스트 폼 라트가 찾아왔다. 그린슈판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꺼내 든 건 총구였다. 탕. 총소리가 들렸다. 라트는 쓰러졌다. 그는 이틀 뒤 사망했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그리고, 괴벨스가 이 사건을 물었다.
그는 히틀러의 허락을 받고 발언권을 얻었다. 프레임을 짰다. “어느덧 유대인이 조국을 공격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식으로 겁을 주고, “그러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취지로 분노를 부추겼다. 나치당원과 돌격대를 중심으로 피바람이 불었다. 독일과 그 일대 곳곳에 남아있는 유대인이 운영하는 상점, 유대교의 회당인 시나고그(synagogue) 등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유대인 2000여명(영국 홀로코스트 학자 리처드 에반스의 추산)이 죽었다. 상점 최소 7000여개, 시나고그 267여곳도 파괴됐다. 유대인 공동묘지도 엉망이 돼 있었다.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벌어졌던 일. 유대인 상점의 유리창이 모조리 깨지고, 반짝이는 파편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던 사건. 여기에는 곧 ‘수정의 밤’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번 일을 계기로, 유대인을 향한 학살은 정치적 구호에서 현실의 장면이 되고 만다.
총칼만큼 날카롭게 들이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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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일본 합작영화 시사회 현장에 온 요제프 괴벨스, 1937 [Unknown photographer,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괴벨스의 입과 손은 쉬지 않았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벌인 최악의 짓거리, 제2차 세계대전. 괴벨스는 히틀러가 주장하는 일명 ‘확장주의 정책’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시작을 알렸을 때 “폴란드가 (먼저)독일계 소수 민족을 탄압했다”고 선동을 주도한 이도 그였다. 영국이 몰래 시한폭탄을 챙겨 미국인 수백명을 죽이려고 했다는 식의,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을 송출해 적군인 양측 사이 균열을 내려고 한 자도 그였다.
질 도박에 타인 목숨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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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바 브라운,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1939 [Eva Braun, Eva Braun‘s photo album, catalog.archives.gov,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러나 독일 나치에 맞선 연합국의 분투와 히틀러의 무리수 등으로 2차 대전 판세가 차츰 기운다.
선전선동도 기본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괴벨스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괴벨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가 지어낸 전체주의의 이상을 신문 기고와 라디오 낭독으로 쉼 없이 설파했다. 1500여대의 이동식 영화 차량을 들여와 곳곳에 선전과 오락 영상도 틀어줬다. 글 한 문장과 말 한마디가 병사 한 명을 만들 수 있다면, 아마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공장을 돌렸으리라.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독일 나치는 소련과 맞붙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지원군을 포함, 사상자만 총 85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낸 참혹한 전투였다. 당장 히틀러부터도 분노하고, 절망하고, 당황스러워했다.
그렇다면 괴벨스는?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체육궁전. 그러니까,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공식적으로 종료되고 고작 2주쯤이 지난 그 시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괴벨스가 마이크 앞에서 허리를 편 채 입을 열었다.
수많은 사람을 앞뒤로 둔 채 꺼낸 말이었다. 괴벨스는 이날 국가가 곤경에 처했다고 사실상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번 전쟁에서 지는 것은 죽는 일보다 비참할 수 있다며, ‘전 국민이 군인이 돼’ 항복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괴벨스는 이 연설에 앞서 거울을 두고 몇 번이고 연습했다. 문장과 몸짓을 수십번 수정했다. 청중 대부분은 나치당 당직자였다. 말을 맞춘 배우도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미리 정한 시점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이것은 초대형 기획이었다. 뒤틀린 연출의 결정체였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괴벨스의 이 말에 또 한 번 박수가 쏟아졌다. “자, 국민이여. 일어나 폭풍을 떨쳐나가라!” 그는 이 문장으로 마지막 핏대를 세웠다.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은 라디오를 통해 독일 전역에 닿았다. “관중들의 함성과 환호는 거의 스피커를 터뜨릴 뻔했다.” 괴벨스는 본인의 일기에서 당시를 이렇게 자축했다. 뒤 따위 돌아보지 않는 끔찍한 감상평이었다. 괴벨스는 그렇게 다시 바람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증오와 희생만 낳을 게 분명했다. 바람은 돌풍이 되지 못했다.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무엇보다도 괴벨스 본인부터 잘 알고 있었을 터였다. 질 도박을 한 것이었다. 자기 돈도 아닌, ‘가스라이팅’의 제단에 올린 수많은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그간 면제 대상이었던 남성을 전장에 보내는 일.
여성들을 군수 공장으로 몰고, 당장 전쟁에 필요하지 않은 사업체는 문을 닫게 하는 일. 괴벨스는 이를 총력전의 일환으로 보고 히틀러의 승인을 수차례 요청했다. 결국 그런 남성들로 이뤄진 전국적 민병대 ‘국민돌격대’가 출범하는 등 일부 현실화가 된 지점도 있긴 했다. 다만, 단지 그 정도였다. 원래 전쟁이 그렇다. 전투는 역전할 수 있지만, 전쟁을 역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국가를 모든 것을 쥐어짠다 한들, 무너진 국력의 격차와 보급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었다. 괴벨스의 선전선동은 호스 빠진 인공호흡기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점점 피폐해졌다. 그러다 1945년 4월30일, 지하 벙커에서 사망했다.
그가 정치는 이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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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바 브라운,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1939 [Eva Braun, Eva Braun‘s photo album, catalog.archives.gov,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괴벨스가 죽은 히틀러를 이어받았다.
새로운 총리로 부임했다. 평생을 바란 권력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제국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깃발은 짓밟히고 있었다. 그해 5월1일. 그도 죽었다. 그가 총리직을 수행한 건 고작 하루였다. 그날 괴벨스와 함께 그의 아내도 죽었다. 그의 자식 여섯도 사망했다. 괴벨스는 바깥 세계가 자신의 악행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역사가 선고하는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으리라는 점 또한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괴벨스는 자신의 사적인 서류를 불태웠다. 언젠가 일기장에 “(…)우리에게 나갈 길은 없다”는 글을 쓴 적도 있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고,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출구는(…)” 그는 히틀러가 죽은 뒤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나치 독일은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일어서면 안 됐다. 일그러진 말과 글, 총과 대포는 그렇게 종말을 맞았다.
괴벨스는 말과 글을 통해 수백만명을 사지로 이끌었다. 직접 총을 들고 죽이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죽어가는 세상이 도래할 수 있게끔 이끌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최악의 선동가였다. 그는 본인의 재능을 진실이 아닌 거짓을 위해 썼다. 무엇을 곰곰이 생각해야 하는지가 아닌, 지금 당장 무엇부터 느껴야 하는지를 가르치려고 했다. 분노하고, 증오하라. 그리고, 우리를 따라 행동하라. 이것이 그가 행한 정치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남긴 건 불타는 도시와 그릇된 범죄였다. 돌아보면 그의 이야기는 늘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이 또한 당연했다. 뒤틀린 사상으로는 뒤틀린 결말만을 낳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교양인
요제프 괴벨스, 정철운, 인물과사상사
Propaganda in War, 19391945: Organisations, Policies, and Publics, in Britain and Germany., Balfour, Michael., Routledge & Kegan Paul
Berlin: The Downfall 1945, Beevor, Antony., London: Viking-Penguin Book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