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유망 바리톤에서 테너 전향해 성공
카우프만 대타에서 세계 무대 러브콜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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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너 백석종이 예술의전당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칼라프 왕자 역할을 맡아 소프라노 에바 프원카, 류 역의 황수미와 호흡을 맞춘다. [예술의전당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독이 든 성배’였다. 지난 2022년 세계적인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코로나19 후유증으로 공연에 서지 못하게 되자,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백석종에게 ‘대타’를 제안했다.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투리두 역할이었다.
“저에겐 말 그대로 ‘독이 든 성배’와 같은 기회였어요.”
당시는 백석종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로열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의 삼손 역의 커버(대역)였던 그가 마침내 데뷔 무대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테너 니키 스펜스의 다리 부상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며 찾아온 기회였다. 보통 ‘커버’ 배역이 무대에 서는 일은 흔치 않다. 주역에게 갑작스러운 사고가 생기기 전엔 찾아오지 않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예비 배역이기 때문이다.
백석종은 “그 주에 ‘삼손과 데릴라’의 공연이 3번 예정돼 있었지만, 그 주 내내 하루 네 시간 이상 코치와 함께 악보를 공부하며 새로운 역할을 준비했다”며 “지금 생각해도 인생에서 가장 모험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도전이었다”고 돌아봤다.
삼손에 이어 투리두까지, ‘카우프만 대체자’는 세계 오페라 무대에 제대로 된 신고식을 치렀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캐스팅 디렉터는 이듬해 백석종을 ‘나부코’와 ‘투란도트’의 주역으로 ‘정식’ 캐스팅했다. 그는 이때를 “커리어의 전환점”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과정은 우연이 아니었어요.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충분히, 그리고 능히 그것을 소화해 낼 수 있었어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를 사로잡은 리릭 스핀토 테너 백석종이 ‘투란도트’(22~24일, 예술의전당)의 칼라프 왕자로 마침내 한국 관객과 만난다. “자신의 목소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이라고 확신한다는 바로 그 역할이다.
지금의 백석종을 만들기까진 일생의 결단이 있었다. 유망한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한 것. 오랜 시간 백석종을 지켜본 음악계 거장들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세계적인 바리톤 토머스 햄슨은 만류했고, 반대로 테너 이용훈은 전향을 권했다. 엇갈린 조언 속에서 그는 오랜 시간 자신과의 대화를 나눴다.
“당시엔 이미 바리톤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많은 선생님과 주변 분들께서 전향을 만류하셨어요. 저 역시 그 의견을 존중했고, 한동안은 ‘테너의 꿈’을 마음속 깊이 접어 뒀었죠”
그에게 ‘결정적 전환점’이 된 멘토는 테너 이용훈이다. 백석종은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와의 만남을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가 떨어져 큰 파문을 일으키듯,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영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테너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공교롭게도 결심 직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다. 백석종은 당시를 돌아보며 “많은 사람에겐 멈춰 있는 시간이었지만, 내겐 하나님께서 허락한 준비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팬데믹이라는 긴 터널이 그에겐 ‘침묵의 단련기’였다. 공연장이 멈춘 시간 동안, 그는 무대 대신 연습실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텅 빈 객석을 마주하며 발성을 연구했다. 자신의 목소리와 씨름한 날들이 1년 넘게 이어졌다.
백석종이 오랜 시간 자신을 단련할 수 있었던 것은 이용훈이 건넨 조언 덕분이었다. 테너로 첫걸음을 디딘 백석종은 지금도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당시 이용훈은 그에게 “아마 석종 씨는 선생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며 “지금 하던 방식대로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노래하되, 몸을 충분히 열고 소리를 연결해서 내라. 자신의 소리를 찾기까지는 1년에서 2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위대한 테너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재능, 둘째는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이용훈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도 제 삶의 기준이 됐어요.”
1년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백석종은 새로운 발성을 연구하며 테너의 소리를 찾아갔다. 묵직한 중저음의 위에 찬란한 고음을 얹기 위해 ‘몸’이라는 악기를 다시 조율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당시 얻은 확신은 ‘테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길이 테너라는 것이었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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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전당 제공] |
테너 데뷔 무대였던 ‘삼손과 데릴라’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로열 오페라의 올리버 미어스 감독은 뉴욕타임스에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백석종의 데뷔 무대가 충격적인 것은 그가 테너로 한 번도 오페라 무대에 섰던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과 4년 사이 백석종은 세계 무대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테너가 됐다. 뉴욕과 런던을 넘어 베를린, 피렌체, 빈 등 세계 주요 오페라극장이 그를 부르고 있다. 레퍼토리도 확장되고 있지만, 그에게 ‘투란도트’는 더 특별하다. 자신의 목소리와 가장 잘 맞는 배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는 ‘얼음 공주와 사랑의 승리’로 요약되는 작품이다.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에서 막 올린 ‘투란도트’ 중 가장 화제가 된 작품은 백석종의 멘토인 이용훈이 출연했던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다.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리아 중 하나인 ‘네순 도르마(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말라)’다.
백석종은 투란도트의 마음을 얻는 왕자 칼라프를 맡아, 목숨 걸고 이 곡을 부른다. 그는 “칼라프는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은 아니다”며 “오히려 두려움이 있음에도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용기는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얼어붙은 투란도트의 마음 속에도 여전히 사랑과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으로 해석했다. 백석종은 그 믿음이야말로 칼라프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라 본다.
그가 생각하는 칼라프의 외침 ‘빈체로(이기리라)!’ 역시 새로운 해석을 입는다. 그의 ‘빈체로’는 얼음공주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얻는 승전보도, 남성적 야망의 표현도 아니다.
백석종은 이 곡을 “절망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희망을 붙드는 인간의 선언”이라고 했다. 그가 걸어온 길도 크고 작은 시련과 도전의 연속이었기에, 아리아의 고백은 백석종의 삶을 고스란히 닮았다.
“돌아보면 제 삶도 칠흑 같은 어둠 속 터널을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있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걸어가다 보니, 그 끝에는 어둠이 아니라 찬란한 빛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면 반드시 빛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저는 그 메시지를 통해 관객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가 노래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승리를 향한 야망보다 좌절하지 않는 희망을, 자신보다 타인을 향한 위로가 그의 노래에 담긴다. 백석종은 “목소리로 이 시대에 작은 빛과 소금이 되어,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노래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