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까지, 김제민 연출 ‘113’
연결합으로 탐구한 삶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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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113’의 김제민 연출가와 희곡을 쓰고 배우로도 깜짝 출연한 수학자 최재경 [리멘워커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문학을 사랑한 수학자가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애러비’를 줄줄 외고 다녔다. “15분 정도면 암송이 가능한 분량”이라며 “아직도 이 작품을 외우고 있다”고 일흔셋의 수학자는 말했다. “글 쓰는 법을 배우고 싶었거든요.”
문학청년이 되지 못한 그는 수학자의 길을 걸었다. 변수가 난무하는 세계를 벗어나 논리와 증명의 세계에서 새로운 차원을 탐구했다.
“문학이 저의 옛사랑이라면, 수학은 지금 사랑스러운 아내예요. (웃음)” (최재경)
수학자로 한길을 걸어오는 동안에도 그는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그의 홈페이지엔 삶과 수학을 써 내려간 수필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문학을 향한 마음은 오래 남아 있었다. 첫 창작에 도전한 건 제8대 고등과학원장을 지낼 때였다. 고등과학원(KIAS)에서 진행하는 예술가와 수학자들의 협업 프로그램인 ‘초학제’를 통해 생애 첫 단편소설 ‘수미쌍관’을 썼다. 그때가 2014년이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그 소설이 희곡이 됐다. 그는 “당시 소설에 대화가 많아 주변에서도 희곡이 더 낫겠다는 평을 들었다”며 “희곡 작법을 독학해 각색했다”고 했다. ‘113’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통해 태어난 무대는 수학자이자 전 고등과학원장이 쓴 한국 최초의 희곡이다.
이 무대를 제안한 건 ‘초학제’에서 인연이 된 김제민 연출가(서울예술대 교수)였다. 최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김 연출가는 “수학자가 쓴 희곡이라 하면 대부분 ‘수학 문제 같은 텍스트’를 상상하는데, 실제 마주한 대본은 그것 자체로 완성도 높은 훌륭한 문학이었다”며 “복잡한 수학 공식이나 강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잘 아는 문학을 불러와 인생을 이야기하는 인문학적 대화”라고 했다.
1+1=2는 수학적 진리이나, 1+1=3이 되는 오묘한 인생의 진리도 있다. 연극 ‘113’은 그 의미를 담았다.
“ 두 사람이 만나 ‘인연’을 맺을 때, ‘1+1=2’가 아닌 ‘3’이 돼요. 연극에선 수학적 공식에 인간의 인연이 들어가면서 만들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순간을 보여주고자 했어요.”(최재경)
연극은 복잡한 수식 대신 시와 시조를 불러와 문학적 대화를 나눈다. 흥미로운 것은 최재경은 수학적 개념인 ‘연결합’으로 문학 작품을 해석해 연극 안에 담았다는 점이다.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황순원의 ‘링반데룽’, 이상의 ‘날개’ 등 그가 사랑한 세 작품을 동원해 연극 속 세 주인공의 삶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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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113’의 김제민 연출가와 희곡을 쓰고 배우로도 깜짝 출연한 수학자 최재경 [리멘워커 제공] |
최재경은 “‘연결합’은 두 공간에 구멍을 내고 이를 막대기로 연결해, 본래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개념”이라며 “우리가 잘 아는 문학 작품들을 이 개념으로 재해석하고 싶었다”고 했다. 서로 다른 삶들이 만나 하나의 새로운 서사를 이루는 과정을 ‘연결합’이라는 개념으로 읽은 것이다. 그는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연결합’은 헤겔의 ‘정반합’과 닮은 구조라고 했다. 기존의 상태(정)에 반대되는 성질(반)이 부딪혀, 갈등을 통해 발전된 형태(합)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밤’에서 임을 기다리는 ‘긴 밤’과 임이 오신 ‘짧은 밤’은 각각 독립된 시간이지만, 이를 이어 붙여 깊은 사연과 인연을 가진 고차원의 밤이 태어나는 거죠. 황순원의 소설에선 죽어가는 친구의 기구한 삶과 화자의 삶이 포개지고, 이상의 ‘날개’에선 ‘날자 날자’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을 더 높은 차원으로 날아오르려는 시도인 거죠.” (최재경)
‘113’ 무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꾸며졌다. 위상수학적 은유 위에 세워진 무대다. 극 중 이야기는 세 번 꼬이는 구조다. 그 중심엔 수학자·예술가·시인 세 인물이 서 있다. 화가로 등장하는 인물은 극이 진행되며 제빵사로 삶의 궤도를 바꾸고, 도넛을 빚는 과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도넛이 연결합의 상징이다. 서로 다른 장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결국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사실 수학은 오해가 많은 학문이다. 현실 세계는 물론 AI 세계를 구축한 기본 언어지만, 사람들은 ‘수학의 쓸모’를 의심한다. 최재경은 미국의 신경과학 연구를 인용, “좋은 시를 읽을 때와 아름다운 수학적 아이디어를 접할 때, fMRI상에서 유사한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수학은 풀어야만 하는 학문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수학은 푸는 것보다 만들고 찾아내야 하는 학문이에요. 수학의 좋은 능력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에요. 좋은 문제를 만드는 능력과 좋은 문학작품을 빚어내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갖고 있어요.” (최재경)
발견하고 증명하고, 여기에 문제를 ‘창조’하는 그 순간은 수학자가 가장 큰 아름다움을 느끼는 때다. 최재경은 그러나 “아름다움이 큰 만큼, 허무도 느낀다”고 했다. “멋진 아이디어를 발견해 논문을 쓰고, 그것을 마무리할 때 오류를 발견했을 때 엄청난 절망이 온다”는 그는 “아름다움이 큰 만큼 허무도 깊다”며 웃었다.
대한민국은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이 일상이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수포자’(수학 포기자)로 말하며, 수학과는 자발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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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113’ [리멘워커 제공] |
김제민은 “대본을 읽으며 수학자도 ‘수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며, “삶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거리를 두고 살아온 수학이 대본을 통해 전혀 다른 관점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연극엔 수학자에겐 ‘수학’을 위한 변명이자 수학에 대한 오해 풀기이기도 하다. 최재경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이 ‘수포자’로 살아가며 수학을 시험의 도구나 공포의 대상으로만 기억한다”며 “이 연극을 통해 수학이 삶에 풍요로움을 줄 수 있고, 아름다운 문학을 재해석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생애 첫 희곡 작가로 도전한 최재경은 이 무대에서 2~3분 가량 배우로도 선다. 김제민은 “극중 수학자는 사실 최재경 선생님 본인의 삶을 투영한 인물”이라며 “짧은 분량이나 평생 한 분야의 연구에 매진한 실제 수학자의 실존감과 걸음걸이를 무대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작업 초반 나눈 대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최재경은 “연극 근처엔 가본 적도 없는데 속아 넘어간 기분”이라며 “단편소설을 외지만, 대본 외우는 건 쉽지 않다”며 웃었다. 하지만 배우 데뷔의 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는 최근 바이올리니스트 주미 강과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듀오 콘서트를 본 뒤, ‘악흥의 순간’이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수학자들이 강단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것과 배우들이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것이 비슷한 것 같아요. 늘 새로운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점에서요. 리사이틀을 보고 난 뒤 ‘무대에 사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일’이라는 내용을 담았어요. 그렇게 잘하진 못하더라도 무대 위에 한순간 남는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재경)
최재경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이 ‘수포자’로 살아가며 수학을 시험의 도구나 공포의 대상으로만 기억한다”며 “이 연극을 통해 수학이 삶에 풍요로움을 줄 수 있고, 아름다운 문학을 재해석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김재민은 “수학과 예술이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국 하나로 연결돼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