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비즈] 일본을 여는 새로운 열쇠


일본은 한국 기업에 있어 늘 가깝고도 중요한 시장이었다. 한국 제품에 대한 수요도 꾸준한 데다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의 눈높이는 K-푸드와 뷰티, 콘텐츠가 세계로 뻗어 나가기 전 거쳐야 할 최고의 ‘테스트베드’였으며, 여기서 쌓은 경험은 글로벌 진출의 핵심 자산이 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일본 시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 이상의 전략적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일본을 단순히 ‘물건을 파는 대상’으로 보는 관성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을 함께 개척하는 ‘전략적 협력 거점’으로 재정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배경에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성숙기에 접어든 내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기업들은 기술과 품질, 막대한 해외 네트워크와 자본력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 등 신흥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일본 기업들이 과거 모든 과정을 자체 해결하는 ‘단독 진출’ 방식에서 벗어나 해외 기업과의 외성(外成)적 협력을 마다하지 않는 일종의 ‘오픈 이노베이션’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의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해외 사업 추진 시 외국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고려하는 일본 기업의 비중이 유의미하게 늘고 있다.

이미 삼성전자가 베트남 생산 기지에서 일본 소부장 기업들과 공정과 품질 대응 고도화를 위해 협력하고 있으며, 에너지 분야에서도 한국가스공사(KOGAS)와 일본 최대 발전사 제라(JERA)가 LNG 스왑 및 트레이딩 분야에서 공조하는 등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고 ‘한일 비즈니스 연합군’의 사례가 실물 경제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 중소기업들에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준다. 일본 시장은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시각을 살짝만 돌려보자. 일본 시장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대신,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일본 기업의 핵심 공급망 속으로 들어가는 전략은 어떨까?

특히 OEM·ODM 경험이 풍부하고 유연한 생산 체계를 갖춘 우리 중소기업에는 일본 기업이 이미 선점한 글로벌 유통망과 거래구조에 생산·공급 파트너로 참여하는 것이 해외 판로를 개척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정치적 환경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다. 지난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양국 간 교류의 폭이 확대되었고, 작년 11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및 지난달 개최된 한일 정상회담 등 정부 간 소통이 이어지면서 기업 경영의 걸림돌이었던 대외 정책 리스크도 크게 줄어들었다. 정치적 훈풍이 상호 간 경제적 실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안정적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이제 일본은 우리에게 단일 목표 시장이 아니다. 세계 무대라는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공급망의 빈틈을 메워줄 수 있는 ‘러닝 메이트’다. 일본을 공략의 대상이 아닌 협력과 활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 이것이 글로벌 무한 경쟁 시대를 마주한 우리 기업에 필요한 ‘일본을 여는 새로운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홍치의 한국무역협회 도쿄지부장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