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모이는 것 자체가 저항”…6년 만에 성사된 크리스탈 파이트 첫 공연

무용 거장 파이트 첫 공연 ‘어셈블리 홀’
오는 5~7일 LG아트센터 서울서 공연
인간의 연대·분열에 대한 이야기 확장


크리스탈 파이트, ‘어셈블리 홀’ [LG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마을회관엔 늘 사람이 모인다. 누군가는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누군가는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때론 선거를 치르고, 졸업을 기념하고, 체육대회를 열고, 사소한 회의 같은 걸 하는 곳. 너무도 평범해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이 공간에서 현대 무용의 지형도를 바꾼 안무가 크리스탈 파이트는 인간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발견했다.

“마을회관은 사실 변화의 공간입니다.”

올리비에 상을 다섯 번이나 거머쥔 무용 거장 크리스탈 파이트(56)의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춤의 무대는 중세 재현 동호회의 회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작품이 들여다보는 곳은 ‘취미 모임’의 소소한 갈등이 아니다. 이 안엔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의지,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의 균열이 담겨 있다.

무려 6년 만이다. 2020년 팬데믹으로 무산됐던 첫 내한이 이제야 성사됐다. 크리스탈 파이트와 그가 이끄는 키드 피봇(Kidd Pivot)의 ‘어셈블리 홀’(5~7일, LG아트센터 서울)이 마침내 한국에 온다.

한국 공연을 앞두고 서면으로 만난 크리스탈 파이트는 “언제나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온다는 사실 자체에 조금은 놀란다”며 “사람들이 하나의 시간과 공간 안에 함께 모여 진지하게 예술작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내게 큰 울림이 된다”고 말했다.

“우리를 서로 고립시키는 수많은 힘이 존재하는 지금, 극장에 오는 경험은 하나의 작은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가 전하는 작품이 사랑과 희망을 담아 건네진 것이라는 점을 느껴주셨으면 해요.”

그가 말하는 저항은 거창한 정치적 선언은 아니다. 함께 극장에 앉아 같은 장면을 바라보는 경험, 그것 자체가 이미 공동체의 회복을 향한 몸짓이라는 의미다.

세계적인 안무가 크리스탈 파이트 [LG아트센터 제공]


파이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공동체다. ‘어셈블리 홀’ 속 인물들은 중세 재현 활동이라는 같은 취향을 공유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지치고 갈등한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모였지만, 그 사랑이 오히려 분열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파이트는 “사실 그곳은 결혼식과 추모식, 스포츠 경기와 지역 모임, 춤, 졸업식, 선거처럼 수많은 집회와 의식, 삶의 통과의례가 이뤄지는 변화의 공간”이라며 “함께 무언가를 해내려는 사람들이라면 어디에서든 마주하게 되는 아주 소소한 정치성과 갈등을 목격하게 된다”고 말했다. ‘중세 재현’이라는 ‘공동의 활동’을 지속하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내부의 긴장과 분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파이트의 카메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야를 조금 더 넓혀 ‘줌 아웃(Zoom out)’ 하면서 인간의 ‘연대(Unity)’와 그 반대편에 있는 ‘분열(Division)’에 대해 이야기를 확장한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온 구조들, 예컨대 회의 규칙, 종교, 민주주의 같은 시스템들이 얼마나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연약한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공정함과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이상을 담아내기 위해 눈물겹게 구축해온 구조들이죠.”

파이트는 이 작품을 통해 현실과 신화의 영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인간의 본질과 우리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에 대해 아주 깊은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춤’은 ‘살아있음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필수 요소다. 이 작품에서 파이트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개념에 전력을 다해 매달렸다. 가장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 즉 ‘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크리스탈 파이트, ‘어셈블리 홀’ [LG아트센터 제공]


“가슴의 미세한 오르내림, 눈꺼풀의 떨림, 손끝에 걸리는 아주 작은 긴장 같은 것들 말이죠. 우리는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애니메이터나 퍼펫티어(인형극 배우)가 생명이 없는 무생물에 영혼을 불어넣어 숨 쉬게 만드는 그 찰나의 순간처럼, 인형과 그것을 움직이는 조종자 모두는 존재와 의식, 현존, 그리고 창조의 신비를 무대 위에 함께 구현해요.”

‘어셈블리 홀’은 ‘움직임을 통해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로 시작해서, 다시 그 행위로 끝을 맺는 작품이라고 파이트는 덧붙인다.

그의 작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특징은 언어다. 현대무용계에서 파이트는 텍스트를 가장 독창적으로 사용하는 안무가 중 하나다. 오랜 협업자 조너선 영과 함께 그는 언어와 움직임을 병치한다. 배우의 음성과 무용수의 몸,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지도,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는 독특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파이트는 언어와 안무의 관계를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 비유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욕망, 무의식의 충동을 몸이 드러내고, 텍스트는 그 의미를 확장한다. 그는 언어와 행동 사이의 미세한 어긋남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복합성을 발견한다.

크리스탈 파이트, ‘어셈블리 홀’ [LG아트센터 제공]


현실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은 어느덧 신화 안으로 유입된다. ‘어셈블리 홀’ 역시 현실적인 회의 장면에서 시작해 점차 신화적 상상력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는 이를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통로라고 설명한다.

“신화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예요. 결국 모든 작품은 ‘드라마’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본래 지닌 불완전함과 혼란 속에서, 어떻게 공동체의 이상과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아요. 본능적으로 연결과 일체감을 갈망하도록 만들어졌죠. 왜 그것을 지속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가, 그 질문 역시 이 작품이 탐구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의 작품에 현실과 환상, 코미디와 비극이 한 작품 안에서 공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꿈꾸는 존재하는 모순 자체가 드라마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2002년 창단한 키드 피봇은 이러한 탐구를 가장 깊이 수행하는 실험실이다.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 파리 오페라 발레, 로열 발레 등 세계 정상급 단체들과 협업해 온 파이트는 자신의 단체에선 훨씬 복합적이고 장기적인 작업을 시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수년에 걸친 투어 과정에서 작품은 계속 변화하고 성장한다.

예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무대 밖으로도 확장된다. 키드 피봇은 2015년부터 탄소중립 투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환경 문제에 대한 책임을 실천해 왔다. 그는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에 어떤 손상을 남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고민한다”고 했다.

‘어셈블리 홀’은 ‘인간은 왜 분열하며 연대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다가도 쉽게 갈라질까’에 대한 질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이념이나 정치적 구호가 아닌, 마을회관의 작은 회의에서 시작한다. 파이트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무대에 구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서로 협력하고 관객과 함께 호흡할 때 살아 있음과 의식의 이미지를 함께 만들어 낼 수 있다”며 “그것은 상상력의 행위이자, 창조와 영혼의 깃듦을 진지하게 재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