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뗀 아이에게 고등 수학 문제 풀라는 격”…韓 보험, AI·기후 위험 속 ‘걸음마’ 수준

보험연구원 국제공동세미나…新리스크 대응 논의
‘보험을 위한 AI’에서 ‘AI를 위한 보험’으로 변화 중
美정보유출 피해 1건 평균 1022만 달러 ‘역대 최고’
기후위험, 보험 기본원칙 ‘위험 분산’마저 흔들어
“AI·사이버 기본법부터”…민·관 위험분담 제언도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보험연구원이 포항공대, 미국 일리노이대, 캐나다 사이먼프레이저대와 공동으로 개최한 ‘2026 국제 워크숍, 리스크와 보험’ 세미나에서 김헌수 보험연구원장이 환영사를 전하고 있다. [보험연구원 제공]


[헤럴드경제= 박성준 기자] “한글을 막 뗀 아이에게 고등 수학 문제를 풀라거나, 철학책을 주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격입니다.”

29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열린 국제 보험 세미나. 인공지능(AI)과 사이버 위험을 다룬 패널토론에서 최용민 전 뮌헨리 전무가 한국 사이버보험 시장의 현주소를 이렇게 표현했다. 새로운 위험은 코앞까지 와 있는데, 그것을 보장할 준비는 걸음마 수준이라는 진단이었다.

AI가 일으키는 사고와 잦아지는 기상이변, 그리고 이런 위험들이 한꺼번에 겹쳐 터질 때의 충격. 과거엔 없던 ‘신종 위험’이 빠르게 늘면서, 보험업계도 무엇을 어디까지 보장해야 할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날 세미나에선 해외 석학들이 내놓은 해법과 함께, 한국의 현재 위치도 함께 보여줬다.

‘2026 국제 워크숍, 리스크와 보험’을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는 보험연구원이 포항공대, 미국 일리노이대, 캐나다 사이먼프레이저대와 공동으로 마련했다. 현장에선 ▷AI 혁명과 사이버 리스크 ▷기후변화와 극한 기상 ▷보험 데이터 사이언스와 시장 혁신 등 3개 세션에 걸쳐 9건의 주제 발표가 이어졌고, 국내외 학계·업계·정책 전문가가 자리를 메웠다.

‘보험을 쓰는 AI’에서 ‘AI를 보장하는 보험’으로


첫 세션의 화두는 ‘AI를 활용하는 보험’에서 ‘AI 자체를 보장하는 보험’으로의 전환이었다. 아서 샤르팡티에 퀘벡대 교수는 “AI는 더 이상 보험사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기업의 제품과 의사결정에 박힌 ‘보장 대상’이 되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위험의 성격이다. 겉으론 업종도 지역도 다양해 분산된 듯 보이는 계약들이 알고 보면 같은 AI 모델·클라우드에 의존해, 사고가 한꺼번에 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법이 곧 코드(code is law)”라던 명제를 비틀어 “AI가 짠 코드는 곧 책임(liability)이 된다”고 했다.

알렉스 지아 제네바협회·베이징대 교수는 소비자 쪽 변화를 짚었다. 그가 인용한 설문에서 보험 가입자의 68%가 챗GPT 같은 생성형 AI로 약관을 이해하거나 상품을 비교하는 데 활용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는 “복잡한 약관으로 소비자를 헷갈리게 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보험사가 ‘위험 인수자’를 넘어 ‘서비스 제공자’로 변신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AI 수용도는 아시아 소비자가 비교적 호의적인 반면, 유럽·미국에선 “사람의 손길이 사라진다”는 거부감이 컸다.

마오차오 쉬 일리노이 주립대 교수는 사이버보험의 ‘가격표’를 매기기 어려운 이유를 짚었다. 위협은 심사 주기보다 빨리 변하고, 사고 데이터는 부족하며, 드물지만 한 번 터지면 막대한 ‘극단 손실’이 보험료를 좌우한다. 실제 지난해 미국의 정보유출 1건당 평균 피해액은 1022만 달러(약 158억원)로 역대 최고였고, 전 세계 사이버보험 시장은 약 150억 달러(약 23조원) 규모로 커졌다.

토론에 나선 국내 전문가들의 진단은 현실적이었다. 최 전 전무는 “과거엔 ‘서울 사는 30대 남성’처럼 뭉뚱그려 위험을 쟀지만, 지금은 텔레매틱스(주행 행태를 실시간 수집하는 기술)로 개인의 운전 습관까지 보고 보험료를 매긴다”며 이런 ‘초개인화’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라고 했다.

다만 개인 단위 위험을 정교하게 재는 일과, 새로운 대재해를 보장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AI·사이버 대재해는 화재와 달리 피해 시점과 규모를 가늠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민영보험사와 재보험사, 정부가 단계적으로 위험을 분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AI 기본법과 사이버안보 기본법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제언했다.

기후·데이터가 다시 그리는 ‘위험의 지도’


두 번째 세션의 화두는 위험이 ‘겹쳐’ 닥치는 상황이었다. 치허 탕 뉴사우스웨일스대 교수는 “기후 충격과 시장 충격을 따로 떼어 평가하면 잠재 손실이 과소평가된다”며, 충격이 동시에 오는 ‘복합 스트레스’를 함께 봐야 금융시스템 전체의 취약성이 드러난다고 했다. 새로운 위험들이 연쇄적으로 맞물릴 때 피해가 증폭된다는 경고다.

같은 맥락에서 호세 가리도 콩코디아대 교수는 “기후위험은 보험의 기본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닥쳐 위험을 지역별로 분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백만장자는 산불로 집을 잃어도 살아남지만, 평생 일해 집 한 채 마련한 사람이 그 터전을 잃으면 삶 전체가 무너진다”며 보장 격차의 심각성을 짚었다.

실제 미국 보험사들은 캘리포니아 산불·플로리다 침수 지역에서 발을 빼고 있다. 그는 소비자물가지수(CPI)처럼 기후 위험을 지수로 환산한 ‘계리기후지수(ACI)’를 리스크 측정·상품 설계에 활용하는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마지막 세션은 데이터 혁신을 다뤘다. 셸던 린 토론토대 교수는 텔레매틱스 데이터로 ‘정상·졸음·공격적’ 운전 패턴을 가려내는 기법을, 팀 부넌 홍콩대 교수는 딥러닝을 결합한 날씨지수형 농작물 보험의 가격 설계 모형을 제시했다.

AI와 기후가 위험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지금, 보험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는 게 세미나를 관통한 메시지였다. 또한, 한국도 걸음마를 벗어나려면 빠른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숙제를 남겼다. 최 전 전무는 “지금 우리는 막 걸음마를 뗀 단계지만, 결국 기업과 개개인의 역량부터 끌어모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