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은 착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던 ‘천지’(김향기 분)가 유서를 남기지 않은 자살을 하고 난 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마트에서 일하면서도 주책맞을 정도로 씩씩하고 활달한 모습으로 혼자 두 딸을 키워왔던 엄마 ‘현숙’(김희애 분)과 생전 동생이 친하게 지냈던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만지’는 동생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간다. 유서를 남기지 않는 죽음으로 한 소녀가 엄마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언니인 ‘만지’에게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만지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죽은 소녀에 대한 죄책감을 비로소 대면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상실이 가져오는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만지’역의 고아성은 이제 스물 두 살의 여배우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여문 연기 세계를 보여준다.
“지난해 ‘설국열차’의 개봉을 앞두고 출연을 제안받았어요. 시나리오를 보고는 처음에는 못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연기할 때 반드시 경험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역할에 따라서는 상상만으로는, 실제로 느껴보지 않고는 표현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자면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 진짜배기 사랑을 해보는 것, 아이를 낳아보는 것 같은 일이요. (동생을 잃게 되는) ‘우아한 거짓말’의 ‘만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출연을 거절하고 일주일의 꿈이 결정을 바꾸게 했다. 시나리오가 강렬했지만, 자신이 역할을 맡을 정도로 경험이 충분하지 못했던 게 한스러워서였을까?
“일주일 내내 꿈을 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꿈이었죠. 꿈에서 엄마가 죽거나, 오랜 단짝 친구가 죽거나, 언니를 잃었어요. 꿈이지만 그렇게 실제 같고, 구체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다가 이제는 엄마가, 언니가, 친구가 이제는 곁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는 결심, 그러다가 다시 밀려오는 상실감에 감정이 온통 미궁에 빠지는 순간, 그 모든 과정을 꿈 속에서 고스란히 경험했어요. ”
고아성에게 ‘우아한 거짓말’은 이미 그 일주일의 꿈 속에서 만들어지고 상연됐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전에 나에게 보낸 신호가 있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가 죽기 전에 신은 나에게 미리 암시를 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꿈 속에서 들었다고 했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담긴 이야기 그대로다.
“결정적으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고나서 바로 감독님께 장문의 메일과 함께 전화를 드렸어요. 영화를 하고 싶다고.”
영화 개봉(13일)을 앞두고 지난 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아성은 ‘괴물’의 현서도, ‘설국열차’의 요나도, ‘우아한 거짓말’의 ‘만지’도 모두 자신의 한 구석 어디론가에 살포시 품은 채, 봄날을 맞은 화사하고 영특한 이십대 청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파스텔톤으로 차려입은 옷차림이 밝고 씩씩했으며 들뜨지도 움츠러들지도 않고 나누는 대화법은 영리하고 단단했다. 스물 몇 살 무렵에는 보기 어려운 균형감과 성숙한 사유가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났다. 전작 ‘설국열차’를 끝낸 후 근황을 묻는 질문에 고아성은 학교와 일상에 복귀해 지낸 몇 개월의 이야기로 답했다.
“일단은 (영화 촬영 때문에 휴학 후) 복학생 신분이 된 것이 너무 슬펐죠. 저는 개인적인 삶도 중요한 사람이라, 제게는 가족, 친구, 공부 등 일(연기) 외의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이 잘 갖춰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영화 때문에 미뤄져 있던 일상을 잘 누렸어요. 아마도 스무살 무렵부터는 개인적인 생활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작품 속에서는 감정의 격한 너울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하는 것이 배우지만, 자연인으로 돌아오면 안정되고 균형되며 성숙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고아성은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지만, 마음 속 깊은 곳, 견고한 내적 평화를 가진 사람을 동경해왔던 것 같아요. 김희애나 김혜수 선배님도 그렇고, ‘설국열차’에서 함께 했던 틸다 스윈튼도 그런 분들이죠. 저도 그 든든한 마음을 어릴 적부터 찾아려고, 가지려고 노력해왔어요.”

이번 작품에서도 고아성은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지만, ‘설국열차’ 촬영 때 성년식을 치렀고, ‘우아한 거짓말’에선 한층 더 중심의 자리에서 극을 이끌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아역 시절에는 저도 모르고 누리던 ‘어드밴티지’가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변화를 체감하죠. 보호막 없이 맨몸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요. 예전에는 촬영하면 내 몫만 하고 딱 빠졌는데, 이번 작품에선 처음으로 전체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연기를 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부담이라면, 제가 그동안 얼마나 좋은 감독이랑 작업했고 얼마나 좋은 선배 배우들과 함께 했는지, 겪은 것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못 보여드릴까봐 걱정했다는 것이요. ”
고아성은 열 여섯살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 왔다. 독서는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편식하는 편이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들을 좋아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를 ‘최고의 영화’로 치고, 최근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인상적으로, 감동적으로 봤다.
영화 속에서 두번이나 아버지역할을 했던 송강호의 ‘변호인’도 물론 봤다. 고아성은 감상을 이렇게 전했다.
“한 작품을 하기 위해서 송강호 선배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얼마나 고뇌가 큰 지 지켜봐왔고 잘 알죠. 사실 ‘설국열차’를 하기 전만 해도 송강호 선배 정도되면 이제는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배우라고 생각했지만,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그렇게 고뇌하는 게 감동적이었어요. 선배가 어떻게 영화작업을 하는 줄 잘 아는데, ‘변호인’같은 작품을 했으니…. 작품 자체가 뜨겁기도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제가 못 일어났어요. 온 몸에 힘이 풀려서요. ”
고아성은 ‘설국열차’로 베를린영화제에 갔다가, 홀로 프라하행 비행기를 탔다. ‘설국열차’ 촬영 때 묵었던 곳을 다시 찾아 3박 4일을 지냈다.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며칠 간을 객지에서 오롯이 홀로 지낸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이번 여행이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경험이었다”고 고아성은 덧붙였다.
스물 두 살 여배우 고아성은 보고, 듣고, 쓰고, 겪고, 그리고 연기한다. 배우로서의 삶과 자연인으로서의 일상을 구별하고 균형잡고 똑같이 존중한다고 했지만, 고아성의 연기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숙성한 사유와 일상의 숨결이 삼투돼 있다. ‘우아한 거짓말’은 그 증거일 뿐 아니라 한국영화가 왜 이 젊고 영리한 여배우에게 기대를 품어도 좋은지에 대한 명백한 답변일 것이다.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