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영화제의 핵심은 역시 ‘영화’다. 영화제 프로그램과 상영작들의 면면이 영화제의 정체성과 수준을 결정한다. 프로그래머들이 거장들의 신작을 월드 프리미어(세계 최초 공개)로 선보이기 위해, 가능성 있는 신인 감독들의 작품을 발굴하기 위해 공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동시대 거장 감독들의 신작을 소개하는 섹션)에 초청된 상영작들은 여느 때보다 화려했다.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중국의 지아장커,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따끈따끈한 신작들이 그 주인공. 3인3색 영화들은 명불허전 거장의 솜씨에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들은 국내 극장에서도 정식 개봉할 예정이다.

▶이보다 우아할 수 없다…허우 샤오시엔 ‘자객 섭은낭’=우아하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처음 무협물을 만들겠다고 나섰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 지 감히 떠오르지 않았다. 고요한 일상의 풍경을 자주 카메라에 담아왔던 감독인 까닭이다. ‘자객 섭은낭’은 우려의 시선을 떨쳐내고 제68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트로피를 허우 샤오시엔에게 안겼다.
올해 부산영화제를 통해 국내 취재진에 공개된 ‘자객 섭은낭’은 무협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 충분했다. 거장의 선택은 기존 무협액션 장르에 작품을 꿰어맞추는 게 아니라, 허우 샤오시엔 스타일의 무협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자객 섭은낭’엔 구구절절한 대사도, 과장된 액션도 없다. 카메라 움직임이나 컷도 많지 않다. 자신을 배신한 정혼자를 죽여야 하는 운명이지만, 망설이며 그 곁을 맴도는 섭은낭의 동선과 시선을 쫓을 뿐이다. 자칫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 여백은, 입이 떡 벌어지는 절경이 채운다.
“무협소설들의 특징은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점이죠. 액션이 싸움에 중점을 두기보다, 보여주기 위한 공연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중력을 벗어나 날아다니는 등, 기존 무협물의 비현실적인 부분까지 차용하고 싶진 않았어요. 보통 무협영화엔 장검이 많이 나오는데, 섭은낭은 단도를 사용하죠. 이것도 현실적인 설정을 고민한 결과예요.”(부산국제영화제 ‘자객 섭은낭’ 기자회견 중)
어느덧 36년 째 영화를 찍고 있는 허우 샤오시엔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혹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지식인으로서 담아내야 한다고. 그는 “영화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보니 흥행을 고려하지 않을 순 없다. 일단 잘 팔리는 작품을 만들어서 다음에 좋은 작품을 찍겠다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자신을 통해 관객들이 무엇을 보게 될 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희망, 지아장커 ‘산하고인’=“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지아장커의 신작 ‘산하고인’을 관통하는 대사다. 영화는 1999년과 2015년, 2025년의 세 개 챕터를 통해, 주인공 타오를 중심으로 26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 사이 휴대전화는 시티폰에서 아이폰, 투명 액정의 미래형 스마트폰으로 모습을 바꿨다. 소통과 이동 수단만 달라진 게 아니다. 사랑도 변한다. 광부 리앙즈와 부잣집 아들 진솅 사이에서 고민하던 타오는, 고심 끝에 진솅과 결혼하지만 결국 이혼한다. 어린 아들 달라는 진솅의 손에 이끌려 호주로 떠난다. 시간이 흘러 18살이 된 달라는 엄마의 얼굴도, 함께 들은 노래도 가물가물하다.
소중한 것도 시간이 흐르면 변해가고 잊혀진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연인으로 맺어지진 못했지만, 리앙즈를 향한 타오의 우정이 그것이다. 타오는 사랑의 상처로 고향을 떠난 리앙즈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고 그의 집 열쇠를 보관한다. 달라는 10년 전 타오가 ‘여기는 네 집이니 언제든 오라’고 쥐어준 열쇠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타오 역시 달라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묵묵히 만두를 빚는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고 웨스트(Go West)’에 맞춰 춤을 추는 타오의 모습이 장식하는데, 이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가치에 대한 희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극 중 인물들과 지아장커 감독이 또래라는 점이다. 1999년 당시, 청년 지아장커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 인터넷의 발전과 휴대전화 보급 등의 변화를 목도했다. 그는 당시 중국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지켜본 입장에서 이 시대를 영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고. 특히 ‘산하고인’은 2025년 미래 시점까지 나아간 것이 주목할 만한데, 이는 지아장커 작품에서 처음 시도된 일이다. 지아장커는 “18세 달라가 중년의 이혼녀와 만나는 상황을 통해 지금 우리의 자유가 어떤지, 미래에는 사람의 다양성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융합시킬 수 있을 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상처받은 어른들의 성장담, 고레에다 히로카즈 ‘바닷마을 다이어리’=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엔 늘 ‘가족’과 ‘죽음’이 등장한다. ‘환상의 빛’(1995)에선 남편이 돌연 자살한 뒤 홀로 남겨진 아내가, ‘아무도 모른다’(2005)에선 엄마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네 남매가, ‘걸어도 걸어도’(2008)에선 장남을 잃은 가족들이 그려진다.
신작 ‘바닷마을 다이어리’ 역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이복 여동생 ‘스즈’를 만난 세 자매가, 고아가 된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시작된다. 하루아침에 가족이 된 이들은 새로운 삶에 잘 적응해가는 듯 보인다. 실은 모두가 살얼음판 위를 걷 듯 서로를 대하는 일이 조심스럽다. 세 자매는 스즈가 낯선 집에서 위축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스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언니들에겐 상처라고 생각한다. 언니들 앞에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기만 했던 스즈가, 어느 날 처음으로 죽은 엄마가 보고싶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큰 언니는 “엄마가 보고싶으면 그렇다고 말해도 된다”고 “이제 여기가 네 집”이라고 다독인다. 네 자매는 그렇게 가족이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죽음은 소멸, 상실이 아닌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가족의 죽음이 남겨진 가족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세 자매와 스즈는 새로운 가족이 된다. 세 자매는 재혼 후 집을 떠난 엄마를 할머니의 제삿날에야 17년 만에 마주한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하지만 그 전보다는 엄마를 이해하게 됐다.
어쩌면 고레에다 감독은 죽음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지 모른다. 많은 영화들이 죽음을 비극의 소재로 쓴다면, 그는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의 부재를 그리면서도 남겨진 이들이 어떻게 상실감을 극복해 나가는 지에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의 영화는 ‘(결핍된) 어른들의 성장담’으로 볼 수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최근 발간된 자신의 에세이집에 이렇게 썼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걷는 듯 천천히’의 ‘세계’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