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작 40여점 다양한 재료 돋보여
평면·입체 경계 허무는 실험도
![]() |
| 작가 하종현. [아트선재센터]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하종현(90)을 ‘단색화 거장’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이 전시는 그 인식을 뿌리째 뒤흔들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친 20세기 한국 현대사 격동에 응답한 그의 작품들이 한 작가의 손에서 태어났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변모해서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한 전시 ‘하종현 5975’는 재료와 물질성을 다각적으로 확장한 작가의 초기 작업을 집중 조명한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해 작가로 첫걸음을 내디딘 1959년부터 전매특허인 캔버스 뒷면에서 물감을 앞으로 두껍게 밀어내는 배압법으로 ‘접합’ 연작을 시작한 직후인 1975년까지를 망라하는 전시다. 50년 이상 물감을 밀어 올린 지금의 하종현 이전에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유리되지 않은 젊은 날의 치열한 고민과 고독한 사유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 |
| 하종현의 ‘자화상’(1959).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첫 번째 작품이다. [아트선재센터] |
전시장 입구에선 작가가 일평생 단 한 점만 그린 ‘자화상’이 관객을 맞는다. 피곤에 젖은 듯 반쯤 감은 눈,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마른 얼굴의 남성. 마치 전후(戰後)의 상흔이 할퀴고 간 한국 사회의 혼란을 반영하듯 거친 붓 터치가 인상적이다. 1940~1950년대 유럽에서 등장한 앵포르멜(informel) 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정형화된 회화의 틀에서 벗어나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물감을 두껍게 바른 실 덩어리를 불에 그을려 강한 물질감을 드러낸 작품 ‘무제’마다 황폐한 현실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도시화와 경제 성장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가 작업에 반영된다. 어둡고 고독한 느낌을 자아내는 형상에서 벗어나 채도 높은 추상 작업이 시작된 시기다. 대표작 중 하나인 ‘도시계획백서’ 연작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한 근대화 과정을 구조적으로 그려낸 작업인데, 강렬한 색채와 반복되는 기하학적 패턴이 마치 정비된 도심의 스카이라인이나 사정없이 쫙쫙 뻗은 고속도로를 연상케 한다. 캔버스를 길게 잘라 직조하듯 엮거나 한국 전통의 단청 문양이 현대미학으로 재해석된 ‘탄생’ 연작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 |
| ‘도시계획백서’ 연작이 설치된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
![]() |
| 하종현의 ‘도시계획백서 67’(1967). [아트선재센터] |
이어지는 전시에서는 2차원의 평면에서 탈피하고자 한 작가의 실험이 더욱 과감해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서른넷의 하종현은 평론가 이일 등 12명의 작가와 이론가가 중심이 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했다. 1969년부터 6년간 지속된 AG는 전위미술에 주력하며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시기 하종현은 물감과 캔버스를 넘어서 철조망, 못, 스프링, 신문지 같은 일상의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냈다. 단색화로 향하는 길목에서 매체의 제약을 넘어서고자 한 작가의 물성 탐구가 정치·사회적 억압을 은유하는 그 자체가 되며 작가의 가능성을 확장한 시기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도면으로만 남아 있는 거울 설치 작업인 ‘작품’이 AG 첫 전시 이후 최초로 공개된다.
![]() |
| 하종현의 ‘무제 72-3(B)’(1972). [아트선재센터] |
![]() |
| 하종현의 ‘작품 73’(1973). 철조망이 캔버스 뒷면을 둘렀다. [아트선재센터] |
전시 마지막에 다다르면 마침내 그가 독창적인 배압법을 고안하게 된 과정이 드러난다. 올이 성긴 마대자루를 캔버스 삼아 그 뒷면에 유성물감을 듬뿍 바른 뒤 커다란 나무 주걱과 같은 도구로 짓이겨 앞면으로 밀어내는 기법이다. “입체 실험에서 얻은 효과를 평면에 어떻게 옮길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기법은 하종현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미학이다. 캔버스 한 장 구하기도 어렵던 시절, 미군 군량미를 담던 마대자루는 작가의 대체 재료였다. 그렇게 마대자루 천을 투과해 흘러나온 물감은 의도치 않은 생생한 질감을 만들어내 그가 단색화 거장으로 자리 잡는 밑바탕이 됐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과 맞물린 그의 궤적은 단순한 양식의 발전을 넘어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해 온 작가의 도전이자 깊이를 더해가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오는 3월 20일에는 하종현의 최근작들을 만날 수 있는 개인전이 국제갤러리에서 진행된다.
![]() |
| 하종현의 ‘접합 74-17’(1974). 국제갤러리 소장. [아트선재센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