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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성균관에서 열린 신방례에서 성균관대 신입생들이 재학생들과 서로 인사하는 상읍례를 진행하고 있다. [뉴시스 제공] |
[헤럴드경제=신소연 기자] 조선시대 서울 종로구 명륜동 일대를 떠올리면 장래가 촉망되는 미소년 도령들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봄꽃이 흐드러진 반촌(泮村, 성균관이 있는 동네)을 거니는 모습이 떠오른다. 조선 유일의 고등교육 기관인 성균관이 있었던 이곳은 아직도 ‘대학로’라고 불리며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메카로서 그 상징성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을 주름잡던 사람들은 성균관 유생이었을까.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신간 ‘조선의 대학로’에서 당시 ‘반촌’이라 불리던 조선의 대학로는 성균관 유생 외에 주목할 만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반인(泮人)이다. 반촌의 주민인 반인은 반민, 반한, 관인, 관사람, 관노, 반예, 전복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이들은 성균관에 속한 공노비로 이곳의 온갖 업무를 맡았다.
기본적으로 유생들의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게 반인의 의무였다. 여기에 과거 응시를 돕고 붓이나 종이 등 물품 구매를 대행해 주는 등 유생들의 후견인이나 집사 같은 역할도 했다. 심지어 유생이 받아야 할 벌이나 징계를 대신 받기도 했다. 유생과 반인은 양반과 노비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주종관계라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계약 관계라고 보는 게 맞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에 자신이 모시던 유생이 급제해 지방 수령으로 내려가면 거액의 보상을 당당히 요구하는 게 일반적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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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
유생을 기반으로 한 경제활동으로 부를 축적해 온 반인은 임진왜란 이후 그 위세가 더욱 커진다. 성균관 재정이 열악해지면서 기관 운영을 반인들의 경제 활동에 기대게 되면서다. 저자에 따르면, 고종 때 법전 ‘육전조례’에 의거해 1년간 성균관에 들어간 재정을 돈으로 환산하면 1만8479냥 정도 되는데 이는 중앙 교육재정 3만1905만냥의 57.9% 였다. 당시 중앙 재정이 489만 냥임을 고려하면 전체 교육재정 비중이 0.65%에 불과했고, 이 마저도 성균관으로 다 유입되지 못한 셈이다. 그만큼 성균관 재정이 열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조선 정부는 현방(懸方, 푸줏간)에 대한 독점 운영권을 반인에게 넘겼다. 당시 조선은 술의 제조와 판매(酒禁), 소나무 벌채(松禁)와 함께 소의 도축(牛禁)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삼금(三禁) 정책을 시행했었다. 국가가 금지한 행위를 반인에게만 허용했으니 반인이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성균관의 위상은 개항과 제국주의의 침략을 겪으면서 급격히 추락했다. 반인의 역할 역시 필수적인 일부 기능만 제외하곤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고 반인들이 이곳을 바로 떠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선 말기 국가의 위기에 맞서 의협심을 발휘하며 자신들의 지휘를 향상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자원군으로 참전했고, 이후 특수부대인 별초군으로 편성돼 궁성을 수비했다.
조선의 대학로/안대회 지음/문학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