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된 기간 강조하는 단어 주로 활용
심리 자극해 합리적 판단 못하게 유인
금감원, 사기범 7명 실제 목소리 공개
#1. 30대 남성 A씨는 ○○은행 직원이라는 자로부터 “지금 누군가 당신의 신분증을 가지고 돈을 찾아가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해 주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경찰을 사칭하는 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시키는 대로 해라. 일단 당신 통장 계좌에 있는 거래내역을 추적해야 한다. 불러주는 계좌로 바로 돈을 이체시켜라”고 말했다. A씨는 그 말에 속아 5개 계좌에 3000여만원을 이체해 피해를 봤다.
#2. 대학 지원자인 20대 여성 B씨는 오후 1시께 대학교 교직원을 사칭하는 자로부터 “지원한 대학에 추가 합격했다. 오늘 오후 4시까지 등록금 530만원을 입금해야만 등록 처리된다”는 전화를 받았다. B씨는 부모에게 연락해 사기범이 불러주는 계좌로 돈을 입금했다.
보이스피싱 사기범은 잠재 피해자와의 통화 과정에서 “지금, 이제, 오늘, 일단, 먼저” 등의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정된 기간을 강조하는 단어를 피해자의 심리를 조종하는 일종의 압박 무기로 활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시간을 재촉하며 결정을 서두르게 하는 건 사기의 흔한 수법인 만큼 주의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6일 한치훈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주임연구원 등이 ‘보이스피싱 심리조작 수법과 소비자 보호 방안’ 연구에서 텍스트 마이닝 기법을 활용해 보이스피싱 사기범과 잠재 피해자의 실제 대화 448건을 분석한 결과, 사기범들은 상대방과 본인을 지칭하는 ‘고객님’, ‘저희’ 외에는 한정된 기간을 강조하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어 사용 빈도수를 보면 ‘고객님’이 1995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저희’가 1043건으로, ‘지금’이 994건으로 뒤를 이었다. 또 ▷이제 694건 ▷대출 544건 ▷처리 426건 ▷진행 418건 ▷말씀 300건 ▷일단 379건 ▷오늘 368건 등의 순으로 자주 언급했다.
연구자들은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이런 단어 선택은 제품 판매나 서비스 경험의 기간을 한정하는 마케팅 기법과 비슷하다고 규정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살 수 없다’는 심리를 자극해 소비자의 충동구매를 유도하는 것처럼 시급함을 유발하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유인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의미의 단어를 꾸러미로 묶어 주제를 추론하는 토픽모델링 결과도 유사했다. 보이스피싱 사기범은 주로 ‘이제, 일단, 그럼, 먼저, 지금, 오늘’ 등 피해자를 조급하게 만드는 키워드를 많이 사용했다.
이와 함께 ▷신뢰성 있는 회사명과 직함을 들어 신뢰성을 강조하거나 ▷특별한 권한 또는 한정된 기회 등을 통해 희소성을 부각하거나 ▷금융범죄수사와 관련한 키워드를 들어 공포감을 조성하는 등의 접근을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보이스피싱 잠재 피해자의 언어 패턴도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보이스피싱 피해가 예상되는 사례는 피해자들이 “그럼, 네네, 진행, 그래요” 등과 같은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반대로 보이스피싱 피해를 회피한 사례의 경우 “아니, 없어요, 신고, 확인, 경찰서, 도용” 등과 같은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단어 사용이 많았다.
연구자들은 “사기범들이 조급함을 유발하는 특정 단어를 통해 피해자가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심리 조작을 시도한다”면서 “보이스피싱 사기범이 주로 사용하는 단어를 즉각 알아채 통화를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금융감독원은 1일 최근 반복 제보된 사기범 7명의 실제 목소리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이는 2024년 중 제보된 총 3959건의 음성파일 중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분석을 통해 동일인 여부를 판단해 10회 이상 반복 제보된 목소리다. ‘보이스피싱지키미’를 검색하거나 관련 포스터 속 QR코드를 찍어도 공개된 음성을 확인할 수 있다.
금감원과 국과수는 2015년부터 지금까지 보이스피싱 사기범 67명의 목소리를 공개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사기범들은 검찰 사칭 또는 명의도용 사건에 연루됐다며 접근한 뒤 ‘피해자 입증’, ‘대면 조사’ 등 어려운 전문용어를 쓰며 피해자를 압박한다. 약식 조사 등을 빙자해 고립된 공간에 혼자 있도록 유도하고 구체적 개인정보 대신 거래 은행과 계좌 잔액 등 자산 내역을 요구한다.
가짜 사이트에 접속해 허위 공문을 확인하도록 유도한 뒤 개인정보를 탈취하기도 한다.
금감원은 대응 사례가 포함된 영상도 제작해 배포했다. 금융소비자가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으며 주요 수법을 모의 체험해 볼 수 있는 온라인 이벤트도 연다.
금감원은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실제 음성을 통해 주요 수법과 특징을 확인하고 의심되는 전화는 일단 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사기범과의 통화를 녹취한 파일을 보이스피싱 통합신고 대응센터에 적극 제보해달라고 덧붙였다. 김은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