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웅을 남편으로 둔 여인
10년 만에 돌아오자마자 살해
그녀 또한 인생 짓밟힌 피해자
다만, 복수는 복수를 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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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콜리어, 살인 후 클리타임네스트라(일부 확대), 1882, 캔버스에 유채, 239x174cm, 길드홀 아트 갤러리 |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이번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 아가멤논이 아닌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주인공으로 두고, 그녀의 복수극과 그 이유를 차근차근 짚어봅니다.
“난 원수 때려잡은 복수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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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콜리어, 살인 후 클리타임네스트라(일부 확대), 1882, 캔버스에 유채, 239x174cm, 길드홀 아트 갤러리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미케네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끝맺고 돌아왔다. 장장 십 년 만이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군과 맞선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 자리에 걸맞게 포로와 금은보화 등 전리품도 잔뜩 챙겨 귀환했다. 그는 이제 평생 영웅으로 불릴 것이었다. 누구도 두렵지 않고, 무엇도 차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이 영광을 만끽하기는커녕 잠깐 음미조차 하지 못했다. 궁으로 온 그는 고작 얼마 후 살해당한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고, 비참하게.
살인범은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였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재회한 그를 끌어안고, 땀과 피가 찌든 옷을 받아들면서도 싱긋 미소만 지었다. 앉고 누울 자리를 깔아주고, 술을 달라면 술을 주고, 씻고 싶다고 하면 곧장 목욕물을 데웠다. 이보다 헌신적일 수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랬던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이 욕실로 들어가자 얼굴색을 바꿨다. 눈웃음을 거둔 그녀가 향한 곳은 구석진 창고였다. 문을 여니 무기가 보였다. 그것은 날이 반짝이는 흉기였다. 이를 잡아든 순간, 한 남자의 그림자가 바짝 다가섰다. 그는 아이기스토스. 이 여인의 오랜 내연남이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끄덕. 그랬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뜻이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이 긴장을 푼 순간을 노렸다. “당신도 날 씻겨주려고 왔소?” 이런 말이나 할 만큼 완전히 마음 놓은 시간만을 기다렸다. 지금껏 보인 아양과 봉사는 모두 지금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를 덮쳤다. 퍽. 한 번, 두 번, 세 번…. 짧은 신음, 둔탁한 무언가가 끊어지고, 연이어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옷은 비릿해졌다. 힘줄이 선 목덜미와 팔뚝에는 흰 가루와 붉은 방울이 튀었다. 다만, 그게 다였다. 그녀의 얼굴은 더 또렷해졌다. 몰아쉬는 숨에서는 개운함만 묻어나왔다. 공포나 불안의 감정? 그런 건 조금도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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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콜리어, 살인 후 클리타임네스트라, 1882, 캔버스에 유채, 239x174cm, 길드홀 아트 갤러리 |
그렇다면 이것은 치정에 따른 살인인가. 내연남을 위해, 전쟁터에서 긴 세월 고생을 한 남편을 살해하고 말았을까.
영국 화가 존 콜리어가 그린 <살인 후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보라. 그녀의 눈빛이 말한다. 내게 그따위 저열한 올가미를 씌우지 말라고. 그녀는 당당하다. 살해 흔적이 묻은 도끼를 쥔, 무언가 선언하는 듯 천을 걷고 있는 모습은 외려 전쟁터의 장수 같다. 밑으로 내려다보는 눈빛, 꼿꼿한 자세는 되레 정의의 심판자를 떠올리게 한다. “살인자다!”라는 비명에 “아니, 나는 원수를 때려잡은 복수자일 뿐”이라고 응수할 수 있는 그녀는, 대체 무슨 사연을 품고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결혼당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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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의 소실된 그림을 복원), 레다와 백조, 153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x141cm, 내셔널 갤러리 레다에게 반한 제우스는 백조로 변신해 관계를 맺었다. 이후 레다는 남편 틴다레오스와도 동침한다. 그 결과 두 개의 알을 낳았는데, 한 알에서는 클리타임네스트라와 헬레네, 또 다른 알에서는 폴리데우케스와 카스토르 형제가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이 가운데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인간의 딸로 통한다. |
맹세코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한 번도 아가멤논을 남편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가문이 좋고, 능력이 출중하다고 한들, 그녀는 그를 평생 금수보다 못한 파렴치로 봤다. 그녀의 원한은 깊고 짙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뿌리 내린 씨앗이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원래 스파르타 공주였다.
제우스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는 왕비 레다가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래서일까. 클리타임네스트라 또한 우아한 외모와 균형 잡힌 몸을 타고났다. 조국 특유의 혹독한 교육을 견딜 만큼 심지도 강했다. 그렇기에 삶이 엇나갈 일 자체가 없을 것 같았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곧 피사의 왕 탄탈로스 2세와 결혼했다. 튼튼한 아들도 낳았다. 매일 아침 햇빛은 눈부셨다. 매일 밤 달빛은 은은하고, 강물은 표표하게 흘렀다. 완벽하게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유리 깨지듯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아가멤논, 그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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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멤논이 바위에 앉아 홀을 든 모습, 기원전 410~400년경, 타란토 국립 고고학 박물관 [Jastrow, Iliade exhibition at the Colosseum, wikimedia] |
아가멤논은 탄탈로스 2세의 사촌이었다.
아가멤논은 그 시절 탄탈로스 2세의 궁에서 신세를 질 일이 있었다. 이때 자연스럽게 클리타임네스트라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미모에 곧장 반했다. 끝내는 하면 안 될 일까지 벌이고 말았다. 살인과 폭행이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등에 따르면, 아가멤논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남편인 탄탈로스 2세를 살해했다. 그와 그녀 사이 출생한 아들은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다음, 하얗게 질린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몸을 수차례 욕보였다. 아가멤논은 애초 이런 자였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선 인간의 도리 따위 가볍게 짓밟는 인간이었다. 삶을 통째로 유린당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대로 생을 다하려고 했다. 그럴 수 없었다. 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놈의 씨앗으로 잉태됐다고 해도, 순백의 태아에게는 죄가 없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렇게 아가멤논의 아내가 된 것이었다. 내 남편, 내 아들을 죽은 이와 한 침실을 쓰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이미 닳아 없어졌다.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새롭게 태어날 자식,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곧 딸 이피게네이아를 안았다. 이어 딸 엘렉트라와 아들 오레스테스를 낳고, 끝으로 막내딸 크리소테미스를 출산했다.
첫째 딸마저 그 때문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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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름 포이어바흐, 이피게네이아 I, 1862, 캔버스에 유채, 250x175cm,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 박물관 |
첫째 이피게네이아는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가장 큰 자랑이었다.
이피게네이아는 선하고 유했다. 얼굴은 해사하고 몸가짐도 발랐다. 존재 자체로 기적 같은 소녀였다. 그자에게서 어떻게 이런 아이가 나올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런 딸 또한 허무하게 잃었다. 아이는 울면서, 나무 장작 위에서,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번 일의 원흉(元兇) 또한 아가멤논이었다. 놈은 그녀의 첫 남편과 첫아들, 이어 마지막 삶의 희망이었던 딸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사연은 이랬다.
아가멤논은 막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의 투구를 쓴 채 출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각지의 영웅을 모았다. 병사도 빼곡하게 불러들였다. 이제 바람만 불면 끝이었다. 곧 순풍이 찾아오면, 그때 돛을 활짝 펼쳐 진군에 나설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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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루이 다비드, 아킬레우스의 분노, 1819, 캔버스에 유채, 킴벨 미술관 아가멤논은 영웅 아킬레우스와 이피게네이아 사이 결혼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게 거짓임을 밝히는 순간,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이피게네이아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본인 허락없이 이름을 팔았다는 점에서 아킬레우스 또한 분노하고 있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날씨가 엉망이었다. 피부를 태우는 강렬한 빛, 살갗을 찌르는 날카로운 빗방울만 번갈아 쏟아졌다. 아가멤논 탓이었다. 그가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다.
아가멤논은 전쟁에 앞서 긴장을 풀 겸 동물 사냥을 한 적이 있었다. 그가 잡은 건 근육질의 빛나는 암사슴이었다. “어떤가? 내가 아르테미스 여신보다 활을 잘 쏘지 않나?” 그날 그가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아르테미스가 이 광경을 봤다. 모욕감을 느낀 그녀는 바람을 막아세웠다. 결과가 지금 이 꼴이었다. “여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싶소? 그대가 가장 아끼는 딸을 산 제물로 바치시오.” 아가멤논이 예언자에게 들은 조언이었다. 그래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딸 이피게네이아를 이곳까지 호출한 것이었다. 우리의 최고 영웅을 남편감으로 소개하겠다는 거짓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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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 페리에,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632~1633, 캔버스에 유채, 213x154cm, 디종 미술관 이피게네이아는 불길 속에서 죽지 않았다는 전승도 있다. 그녀의 운명을 딱하게 여긴 아르테미스가 암사슴과 바꿔치기를 해, 자기 신전의 사제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
설렘을 안고 온 이피게네이아는, 곧 절망과 체념의 마음만 안은 채 화형대에 서야 했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억울하게 죽어가는 와중에도 부모 걱정을 하는 이피게네이아는 성녀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당신이 잘못을 했으면 당신이 죗값을 치렀어야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의 옷자락을 쥐고 흔들었다. “그 아이는 이제 신들 사이에서 살고 있소.” 아가멤논은 이런 말이나 했다. “집으로 가시오. 내가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요.” 그는 군함에 올랐다. 그리스 연합군의 배들은 수평선 너머로 나아갔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절벽 위에 있었다. 멀어져가는 배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꽉 쥔 다섯 손가락 끝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아래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살아있을 자격이 없다” 마음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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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더릭 레이턴, 아가멤논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클리타임네스트라, 1874년경, 캔버스에 유채, 173.5×123.8cm, 레이턴 하우스 |
내연남 아이기스토스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사연을 듣고 진심으로 분개하는 듯보였다.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사촌이었다. 다만 아가멤논이 앞서 사촌 탄탈로스 2세를 거리낌없이 죽였듯, 아이기스토스 또한 사촌 아가멤논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해 인과응보의 운명을 안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일찌감치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미모에 반했던 그는, 그 과정에서 이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호메로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오디세이아》에 따르면, 아이기스토스가 먼저 아가멤논을 죽일 계획을 짰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처음에는 망설였다. 복수와 살인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가 있었다. 십 년간의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지도부보다 먼저 돌아온 전령의 말. “왕비시여. 아가멤논 왕께서 무사히 돌아오십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왕께서 트로이 공주를 첩으로 삼았습니다. 그녀도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 테니, 입을 옷과 머물 방을 준비해두라고 하셨습니다.” 아, 이 자는 정말 살아있으면 안 될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과 그 첩이 돌아오기만을 진심으로 기다린 것이었다. 누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내 손으로 직접 죽여버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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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블린 드 모건, 카산드라, 1898 카산드라가 불바다가 된 고향 트로이를 등진 채 서 있다. 카산드라는 트로이가 이렇게 될 것을 진작에 예견하고 수차례 경고했지만,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그때도 아무도 없었다. |
이 무렵, 미케네로 나아가는 아가멤논의 배에선 그 첩이라는 여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산드라였다. 그녀에게는 신묘한 힘이 있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예지력이었다. 이는 한때 사랑을 나눴던 예언의 신 아폴론에게 받은 능력이었다. 다만, 아폴론과 사이가 틀어진 후에는 저주도 함께 받았다. 그녀의 말에서 설득력이 사라진 것이다. 카산드라는 핏빛 미래를 봤다. 아가멤논과 자신의 시신이 으스러진 채 욕조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에게 이를 경고했다. 그대가 없는 사이 당신의 아내는 “쌍두사”이자 “불길한 여인”, “하데스의 어머니”가 됐다고 거듭 당부했다. 아가멤논은 이를 공포에 질린 여성의 넋두리로 들을 뿐이었다. 판본에 따라선 카산드라가 미래를 다 알고도 입을 닫았다는 말이 있다. 노예로 비참하게 사느니 단박에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아가멤논은 고대하던 미케네 땅을 밟았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을까. 왕은 괜히 흐뭇해졌다. 왕비의 진짜 속마음은 모른 채로.
저승에서도 기죽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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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나르시스 게랭, 아가멤논을 죽이기 전 망설이는 클리타임네스트라, 1817, 캔버스에 유채, 76x84cm, 루브르 박물관 |
“당신도 씻으러 왔소?”
아가멤논이 하얀 연기 틈으로 물었다. 목소리는 대리석 벽과 바닥을 타고 울렸다. 아가멤논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그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여보? 내 말이 들리지 않소?” 그가 되물었다. 카산드라는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죽음을 기다렸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에 따르면, 이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혼자서 아가멤논과 카산드라를 죽였다. 그녀는 군사 강국 스파르타 출신이지 않은가. 인간의 급소를 노리는 일이야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그물을 던지고, 이들이 버둥대는 순간 흉기를 들었다는 설이 있다. 아가멤논에게 목과 소매 없는 옷을 준 후, 상황을 모르는 그가 이를 입으려는 순간 날을 휘둘렀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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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나르시스 게랭, 아가멤논을 죽이기 전 망설이는 클리타임네스트라, 1817, 캔버스에 유채, 76x84cm, 루브르 박물관 아이기스토스가 망설이는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설득하고 있다. 아가멤논은 밖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긴장을 푼 모습이다. |
아이스퀼로스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살해 직후 한 말을 이렇게 기록한다. 사실상 “죽어도 쌌다”라는 이야기다.
내연남 아이기스토스는 그사이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아들, 오레스테스를 죽이려고 했다.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애기 위한 행동이었다.
다만, 낌새를 눈치챈 엘렉트라(오레스테스의 누나)가 이미 오레스테스를 국경 밖으로 빼돌린 후였다. 궁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이제는 아이기스토스가 죽은 아가멤논 대신 미케네 왕에 올랐다. 그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결혼식을 올리고, 자식도 셋이나 낳았다. 꼬이고 꼬인 복수극은 이렇게 끝을 맺는 듯했다. 하지만….
복수의 바퀴가 또 한 번 굴러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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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디노 메이,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이는 오레스테스, 1653~1654, 캔버스에 유채, 팔라초 살림베니 |
고개 숙인 전령이 아이기스토스 왕과 클리타임네스트라 왕비에게 나무 상자를 바쳤다.
아이기스토스가 이를 받았다. 묵직했다. 두 사람은 이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오레스테스, 그 아이가 언젠가 복수를 위해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제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 크리소테미스를 자기 자식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돌아보면, 첫째 딸 이피게네이아를 뺀 나머지 세 아이는 늘 아버지 편이었다. “어머니. 그나마 아버지가 있으니 우리가 이렇게 누리고 있잖아요.” 종종 이런 말을 하고, “어머니. 아버지도 선택을 강요받은 입장이었어요. 전쟁을 앞두고 수만명의 발이 묶여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테지요.” 이피게네이아를 떠나보냈을 때조차 이런 식의 위로를 했다. 완전히 틀린 말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지우며 이들의 존재 또한 함께 지웠다. 무명 농부에게 시집 보낸 엘렉트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오레스테스, 궁에 남았으나 이미 혼이 빠진 크리소테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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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다운맨, 복수의 여신들을 일깨우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유령, 1781, 패널에 유채, 예일 영국 미술 센터 |
아이기스토스가 유골함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예상했던 뼈와 가루가 없었다. 몇 개의 길고 납작한 돌멩이만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아이기스토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전령이라는 자, 그가 갑자기 흉기를 빼 들고 부부에게 달려든 탓이었다.
그는 먼저 아이기스토스의 숨통을 끊고, 이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목 위로 날을 올렸다.
“네가 오레스테스구나!”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렸다. “당신은 한때 나의 어머니였지요. 하지만 이제는 저의 수치이자 원수일 뿐입니다.” 변장복을 벗어던진 오레스테스는 날을 어머니의 핏줄로 밀어 넣을 기세였다.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을 보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오레스테스를 설득한다. “나는 너를 기른 사람이다. 내 아들과 노년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다독인다. 아버지를 왜 죽였느냐는 말에는 “운명의 탓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갑자기 웃옷을 벗고 나체까지 내보인다. “나는 너에게 이 젖을 직접 먹인 사람인데, 감히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라는 말과 함께. 오레스테스는 그 모습에 잠시 망설인다. 그래도 일을 치른다. 눈을 질끈 감고, 복수의 바퀴를 또 한 번 돌린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죽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 잘못을 말하려거든, 네 아버지의 잘못도 말해야지.”
복수의 여신 세자매에 또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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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부게로, 오레스테스의 후회(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 1862, 캔버스에 유채, 227x278cm, 크라이슬러 미술관 |
천륜을 짓뭉갠 죄도 깊고 짙었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인 직후 저주를 받았다. 복수의 여신들, 에리니에스 세 자매에게 쫓기는 게 그것이었다. 윌리엄 부게로의 그림, <오레스테스의 후회>가 그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횃불을 든 여신은 불같이 화를 내고, 뱀 몸통을 쥔 또 다른 여신은 “이 뱀 같은 놈!”이라며 욕을 내뱉는 듯하다. 이들이 가리키는 건, 어머니의 열린 가슴에 박힌 흉기. 오레스테스는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괴로워한다. 복수는 끝나지 않는다. 오레스테스는 훗날 신들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기나긴 고통에 처하게 된다.
복수의 첫맛은 달콤하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올라온다. 그런데, 그것은 도저히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려고 하질 않는다. 입안에 그대로 머문 채 썩고, 고이고, 상해버린다. 그렇다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생이 우리에게 안기는 통찰은 무엇인가. 무작정 용서와 인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남편과 자식을 잃고, 삶 자체를 유린당한 여인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복수를 하든 말든, 그것은 네 자유다. 다만 바퀴를 다시 굴린다면, 어쩔 수 없이 대가가 따라붙는 점은 명심하라. 이 정도로 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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