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다시 소환된 ‘빌리 엘리어트’…“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

‘빌리 엘리어트’ 스티븐 달드리 감독 내한
1984년 탄광촌, 2026년 AI 시대와 닮아
“빌리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 이야기”

 

영화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내한, 한국 버전의 뮤지컬을 본 뒤 “한국 프로덕션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한국 특유의 가족애와 교육열, 그리고 변화에 민감한 정서가 빌리의 이야기에 더 큰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시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소년의 꿈’은 시간을 건너 오늘과 만났다. 1984년 영국 탄광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2026년 서울 무대 위에서 AI(인공지능)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실과 만났다.

“이건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애도이자,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예요.”

2000년 영화로 시작해 2005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로 발레리노를 꿈꾸는 탄광촌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스티븐 달드리(66) 감독이 첫 한국 방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와 뮤지컬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영화가 소년의 ‘성장 서사’에 집중했다면, 뮤지컬은 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쌓여 빌리의 서사를 탄탄하게 만든다. 달드리 감독은 “‘빌리 엘리어트’는 개인이나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야기”고 돌아봤다.

달드리 감독은 영화와 공연, 드라마 시리즈를 아우르는 전방위 ‘콘텐츠 거장’이다. 데뷔작 ‘빌리 엘리어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비롯한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엘튼 존의 선율을 입은 뮤지컬로 토니상 10개 부문, 올리비에 어워즈 5개 부문 등 전 세계 유수 시상식에서 총 85개의 트로피를 챙겼을 정도다.

‘빌리 엘리어트’는 한국에선 2010년 초연, 신시컴퍼니의 스테디셀러 뮤지컬로 자리했다. 한국에 소개된 지 16년이 지났지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올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최근 한국 기자들과 만나 “오랫동안 한국에 오길 고대했지만, 늘 작업 일정에 가로막혔다”며 “서울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살아있는 도시”라며 놀라움을 전했다.

영화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스티븐 달드리 감독 [신시컴퍼니 제공]

그는 “(작곡가 엘튼) 존이 한국에서 공연이 올라간다는 사실이 너무 좋고 신난다고 했다”며 “한국 배우들이 훌륭하게 잘해주고 있다고 전했더니 매우 기뻐했다”며 웃었다.

특히 그는 한국 공연계 특유의 ‘고사’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전했다. 달드리 감독은 “공연 전 무사고와 성공을 빌며 극장의 신(神)을 달래는 한국의 의식은 정말 아름다운 리얼리티”라며 “런던에서도 한국 스태프들의 제안으로 비슷한 의식을 치르곤 했는데, 실제 한국에서 그 원형을 보게 돼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1980년대 영국 광산 파업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달드리 감독은 “1984년 사우스 요크셔의 탄광 마을에서 수프 키친을 운영하는 여성분들과 연극을 함께 만들어 투어를 다녔다”며 “더럼 탄광 마을 광부 광동체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지금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의 경험은 ‘빌리 엘리어트’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탈산업화 시대에 마지막 생존을 위해 분투했던 강력한 무역 조합인 전국광산노동자연합의 마지막 모습이 작품에 담겼다.

“누구도 석탄 채굴을 좋은 일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석탄을 태우는 것이 지구에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 일을 했던 광부들은 한 때 자부심을 가진 공동체였죠. 산업 구조의 변화 속에서 무시당하고 잊혔고, 지금도 그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소외된 곳 중 하나가 됐죠.”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그 이야기를 생생히 길어 올렸다. 달드리 감독은 “뮤지컬을 만들면서 빌리 개인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이야기를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고 했다.

뮤지컬은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탄광촌에서 자라난 꿈꾸는 소년 빌리와 성소수자인 빌리의 친구 마이클의 이야기를 병치한다. 마을은 온 힘을 다해 소년의 꿈을 응원하지만, 마을을 지탱해 온 어른들과 공동체의 삶은 시대의 격랑 속에 저문다. 빌리의 도약과 공동체의 몰락이 공존하며 양가감정을 전하는 것이 ‘빌리 엘리어트’라는 작품의 본질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 의미를 분명히 한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고사에 참석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 [신시컴퍼니 제공]

“광부들이 다시 갱도로 내려가는 장면은 단순한 귀환이 아니에요. 비유적으로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에요.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을 애도하는 장면이죠. ‘내 삶의 방식이 끝나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자신의 비유적 죽음(metaphorical mortality)을 인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는 2026년이 되자, 또 다른 의미로 공존한다. 달드리는 “이 이야기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서 “앞으로 5년 안에 세상은 급격히 변할 텐데 그 변화가 모두에게 좋은 방향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지난 몇 년 사이 전 세계 공통의 화두는 급변하는 AI 시대에 ‘나의 직업’의 생존 여부다. 달드리는 “AI 시대엔 승자도 있겠지만, 패자도 나올 것”이라고 봤다.

“우리는 지금 산업 혁명 이후 가장 급진적인 변화의 길목에 서 있어요. 앞으로 5년 이내에 AI는 영화 산업을 포함한 서구 사회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예요. 애니메이션이나 특수효과 분야에서 일하는 수만 명의 전문가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대규모 실업이 현실화할 거예요.”

역사는 반복된다. 기계의 등장이 사람을 대체했고, 에너지 사용의 전환이 석탄을 대체했던 것처럼, 기술의 진보가 또 다른 일자리를 대체한다. AI 시대를 마주하는 현대인의 불안은 과거 마거릿 대처 정부의 탄광 폐쇄 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잃었던 광부들의 고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달드리 감독은 봤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술적 고립’은 공연예술의 부흥을 이끌거라고 달드리 감독은 봤다. 그는 “모든 것이 온라인화되고 사람들이 각자의 스마트폰 안으로 숨어들수록 공동체가 한 장소에 모여 같은 경험을 공유하려는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고 봤다. 공연예술의 본토인 웨스트엔드(영국)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공연이 인기”라고 달드리 감독은 말한다.

‘빌리 엘리어트’의 1대 빌리인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임선우 [신시컴퍼니 제공]

그는 “영화가 점차 온라인 스트리밍에 밀려 힘을 잃어가는 반면, 무대 예술이 그 어느 때보다 인기를 얻고 있다”며 “같은 장소에 모여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더 고립될수록 집단 경험에 대한 필요가 강해진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숨결을 직접 느끼는 ‘현장성’이야말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류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이다.

한국을 찾은 만큼 한국판 ‘빌리 엘리어트’도 만났다. 이번 시즌의 백미는 2010년 한국 초연 당시 1대 빌리였던 임선우가 성인 빌리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국내 양대 발레단 중 하나인 유니버설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인 임선우는 “발레단에 입단하고 다리를 심하게 다쳐 3년 동안 발레를 하지 못했다. 그만둘 생각을 할 정도로 힘든 기간이었는데, 빌리 생각이 많이 났다”며 “빌리를 생각하며 어려운 시기를 잘 넘겼다”고 말할 정도로 ‘빌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달드리 감독은 지난 12일 드레스 리허설에서 임선우와 어린 빌리(박지후)가 함께 추는 마지막 장면인 ‘드림 발레(Dream Ballet)’ 장면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임선우에 대해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리노”라며 “그 파드되(pas de deux, 2인무)를 보는 순간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서사와 현실이 만나는 비범한(extraordinary)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레리노 중 한 명으로 성장했어요. 임선우를 보러 오는 것만으로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습니다. 전에 공연을 보신 적이 있다면 이번에 다시 표를 사서 그 10분만 보셔도 돈이 아깝지 않을 거예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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