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 ‘록시’ 옷 입고 브로드웨이로…“영어 못해도 할 수 있다는 거 보여주고 싶다”

오리지널 ‘시카고’로 브로드웨이 진출
라이센스 주인공이 원작 주연 첫 발탁
2012년 첫 출연, 한국 버전 최다 록시
오는 8월 17일부터 3주간 뉴욕 입성


뮤지컬 ‘시카고’ 주역 록시 하트 역으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는 배우 아이비 [신시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 우물을 팠더니 이런 기회가 왔어요. 다른 언어로 록시 하트라니, 제겐 기적 같아요.”

가수 출신 뮤지컬 배우 아이비가 브로드웨이로 향한다. 라이선스 작품으로 한국 무대에만 섰던 ‘순수’ 국내파 배우가 오리지널 원작의 주인공으로 낙점, ‘뮤지컬 본토’에 입성하는 것이다. 무려 600회, 한국의 최다 출연 록시인 아이비는 “‘시카고’의 록시가 나의 배우 인생과 닮았다”고 말한다.

아이비는 23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 뮤지컬 배우를 대표해 가는 만큼 책임감도 크고 부담도 크다. 설레면서도 두렵다”고 고백했다.

아이비가 서게 될 무대는 뉴욕 브로드웨이 앰배서더 극장. 브로드웨이 최장수 뮤지컬 중 하나인 ‘시카고’에서 록시 하트 역으로 8월 17일부터 9월 6일까지 약 3주간 현지 관객들과 만난다. 브로드웨이월드(BroadwayWorld)와 뉴욕 시어터 가이드(New York Theatre Guide) 등 현지 언론들은 일제히 “한국의 팝스타이자 뮤지컬 배우인 아이비가 브로드웨이에 데뷔한다”며 뮤지컬 속 대사를 인용해 “이제 모두가 입에 올릴 이름은 바로 아이비가 될 것(The name on everybody‘s lips is gonna be Ivy!)”이라고 말했다.

이번 캐스팅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장장 1년에 걸친 긴 시간 동안 세 차례의 영상 오디션을 거쳤다. 가장 큰 벽은 영어였다.

아이비는 “영어를 배운 지 1년 반 정도밖에 안 됐다”며 “미국 색이 짙은 작품이라 한국식 액센트를 가진 내가 ‘시카고’ 무대에 선다는 것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가수 겸 배우 아이비가 2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시카고’ 배우 아이비 브로드웨이 진출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디션 과정은 혹독했다. 매 순간이 한계의 시험대였다. 3~4개월 간격으로 날아오는 미국 크리에이티브 팀의 피드백은 가차 없었다. 록시 하트의 대표 넘버 두 곡과 긴 독백 장면을 모두 영어로 소화해야 했다. 미국 제작진은 끊임없이 수정 의견을 보냈다. 1차에선 모음 발음을, 2차에선 미세한 억양을 지적받았다.

아이비는 “한국어 버전의 록시가 하이톤 뉘앙스라면 영어 버전은 소리의 위치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며 “원어민의 호흡을 따라가기 위해 목소리 위치를 아래로 뚝 떨어뜨리는 발성의 전환이 필요했다”고 돌아봤다.

한계를 넘기 위해 주중엔 9명의 원어민 강사와 집중 훈련을 이어왔다. 연기와 보이스 액터, 액팅 전공자 등을 통해 비즈니스 영어부터 무대 화술을 넘나드는 ‘지옥 훈련’은 지금도 계속 된다.

사실 브로드웨이 진출 제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제작사인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는 “이전에도 미국 창작진이 한국과 일본 배우를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의견을 줬다. 당시엔 언어의 한계로 우리나라 배우들이 미국 무대에서 앙상블을 맞출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며 “특히 ‘시카고’는 풍자적이고 은어가 많은 공연이라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하지 않으면 소화가 어렵다”고 했다. 아이비 역시 “그땐 자기소개 외에는 영어를 거의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2~3년 전 박명성 프로듀서를 통해 다시 한번 오리지널 창작진이 아이비의 오디션을 제안했다. 박 프로듀서는 “그동안 한국에서 공연해 온 것을 미국에서 봐왔다”며 “‘일생일대의 도전인데 해보자’고 아이비에게 제안했다”고 말했다. 아이비의 마음이 달라진 것도 ‘도전’을 향한 욕구 때문이었다. 그는 “안 되더라도 영어 실력은 늘어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브로드웨이 데뷔라는 결실을 얻게 됐다.

뮤지컬 ‘시카고’ 록시 하트 역의 아이비 [신시컴퍼니 제공]


신시컴퍼니 박명성 프로듀서는 “한국 배우들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경쟁력을 갖춘 배우들이 많다고 늘 생각해왔다”며 “이번 기회는 아이비 개인의 열정과 도전 정신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평가했다.

브로드웨이 제작진 역시 아이비의 노력에 주목했다. 제작진은 “영어로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기 위해 보여준 헌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그가 이뤄낸 발전은 놀라울 정도다. 노래와 춤, 연기를 모두 갖춘 ‘트리플 쓰렛(Triple Threat)’ 배우”라고 전했다.

뮤지컬 ‘시카고’는 한국에서도 지난 20여년간 관객과 만난 스테디셀러다. 1920년대 미국 시카고를 주무대로 삼아 수감 중인 살인자 벨마 켈리와 록시 하트를 ‘대중적 스타’로 만드는 쇼뮤지컬이다. 1926년 시카고 트리뷴지 기자인 모린 달라스 왓킨스가 기록한 실제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2000년 한국에서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은 제작사 신시컴퍼니에서도 ‘맘마미아’와 함께 역대 최대 수익을 거둔 톱2 작품 중 하나다.

뮤지컬 ‘시카고’의 최다 록시 아이비 [신시컴퍼니 제공]


아이비와 ‘시카고’의 인연도 특별하다. 2012년 한국 프로덕션을 통해 처음 록시 하트를 연기한 이후 10년 넘게 같은 역할을 맡아왔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록시 하트 역을 가장 많이 맡은 배우”라며 “내 배우 인생 자체가 록시 하트와 같다.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 위기를 헤쳐 나가는 노련함, 강인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나와 닮았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가꿔온 작품 속 인물을 뮤지컬의 상징적 도시에서 연기하는 만큼 아이브는 몇 번이고 “다른 언어로 이 작품을 공연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아이비의 브로드웨이 진출은 한국 뮤지컬계에도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그간 한국 배우들의 현지 진출이 있었지만, 대체로 조단역이나 투어 무대에 섰다. 반면 아이비는 방대한 영어 대사와 노래를 부르는 주역 배우로 브로드웨이 한복판에서 정면승부한다. 박명성 프로듀서는 “아이비의 브로드웨이 진출은 전 세계에 한국 뮤지컬의 높아진 위상을 입증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르면 다음주 출국을 앞둔 아이비의 목표는 ‘언어 정복’을 통한 온전한 전달력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그는 “100% 토종 한국인이지만, 뉴욕 무대에서 영어로 대사와 노래를 완벽하게 전달하고 작품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브로드웨이 무대에 부끄럽지 않은 ‘록시 하트’를 각인시키고 오겠습니다. 저의 도전을 계기로 다른 한국 배우들도 브로드웨이에 더 많이 진출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무대에 데뷔한 지 16년이 됐는데 나이가 많아도, 영어를 못해도, 스타가 아니어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많은 분께 꿈과 용기를 드리는 계기가 되고 싶습니다. 한국 뮤지컬 배우의 저력을 보여주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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