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허상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우리가 보는 건 현실에 대한 해석일뿐”

GS아트센터 ‘예술가들’ 시리즈
다미앵 잘레×코헤이 나와 ‘프리즘’
흙·안개·프리즘 사이에서 묻는 인간


세계적인 안무가 다미앵 잘레와 현대미술가 코헤이 나와가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한 ‘프리즘’ [GS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지난 일요일 저녁 7시. 여느 공연이라면 굳게 닫혀 있어야 할 극장 문이 활짝 열려있다. 여전히 한 줄로 늘어선 관객들.

“안내하는 대로 조심히 따라오세요. 어두우니 계단 조심하세요.”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주의 사항을 일러주고, 10여명의 마지막 입장객이 GS아트센터의 대극장으로 들어갔다. 1000여개의 텅 빈 좌석 사이를 가로질러 향한 곳은 극장의 ‘은밀한 심장부’인 백스테이지.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암막 커튼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들어서자, 성인 남성 키의 두 배는 족히 넘는 거대한 직사각형 구조물 두 개가 좌우로 오연히 서 있다. 하단은 불투명하게 가려져 있다. 대다수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투명한 프리즘 유리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검은 유리로 희미하게 번지는 프리즘이 만든 무지갯빛. 아무런 변화도 없는 공간에서 관객들은 거대한 두 구조물 사이를 오가며 탐구를 시작한다.

이윽고 암전. 백스테이지를 집어삼키는 검은 어둠이 찾아오자 좌측 구조물 안에서 네 개의 다리가 조각상처럼 뻗어 오른다. 두 개의 구조물은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세계다. 여성(좌측)과 남성(우측) 2인은 아주 서서히 몸을 움직인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역동적인 몸짓을 느린 동작으로 수행하자, 그곳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같은 호흡, 같은 동작으로 몸을 비틀자 정교하게 드러내는 근육의 수축이 실재하는 인간을 드러낸다.

세계적인 안무가 다미앵 잘레(오른쪽)와 현대미술가 코헤이 나와 [GS아트센터 제공]


공연의 반전은 몇 걸음을 옮길 때 시작된다. 거대한 구조물을 따라 360도로 거닐자, 측면에선 ‘지각의 왜곡’이 벌어진다. 정면에선 선명하던 육체가 각도를 틀면 프리즘 시트의 굴절로 상이 흐려진다. 하나였던 몸은 둘이 되고, 둘은 셋처럼, 이윽고 넷처럼 겹친다. 어느 순간엔 몇인지 확신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잔상으로 복제한다. 현실의 신체가 해체되고, 허상의 미로가 지배하는 곳.

무엇이 진짜였을까. 다미앵 잘레는 “관객이 보는 그 어떤 이미지도 실제 몸이 아니다”라며 “실제 몸은 그 이미지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했다. 세계 최초로 공개된 안무가 다미앵 잘레와 조각가 코헤이 나와의 ‘프리즘(Prism)’이다.

벨기에 출신의 스타 안무가 다미앵 잘레와 일본 현대미술의 거장인 조각가 코헤이 나와가 한국에 찾았다. 지난 24~28일까지 두 사람은 그간의 역작인 ‘플래닛(방랑자)’, ‘미스트’는 물론 GS아트센터와의 협업으로 태어난 신작 ‘프리즘’까지 선보이며 동시대 예술의 경이로운 순간을 만들었다.

몸을 조각하는 안무가 vs 재료를 안무하는 조각가


다미앵 잘레와 코헤이 나와는 지난 10년간 전위적 예술세계를 구축해 왔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13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시작됐다. 코헤이 나와의 설치작품 ‘거품(Foam)’을 본 다미앵 잘레가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때 시작된 적극적인 러브콜이 만남의 탄생이다.

잘레는 “당시 코헤이가 어떤 아이디어를 가졌는지는 몰랐지만 함께 협업하고 싶어 그의 어시스턴트에게 굉장히 고집스럽고 밀어붙이듯 연락을 취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탄생한 첫 작품이 ‘베셀(Vessel)’(2016)이다. 그는 이 작품을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비인간적인(Inhuman) 무대”라고 말한다.

다미앵 잘레와 코헤이 나와의 첫 작품 ‘베셀(Vessel)’(2016) [GS아트센터 제공]


베셀은 혁신적인 무대였다. 무용수들이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 축축하게 젖은 무대 위에 섰다. 잘레는 “무대 한가운데엔 보트이자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모든 생명이 비롯되는 ‘원천의 장소’로서 조각이 존재했다”며 “7명의 무용수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어디 출신인지, 나이와 배경이 무엇인지, 심지어 성별조차 완전히 지운 채 고체와 액체의 경계를 오가며 추상성을 실험했다”고 귀띔했다.

첫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이번엔 조각가 코헤이 나와가 잘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우리가 함께 연 세계에 더 높은 잠재력이 있으니 멈추지 말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자”고 제안했다. 나와는 “다미앵과 난 머릿속에서 한 번 이미지가 떠오르면 멈추지 않고 아이디어가 계속 쏟아지는 타입”이라며 “이 파편들을 무대 위 퍼포먼스로 꿰매어내는 과정은 마지막 순간까지 엄청난 긴장감과 드라마틱한 스릴을 준다. 혼자 전시를 만들 때와 달리 나의 창조성이 훨씬 더 넓고 커지며 확장된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천생연분’ 같은 ‘예술적 동반자’라는 점을 확신한 뒤 내놓은 작품이 한국에서도 공개된 ‘플래닛(Planet)’이다. 나와의 제안에 잘레는 ‘플래닛’의 어원을 탐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 단어는 ‘방랑하는 자, 방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플라노무(Planom)’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그 과정에서 알게 됐다.

잘레는 “우리는 모두 중력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이동하고 여행하며 살아간다”며 “행성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다”고 했다. 행성의 한계 너머까지 탐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깊은 방랑벽이야말로 인류가 공유하는 본질이라는 것이 잘레의 생각이다.

그에게 ‘플래닛’은 천체가 아닌 인간이다. 끊임없이 이동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인간 자체다. ‘플래닛’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여덟 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이들은 같은 환경에서 같은 움직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한국에서 선보인 다미앵 잘레와 코헤이 나와의 ‘플래닛’ [GS아트센터 제공]


우주 먼지에서 지성까지…무대 위 펼쳐지는 생명사


잘레와 나와의 작업은 ‘독특한 물질’들이 무대에 등장한다. 모래와 안개, 슬라임과 프리즘이 그렇다. 이 물질들은 단순한 무대장치가 아니다. 무용수와 같은 비중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배우이자 생태계다. ‘플래닛’에선 검은 모래와 슬라임이 중력의 감각을 바꾸고 ‘미스트’에선 안개가 몸과 공간의 경계를 흐린다. ‘프리즘’은 빛이 하나의 신체를 여러 개의 이미지로 분리한다.

나와는 ‘플래닛’을 단순한 무용 공연이 아닌, 하나의 가상 행성으로 상상했다. 광물과 돌에서 시작된 생명이 움직임을 얻고, 식물과 동물이 되고, 마침내 인간이 돼 지성을 얻는다. 나와는 “일종의 ‘지성의 진화 과정’으로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우주적 서사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일본의 신화 고서인 ‘고지기(古事記)’를 바탕으로 한다. ‘고지기’는 세상을 지하의 저승 세계인 ‘요미(Yomi)’, 구름 위의 ‘천상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땅인 ‘갈대밭의 중간 지대’의 세 단계로 나눈다. 첫 작 ‘베셀’이 지하 세계 요미를 다뤘고, 댄스필름 ‘미스트’가 구름 위의 천상 세계를 탐험했다면, ‘플래닛’은 바로 생명이 저항하고 방황하는 ‘갈대밭의 중간 지대’를 소환했다.

낯선 물질세계에서 ‘몸의 여정’을 만드는 과정은 기존의 무용 작품에서의 안무와도 다르다. 잘레는 “단순히 정해진 안무 스텝을 외우고 따라 하는 무용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며 “모든 무용수에게 똑같은 신체적 한계와 극단적인 제한 상황을 줬을 때, 각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한계를 돌파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내는 과정에 매료된다”고 했다.

한국에서 선보인 다미앵 잘레와 코헤이 나와의 ‘플래닛’ [GS아트센터 제공]


그러면서 “무용수들은 척박한 환경의 언어를 받아들이기 위해 신체의 전혀 새로운 근육을 발달시켜야 했다”며 “동작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가져가는 것 모두 작품의 목적과 세계관에 무용수의 몸을 완벽히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나와 역시 무대 위 물성을 통해 신체성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나와가 제안하는 재료(진흙, 슬라임, 안개)들은 무용수의 몸과 결합해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만든다.

‘플래닛’의 장면 장면은 그림 같기도 영화 같기도 하다. 암흑 위로 우주 먼지(Interstellar medium)를 닮은 미세한 입자들이 반짝이고, 하늘에선 통제 불가능한 슬라임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여덟 명의 무용수는 감자전분으로 만든 식물 기반의 특수 비뉴턴 유체(Non-Newtonian fluid) 늪 속에 발과 무릎을 깊숙이 파묻은 채, 하늘을 향해 부풀어 오르는 풍선 인형처럼 초현실적인 궤적으로 중력을 이겨낸다. 기묘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가혹한 환경에서도 끝내 살아남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인류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급변한다. 현실과 가상을 끊임없이 오가는 혼재된 세상에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구별이 어렵다. 10년 전 대지의 흔들림과 자연재해의 충격에서 출발했던 두 사람의 질문은, 모든 것이 디지털 데이터로 변모하는 인공지능 시대의 한복판에서 또 다른 도달점을 마주했다.

나와는 “지금은 환경 문제뿐 아니라 AI와 컴퓨터의 진화로 인해 사람들이 마음속에 깊은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혼미의 시대”라며 “이 세계의 모든 정보와 인간의 정체성까지 디지털화되어 가고 가상화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무용수들의 몸을 통해 진짜 피지컬한 감각을 다시 되돌려 생각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프리즘’은 두 사람이 내놓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답이다.

잘레는 “우리가 보는 현실은 결국 현실에 대한 해석일 뿐”이라며 “ 가상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이 타인에게 투영하는 정체성이 얼마나 미로(Labyrinthic) 같아질 수 있는지를 다시 묻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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