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557일’…현대차 원팀의 힘

프로젝트 ‘하이퍼스피드’ 도전기
WEC 선언 499일만 성공적 데뷔후
韓 최초 르망 24시간 하이퍼카 완주
남양·현대모터스포츠·GMR ‘원팀’
기술·데이터 고성능 양산차 개발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이 르망 24시간 하이퍼카 클래스에 투입한 GMR-001 하이퍼카. [제네시스 제공]


“해보자.”

제네시스의 세계 최고 권위 내구 레이스 도전은 짧은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전담 조직도, 완성된 레이싱팀도 없던 상태였지만, 현대자동차그룹 경영진은 월드 인듀어런스 챔피언십(WEC) 출전 제안에 속도감 있게 응답했다. 그렇게 출발한 프로젝트가 ‘하이퍼스피드’다.

제네시스는 2024년 12월 4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WEC 하이퍼카 클래스 참가를 공식 선언했다. 이후 499일 만인 2026년 4월 이탈리아 이몰라에서 열린 WEC 개막전 ‘이몰라 6시간’에 직접 개발한 GMR-001 하이퍼카로 데뷔했다. 17번과 19번 차량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이어 557일째인 지난달 14일 프랑스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린 르망 24시간에서도 19번 차량이 완주했다. 대한민국 브랜드가 르망 24시간 하이퍼카 클래스에 출전해 완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성과의 배경에는 현대차그룹 내부 조직이 하나로 움직인 ‘원팀’ 체계가 있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GMR), 현대모터스포츠법인, 남양연구소가 차량 개발과 엔진 검증, 레이스 운영 경험 축적을 동시에 진행했다.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그룹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 겸 최고 디자인 책임자(CDO) 사장은 지난해 제네시스의 모터스포츠 진출 계획을 발표하며 “최고 경영층에게 제네시스의 내구 레이스 참가를 제안하고 얼마 안 돼 ‘해보자’는 답을 받았다”며 “이 속도감이 우리가 가진 ‘하이퍼스피드 정신’”이라고 회상했다.

제네시스는 먼저 자체 팀인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을 구성했다. 기존 레이싱팀을 인수하거나 외주 운영팀에 맡기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브랜드가 직접 팀을 만들고 운영 역량을 쌓는 방식을 택했다. 동시에 프랑스 레이싱팀 IDEC 스포트와 협력해 2025년 유러피언 르망 시리즈(ELMS) LMP2 클래스에 참가하며 내구 레이스 경험을 축적했다.

차량 개발의 핵심은 엔진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수년간 월드랠리챔피언십(WRC)에서 검증한 1.6ℓ 터보 직렬 4기통 엔진을 기반으로 WEC용 파워트레인을 개발, 이후 WRC 엔진 두 개를 결합해 900마력의 힘을 낼 수 있는 ‘G8MR 3.2ℓ 터보 V8’ 엔진을 완성했다.

공동 개발은 2024년 6월 시작됐다. 8개월 뒤인 지난해 2월 첫 시동에 성공했고, 이후 5개월간 테스트를 거쳐 엔진과 섀시를 결합한 하이퍼카 구동까지 이어졌다. 차량은 엔진 내구성, 냉각 성능, 야간 주행 시스템, 타이어 관리 성능 등을 검증받으며 약 2만5000㎞의 신뢰성 테스트를 거쳤다.

현대차그룹이 단기간에 하이퍼카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10년 넘게 쌓아온 모터스포츠 경험도 작용했다. 현대차그룹은 2012년 독일 알체나우에 현대모터스포츠법인을 세우고, 2014년부터 WRC에 복귀했다. 이후 서스펜션, 제동, 차체 제어 등 고성능 기술을 축적했고, 2015년에는 고성능 브랜드 현대 N을 출범시켰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이 기반 위에서 WEC와 르망 24시간이라는 더 높은 단계에 도전했다. 라 사르트 서킷 출발 세리머니에서는 각 제조사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그리드 위에 펼쳐졌다. 대한민국 브랜드가 하이퍼카 클래스에 이름을 올렸다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레이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19번 차량은 24시간 동안 총 372바퀴, 5068㎞를 달리며 완주에 성공했다. 서울과 부산을 여섯 차례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반면 함께 출전한 17번 차량은 레이스 종료를 약 7시간 30분 남겨두고 서스펜션 이상으로 리타이어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현재 원인을 분석하고 있으며, 시즌 후반 개선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프로젝트를 브랜드 인지도 확대뿐만 아니라 양산차 기술 개발과도 연결한다는 계획이다. 현대모터스포츠법인은 서킷에서 확보한 차량 데이터를 현대차그룹 AVP본부와 공유하는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극한 주행 환경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양산차 개발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모터스포츠의 기술적 의미를 강조해왔다. 정 회장은 2024년 11월 WRC 일본 랠리 현장에서 “스포츠가 항상 승패가 있는 거니까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다”라며 “좋은 성적은 우리가 자동차를 열심히 연구하고, 잘 만들어내는 데 힘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향후 WEC와 르망 24시간에서 확보한 기술과 데이터를 고성능차와 양산차 개발에 단계적으로 반영할 방침이다. 정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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